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90화 (390/558)

제390화

밀레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리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없는 거 보고 다음에 다시 오려 했는데 율이 안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해서.”

“잘했어.”

아리엘이 위아래로 시선을 움직였다. 밀레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멀쩡해. 다친 곳 없어.”

“다행이네. 이번엔 건진 거 있어?”

“아니. 게웰의 그림자도 못 봤어.”

“점점 꼬리 잡기가 힘들어지네.”

아리엘이 옷걸이에 외투를 걸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얼굴 봤으니까 됐어. 가볼게.”

“나 신경 써주는 거면 괜찮아.”

“언니야말로 몸 괜찮은 거야?”

아리엘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옆에 앉았다.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너만 하겠어? 최전선에 나서는 애 앞에서 아픈 시늉 할 순 없지.”

“사람 상대하는 것도 힘들잖아.”

아리엘이 힘껏 기지개를 켰다.

“안 그래도 유단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유단? 왜?”

“이런저런 이유로 얼굴 한 번 봐야 했거든. 사석에서 일대일로 보는 건 처음인데, 확실히 느낌이 있더라.”

“느낌?”

“집념 덩어리.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런 느낌을 풍기는 사람은 일을 저지르지. 네가 유단의 뒷조사를 부탁한 것도 이런 느낌 때문이겠지?”

느낌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심증이 있어서 부탁한 거지만.

“무슨 얘기를 했어?”

“별말은 안 했어. 요즘 뒤에서 뭔가 꾸미고 있는 거 같은데, 그거 조심하라고 경고했지.”

“뭘 꾸미고 있는데?”

“둔의 늙은이들과 뭔가 작당 중이야. 근데 내용은 모르겠어. 그거까지 파악하려면 내가 발을 깊게 담가야 하는데, 그건 위험해 보이거든.”

“내버려 두지 그랬어. 경고 같은 거 하지 말고.”

아리엘이 목을 살며시 주물렀다.

“너와 유단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겠지. 그러니 몇 년 동안 신경 쓰고 있을 테고. 내가 묻는다고 해서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묻지 않았어.”

“그건 고마워.”

“너에게 유단이 용서 못 할 인간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한텐 그 인간이 필요해.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말대로 유단이 사라져 버리면 적잖은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헛짓거리 말고 지금 하는 일에 열중하라고 경고하는 수밖에. 그 인간을 지금 잃을 순 없어. 유단의 부재는 학회와 타리움, 양측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테니까. 무엇보다…… 오라클 소대의 구심점을 잃게 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알아. 그래서 나도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

문득 가하란이 떠올랐다.

그런데 얼굴 형태가 흐릿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목소리 역시 선명하지 않았다.

다들 이렇게 잊어가는 걸까.

“언니는 잊지 못할 사람이 있어?”

“있지. 왜 없겠어.”

“잊지 못한다는 건 잊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 근데 왜 자꾸만 흐려져 갈까.”

“다 기억하고 살면 미칠 테니까. 잊는 게 때론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밀레나는 테이블 밑 체스보드를 바라봤다.

“유단의 뒷조사를 부탁한 이유…… 말해줄까?”

“털어놓고 싶다면. 하지만 알아둬. 공유된 비밀은 반드시 새어나가게 돼 있어. 내가 그걸 이용할 수도 있고.”

“언니가 이용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 이야기는 빼놓고, 덴스 교수 암살건만 떼어내 말했다.

“그러니까, 유단이 덴스 교수를 독살하고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 물증은?”

“없어.”

“물증도 없는데 어떻게 확신해?”

“교수의 유언을 들은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을 앞세워서 유단을 압박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죽었어.”

죽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지금도 꺼림칙하다. 입술을 스치고 나가는 말이 마치 칼날 같았다. 온 전체가 저며지는 느낌이었다.

“물증도 없고 증인도 없다. 아니, 그런 건 사소한 문제야. 중요한 건 이거지. 넌 왜 유단을 벌하고 싶은데?”

“그건…….”

“정의 같은 걸 입 밖으로 낼 거라면 그만둬. 네 앞에 있는 나부터가 정의란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어. 나만 그럴까? 지금 이 시대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추문을 하나씩 갖고 있지. 그게 추문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밀레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의는 개념일 뿐이며, 정의가 발붙일 수 있는 곳은 책밖에 없다.

언젠가 귀족 모임에서 들었던 말이다.

“덴스 교수를 암살했다. 사실이라면 유단은 인간 말종이지. 친부나 다름없는 은인을 죽이고 자리를 꿰찬 거니까. 근데,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지? 설령 진실이라고 해도 누가 그 말을 믿어줄까? 오히려 유단이 이용할 수도 있어. 패악을 저지르던 교수를 자신의 손으로 단죄했다, 라고.”

“분명 그렇게 나오겠지.”

“정의 같은 시시콜콜한 걸 실현할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어. 그럼에도 여태껏 목매는 이유는 뭐야? 덴스 교수와 접점도 없잖아.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을 테고.”

“복수를 다짐할 정도의 친분은 없지.”

“근데 왜?”

“……이게 연결점이니까. 그 애가 남기고 간 사건.”

밀레나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언니 말대로 정의 같은 건 상관없었어. 걔가 연관된 일이니까, 걔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니까 내가 집착했을 뿐이야. 사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진즉에 포기해도 될 일인데.”

이 추저분한 사건이 가하란을 기억해낼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었다.

이마저도 놓아버리면 가하란이란 이름조차 떠올리지 않게 되리라.

잊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

죽었으니까.

죽은 사람을 언제까지 끌어안고 살 순 없으니까.

능숙하다고 생각했다. 잊고 떠나보내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그 애만큼은 안 되는 걸까.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기 싫은 것이다.

