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냥 살고 싶을 뿐이야. 너희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 조용한 곳에서 죽은 듯이…….
치지직, 케이지 안쪽으로 방출된 마전기가 마수의 몸을 관통했다.
마수의 몸이 오므라들었다. 메케한 냄새도 피어났다.
“내성이 생겼습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마전기에 대응하고 있어요.”
수석연구원이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대역을 변경한 마전기가 마수의 몸을 강타했다.
“한 세대가 몇 년 주기일까요. 아니, 몇 달일지도 모르겠군요.”
유단은 움찔대는 마수를 바라봤다.
“다행히 모든 개체가 특성을 물려받는 건 아닙니다. 게웰이 발현시키는 건지, 아니면 심어둔 인자가 특정 조건에서 눈을 뜨는 건지…….”
“더 살펴봐야 알 수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학회장님께서 실험물을 계속 공급해 주시는데 마땅한 성과를 못 내고 있네요.”
유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잘해주고 있어요. 전 대역에 거쳐 내성이 생긴 건 아니니, 약점 대역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만, 그만해……. 정말 죽겠어…….
탁한 백색으로 변한 마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단은 케이지 가까이 다가갔다. 수석연구원이 뒤따르며 위험하다고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괜찮습니다. 지능이 있는 놈이니 사람을 공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물처럼 엮은 창살 너머로 마수가 보였다.
“게웰은 어디 있지?”
-몰라, 정말 몰라.
“더미용으로 널 던져뒀을 리 없어. 쓸데없이 손 패를 보여주는 거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더미를 이용했다면 더 큰 이득을 봤을 텐데, 굳이 사전에 우리에게 주지시켰어. 이유가 뭘까?”
-몰라. 난 정말 몰라. 게웰이 그곳에 있으면 된다고 했어. 내 영토로 만들어 준다고.
“이름이 뭐지?”
-나? 난 아직 이름이 없어.
“이름을 갖고 싶어?”
-워, 원하는 이름은 있어. 루어. 언젠가 인간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 루어라는 환상 속 동물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여행을 다닌다고.
“그래. 루어. 오늘부터 네 이름은 루어야.”
-그, 그래? 좋아. 이름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 이제 날 놓아주는 거야?
“아니.”
유단은 케이지 철망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루어, 뭐든 기억해내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우리에게 가치 있는 생명체라는 걸 증명해야 해.”
-증명?
“모른다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올 때마다, 너에 대한 평가가 내려갈 거야. 평가는 중요하지. 그렇지?”
마수의 눈동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케이지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 안에서 온몸을 비틀고 있는 마수가 저 망막에 맺힐 것이고.
-생각해 낼게. 뭐든지 다!
“좋은 자세야.”
수석연구원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마주 오는 연구원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안에는 손님이 와 있었다. 허락 없이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의원님.”
“너한테는 의원보다는 교수라 불리고 싶은데.”
탄드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때?”
“게웰의 의도를 파악 중입니다. 전술 하나를 노출하면서까지 우리를 유도한 이유, 그걸 알아내야겠죠.”
실험용 보호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 곁으로 다가온 탄드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언제나 성과를 가져다줬지. 그것도 최상의 성과를.”
“교수님께서 지지해주신 덕분입니다.”
“그 반대 아닐까? 내가 네 덕을 크게 본 거 같은데.”
“서로에게 득이 된다면 그보다 좋은 관계는 없겠죠.”
“그렇지.”
앞에선 탄드라가 손을 뻗었다. 다정한 손길로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져줬다.
“나한테 얘기가 계속 들어와. 너와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없겠냐는 얘기가.”
“그렇군요.”
“일도 좋지만 슬슬 짝을 찾는 것도 나쁘진 않아. 우수한 종자는 남겨야지.”
“아직 여력이 없습니다. 단란한 가정은 제게 너무나도 먼 얘기 같아요.”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일단 대부분은 물렸어. 하지만 나도 매몰차게 거절하기 힘든 건이 하나 있어.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만나줄 수 있겠어?”
“교수님의 부탁이라면 그래야죠.”
“고마워.”
유단은 탄드라를 등진 채 커피잔을 매만졌다. 탄드라는 어느 순간부터 남녀관계가 아닌 어머니의 위치를 대신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저 여자는 세잔과 몸을 섞고 있으니까. 최근에는 그마저도 질렸는지 관계가 소홀해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걸까? 성욕이 사그라들고, 그 공백을 다른 욕망이 비집고 들어온다.
탄드라는 모성을 발휘하고 싶은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필요한 여자였고 맞장구를 쳐주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여기로 불렀어.”
탄드라가 말했다.
이건 좀 의외였다. 나중에 시간을 잡을 줄 알았는데.
“상대가 누구죠?”
“너도 잘 아는 여자야. 티안 가의 아리엘. 지금이야 가문 명이 무색해졌다지만, 우리 세대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뜻깊은 이름이지.”
아리엘.
스파우의 시장. 동시에 타리움의 다섯 상위의원 중 하나.
“아리엘 의원이 요구한 자리인가요?”
“아니. 건너건너 나한테 부탁이 들어왔어. 타리움이 발족하고 시간이 꽤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내부 사정이 복잡하니까. 이런 기회에 서로 빚을 지워두는 게 좋지.”
탄드라가 외투를 손목에 걸쳤다.
“나머진 두 사람이 알아서 하고, 그 건은 어떻게 되고 있지?”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디온 사령관께 전해주시죠. 준비됐다고.”
탄드라의 눈이 깊은 곡선을 그렸다.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인다.
“역시, 넌 날 실망시킨 적이 없어. 기대하고 있을게.”
“저녁에 뵙겠습니다.”
탄드라가 방을 빠져나갔다. 찻잔을 두 개 준비해 커피를 내릴 때였다.
두 번의 노크, 그리고 침묵.
“들어오시죠.”
문이 열렸다. 사석에서는 처음 보는 아리엘 시장이 시원한 걸음걸이를 뽐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방긋 미소를 짓고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도 되겠죠?”
“네, 그러시죠.”
찻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커피를 준비했습니다만, 따로 선호하시는 차가 있다면 바꿔 드리겠습니다.”
“다른 차는 안 마셔요. 향을 즐길 여유 따윈 없거든요.”
잔을 들더니 입김을 연신 불어 넣는다. 찻잔에서 솔솔 올라오던 김이 사라졌다. 커피가 식은 걸 확인한 아리엘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꿀꺽꿀꺽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좋은 만남이었어요. 차도 맛있었고요.”
“예.”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없습니다만, 조금 궁금하긴 하군요. 왜 이 자리에 오신 건지…….”
“타리움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성됐죠. 옛 귀족의 위세를 되찾고 싶어 하는 분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고요. 연줄을 대 관계를 돈독히 하고, 서로의 치부를 공유하며 결속력을 다지고.”
티안 가.
게스할트 장군이 급사한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으나, 장녀인 아리엘이 스파우의 시장이 된 이후로 다시금 명성을 되찾고 있었다.
친모와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아 서로 헐뜯고 있다고 하는데, 중요한 정보는 아니라 기억 저편에 밀어둔 상태였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권유한 자리라 한 번은 나왔어요. 이걸로 그분 체면을 살려드렸으니 다음에는 제 부탁을 싫어도 들어주시겠죠. 안 들어주면 그걸로 관계는 끝이고.”
아리엘이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봤다.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냥 가려고 했는데 커피 맛이 좋네요.”
“기왕 오신 거 한 잔 더 드시고 가시죠.”
찻잔 가득 커피를 따랐다. 이번에는 후후 불지 않고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는 아리엘이었다.
“그쪽은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차도 얻어 마셨는데 뭐든 하나 물어봐요.”
“없습니다.”
“듣던 대로 여유가 넘치시네요.”
“의원님도 듣던 대로입니다.”
“좋은 소문은 아니었을 텐데.”
“사람들의 입을 빌리자면, 뛰어난 향상심으로 질주하는 철의 여인.”