미련하게, 멍청하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붙들고 있는 것이다.

고개가 비스듬히 쓰러졌다. 아리엘의 어깨에 기대 멀거니 벽만 바라봤다.

“잊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난 정말 몰랐어. 아니. 분명 쉬운 일이었어. 따분한 것들을 금방 잊어버리고 새로운 걸 찾아내는 게 내 장점이었으니까. 근데…….”

“사람의 뇌는 참 얄궂어서 말을 안 들어.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잘 잊고, 잊어야 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안 잊고.”

“영원히 얄궂었으면 좋겠네. 그러면 안 잊을 거 아니야. 근데, 점점 흐릿해져 가.”

“너무 신경 쓰지 마. 놓아줄 시기가 오면 네가 원치 않아도 놓아주게 돼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계속 떠오를 테고.”

울고 싶다는 생각은 드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몇 분간 기대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응, 가야지.”

“협회 쪽 일, 체질에 안 맞으면 그만둬. 거기 괴물 같은 사람들 많아서 냅둬도 돼.”

“그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끔찍한 일에 휘말리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줄어들면 좋은 거니까.”

“넌 사람이 착해서 탈이야.”

“착하다는 말 처음 들어봐.”

“내가 앞으로 자주 해줄게.”

“됐어. 언니한테 그 소리 들으면 뭔가 꼬일 거 같아.”

개인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리엘에게 물었다.

“혹시 퀼비언 쪽 소식 들은 거 있어?”

“아니. 그놈의 신성한 땅이란 게 어디 처박혀 있는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야. 조합장, 브라인, 민 교수. 복귀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아.”

“2년 가까이 지난 거 같은데,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

“그쪽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민 교수만 고생이지, 다른 두 분은 시간이 넘쳐나는 양반들이니까.”

마도사와 바라라족.

둘 다 몇백 년 이상은 살아왔을 존재들이다. 그사이에 낀 민 교수만 걱정될 따름이다.

“협회장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 알아?”

“그분 행방은 단장님, 아니, 총무님이 알고 계실 거야. 안 그래도 지금 둔에 계셔.”

“정말? 연합왕국 쪽으로 간 건은 잘 해결된 건가.”

“기현상이라고 하는데, 세상이 이렇다 보니 그게 계와 연관된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만나려면 요정의 안뜰로 가봐.”

“거기 계시는구나. 고마워.”

“힘들면 종종 와서 푸념해도 돼. 시간당 옛 제국 금화 1개 정도만 받고 들어줄게.”

“눈물 나게 고마운 말이네.”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곧게 뻗은 대로를 따라 거병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생산의 요충지가 된 둔은 하루가 멀다 하고 거병을 찍어내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자원이 거대도시 둔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광고판을 흔드는 기계인형을 지나 둔 동부로 향했다.

수복할 엄두조차 안 나는 거대한 균열이 곳곳에 생긴 지역. 예전에는 귀족 거주지였으나 이제는 둔의 노동자들이 밀집한 곳이 됐다.

요정의 안뜰은 동부 E-3 골목에 있었다.

밀레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멀리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많으니까 순서 좀 지키고요! 거기 아가씨! 새치기하는 거 봤어요. 얼른 뒤로 가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칼리고가 지휘봉처럼 국자를 휘휘 저으며 외치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지나 단장 앞으로 걸어갔다.

“뭐 하세요?”

“보면 모르나요? 배식 중이요.”

“아니, 그건 아는데 왜 총무님께서…….”

“일손이 없으니까요, 일손이! 밀리언 이 양반은 안에서 기계처럼 재료 손질 중이고, 다른 사람들도 바쁘긴 마찬가지니 어쩌겠어요.”

고개를 돌리다가 밀리언의 아내, 에나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의 압박이 전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솥 앞에 서서 커다란 주걱으로 얇게 썬 고기를 뒤섞고 있었다.

왜, 라는 의문에 다시금 에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에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어린 딸, 에일과 눈이 마주쳤다.

생긋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데, 어찌나 예쁜지.

“밀레나 양도 걸려들었군요.”

“네?”

“저 눈웃음에 걸리면 일 안 하고 못 배기죠. 곰 같은 사내한테서 어떻게 저런 귀여운 아이가…….”

쿵 소리에 대화를 멈추고 뒤를 바라봤다. 뜨겁게 달궈진 솥을 의수로 붙잡는 밀리언이 있었다.

“단장님. 말할 시간 있으면 손부터 움직이시죠.”

“오늘따라 랜더 씨가 그립네요.”

“쉬고 있는 대장 찾지 말고 어서 움직여요.”

밀레나도 밀리언의 시선을 받았다. 머쓱하게 웃으며 국자를 저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그래, 오랜만이네.”

“저번에 같이 작전 나간 이후로 처음이죠?”

“그렇지.”

“애들은 역시 금방 크네요. 에일, 저번에 봤을 때는…….”

“밀레나.”

“네?”

“고기 탄다.”

“아, 네.”

묵묵히 주걱을 움직일 때였다.

“에일도 널 보고 싶어 했다.”

“저를요?”

“잠깐 놀아줬던 게 기억에 남은 모양이야.”

무뚝뚝하던 밀리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처음 밀리언과 작전을 나갔을 때는 저 웃음이 낯설었다. 안대 밑으로 살짝 보이는 흉터와 어설픈 미소. 상극의 조합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삭막한 모습과 달리 정겨운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고기 탄다.”

“알겠어요, 신경 쓰고 있다고요.”

물론 음식 앞에서는 정말 삭막해지는 사람이라 문제지만.

폭풍 같은 배식이 끝났다.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 힘들다며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손목을 살짝 주무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까르르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에일을 목덜미에 얹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타챠가 보였다.

저 아저씨는 왜?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칼리고가 다가와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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