“권력욕에 미친년을 제법 순화해 주셨네요.”
“그게 그거니 별 상관없죠.”
아리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해 보시죠.”
“둔의 늙은이들을 데리고 대체 뭘 하려는 거죠?”
“무슨 말씀이신지.”
“세잔과 탄드라, 두 분이야 뭐 그렇다 치고. 지금 군부의 머리인 디온 사령관은 대외 활동을 그만둔 지 1년째에요.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죠.”
“그렇군요.”
“제가 아는 디온 사령관은 집념의 화신이에요. 동시에 죽음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죠. 그분이 보인 삶에 대한 집착은 광기에 가까워요.”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죠.”
“대부분은 두려워하다가 수긍하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하지만, 디온 사령관이면 극복하려고 노력 중일 거예요. 그리고 학회장님께서 뭔가 도움을 주시고 계시겠죠.”
이 여자, 쓸데없이 귀가 밝다.
정보수집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아리엘이 둔 상위층의 뒤를 캐고 있는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노력이 나쁜 건 아니죠.”
“정상적인 노력이라면 말이죠. 근데 죽음을 극복하는 노력이란 게 정상적일 리 없잖아요?”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가요?”
“뭐든 적당한 게 좋다는 거예요. 유단 학회장님, 손에 쥔 것 이상을 욕심부리면 크게 다쳐요.”
“그런 경우를 보셨나 봅니다?”
“봤죠. 인간 이상의 것을 꿈꾸다가 괴물이 된 사람들을. 경계를 넘으려 하지 마세요.”
“넘겠다면요?”
“음, 제가 말릴 수는 없죠.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인재를 사랑해요. 인간의 됨됨이보다 능력을 중시하죠. 그런 점에서 유단 학회장님은 정말 뛰어난 인간이고요. 현 타리움이 유지되는 것도, 마수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도 학회장님의 공이 크고요.”
아리엘이 찻잔을 들어 휘휘 흔들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크고 단단한 톱니바퀴라고 한들, 어긋나서 기계 전체에 피해를 주는 순간 수리공을 상대해야 할 거예요.”
“수리공? 어떤 단체인가요?”
“아니요. 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저라면 그 수리공을 상대하느니, 국가를 적으로 돌리겠어요. 그게 속 편해요.”
탁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는 아리엘이었다.
“경계는 넘지 마세요. 상식 내에서 만용을 부리면 수리공은 찾아오지 않아요.”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상식 밖에 있습니다.”
“그러면 뭐…… 그게 경계를 넘지 않길 기도하며 일하세요.”
아리엘이 일어섰다.
유단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경고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했잖아요. 인재를 아낀다고.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요. 쓸 만한 사람이 절실한 시기고요. 이런 상황에서 공백이 생기면…… 내가 더 힘들어질 게 뻔한데, 그건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머릿속으로 아리엘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했다. 문고리를 잡은 아리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의원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리엘이 몸을 돌리며 웃음을 보였다.
“초대 대통령. 귀찮은 아저씨 한 분이 저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어서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 할 건 없죠.”
“대통령. 몇 번 들어본 단어군요.”
“학회장님도 관심 있나요?”
“아니요. 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경쟁자는 적을수록 좋으니.”
배웅은 됐다며 문을 여는 아리엘이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근데 외로움을 많이 타시나 봐요.”
“그렇게 보입니까?”
“네. 근데 좀 재미있네요. 마치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그런 어리숙한 외로움이 보이는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아니요. 거절할게요. 방금 그 눈, 꽤 위험해 보였으니까요.”
문이 닫혔다.
유단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연갈색 커피 물에 얼굴이 비친다.
여유로운 미소가 걸린 얼굴.
“수리공이라.”
지금부터 벌일 일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면, 아리엘은 혼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타리움의 의원들, 아니, 군인과 함께 들이닥친 다음 날 죽였을 것이다.
그게 인간의 안전을 위한 일일 테니까.
유단은 입가를 매만진 후 일어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