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짙은 검정에서 회색,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하는 마수의 몸은 마치 급변하는 감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수 쓰는 걸까요?”
라틀이 작게 말했다.
-게웰! 빨리 나와! 난 인간들이 무서워. 더는 못 버티겠어!
웅덩이처럼 바닥에 고여 있는 마수는 무언가에 붙들렸는지 움찔거릴 뿐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본대에서 쏟아내는 굉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라클의 진군 속도를 생각해보면 10분 내로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게웰하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닌 것 같네요.”
게웰은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마수였다. 산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균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정도로 얇아지기도 했다.
군대의 포위망을 매번 빠져나가던 영리한 마수가 전선 한복판에서 멍청하게 소리나 지르고 있을 리 없다.
“그러면 저건 뭐죠?”
“마수 사이에 끈끈한 연대 같은 게 있을 리 없겠죠?”
밀레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는 마수를 바라봤다.
“미끼겠군요.”
“허탕이네요.”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요?”
“우리를 속일 수 있는지 없는지, 게웰이 실험한 것 같아요.”
“더미를 깔아두고 우리 동선을 체크한다. 머리 쓰는 게 점점 더 귀여워지네요.”
라틀이 대 마수용 손도끼를 손에 들며 물었다.
“어쩔까요? 본대 올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면…….”
“1, 2분대는 백업 준비. 3분대만 나가죠.”
명령을 받은 라틀이 수신호를 보냈다. 대열 중간에 있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긴장해. 게웰이 아니더라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실전 경험이 적은 3분대원들이 경직된 얼굴로 마수를 바라봤다.
“오늘은 재수가 없을 거 같으니 빠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지금 말해. 컨디션 안 좋은 애도 거수. 경험 쌓으러 가는 거지,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물론 손드는 사람은 없었다.
“하사님이 이끌어요. 일단 제가 시선을 붙잡아둘 테니.”
“대장님이 고기 방패 하신단다. 겁먹지 말고 연습한 대로 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뒤로 물러서. 빈자리는 정신 똑바로 차린 놈이 채우고.”
밀레나는 왼쪽으로 빠지며 라틀에게 신호를 줬다.
-게웰! 빌어먹을 새끼야!
유창한 공통어였다.
그라운드 제로 당시만 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마수는 특별 취급 했는데, 이제는 꽤 흔해졌다.
언어가 갖춰졌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 상상할 수 있다는 뜻. 시간이 더 지나면 마수들은 인간이 해왔던 것과 똑같이 미지를 상상하며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인류가 신인류를 맞이해 변화했듯 마수 역시 격변을 치르고 있었다.
판도가 바뀌기 전에 청소를 끝내야 할 텐데.
신체술을 끌어올리며 마수 정면으로 나아갔다. 마전기가 감도는 검날이 붉게 빛났다. 배터리 교환까지 5분.
훈련 목적도 있으니 적당히 해볼까?
-오, 오지 마!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를 내며 마수가 몸을 뒤흔들었다. 신체 변형을 기반으로 한 공격? 아니면 마나를 사용한 변칙 공격?
땅 밑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왼발을 차며 몸을 띄웠다. 방금 서 있던 곳에서 녹색 증기가 뿜어졌다.
휘말린 잡초가 검게 타들어 갔다.
“외부 감각이 둔한 사람은 뒤로 빠져!”
마수 뒤쪽에서 접근하던 3분대원 중 두 사람이 이탈했다.
-오지 마!
분대원들을 향해 마수가 소리쳤다. 지면이 꿈틀대며 녹색 증기가 뿜어졌다.
분대원들이 산개하며 증기를 피했다.
“분출 순간만 피하면 돼! 잔류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대기로 흩어진 녹색 증기는 인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치명적인 건 분출 순간에 노출되는 것뿐.
마수의 공격 범위 바깥에서 분대원들을 바라봤다. 다들 신체술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증기를 피하고 있었다.
저 둘 괜찮네, 밀레나는 분출지점을 예측해 먼저 이동하는 분대원을 눈여겨봤다.
신체술, 그중에서도 특히 신체술로 인한 외부 감각 발달은 개인마다 차이가 심했다.
운동 능력은 대동소이 하게 증가하나, 외부 감각 발달만큼은 재능의 영역이었다.
먼저 이탈한 두 명도 우수한 병사였다. 단지 감각 능력이 타 분대원보다 떨어질 뿐.
“오라클 1개 대대가 움직였는데 고작 더미라니. 타리움 어르신들, 손익계산서 때리면 피눈물 흘리겠네요.”
라틀 하사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른 분대원들은 마수의 공격 범위 안팎을 오가며 마수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남는 게 돈밖에 없는 곳이니 그쪽 사정은 걱정하지 말죠.”
밀레나는 돌멩이 하나를 들어 마수에게 던졌다. 물리적인 방어 수단이 전혀 없는지, 날아간 돌멩이가 그대로 마수의 눈에 직격했다.
-오지 마! 날 내버려 둬!
하나뿐인 눈을 투명한 외피로 보호하며 증기 공격을 퍼붓는 마수였다.
주변이 녹색 증기로 뿌옇게 물들었다.
“고지능은 아닌 것 같네요.”
“이동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안 하는 건지.”
증기가 가라앉았다. 반투명해진 마수가 목소리를 짜냈다.
-살려줘. 항복할게. 뭐든 할게.
밀레나는 단검을 왼손에 쥔 채 마수에게 다가갔다. 공격 의지를 상실한 마수는 온순한 동물처럼 굴었다. 몸을 까뒤집고 배를 보일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게웰은 어디 있지?”
-몰라. 나도 속았어. 여기에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했어.
“너는 게웰의 말을 믿고 따른 거고?”
-성공하면 여기가 내 땅이 된다고 했어. 난 살 곳을 원해.
인간이나 마수나, 땅따먹기에 목숨을 거는 건 똑같은 건가?
“게웰이 마수 전체를 지휘하는 중이야?”
-그건 아니야. 그놈 말에 반기를 든 애들도 많아.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어. 인간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쪽, 협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쪽.
“게웰은 어느 쪽이었지?”
-믿을 수 없으니 싸워야 한다는 쪽. 너희를 한 번 믿었던 대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
믿음의 대가.
밀레나는 눈을 찌푸렸다.
“우리를 믿었다고?”
-게웰이 그랬어! 너희에게 대화를 신청했다고.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영토만 내주면 인간과 상충하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너흰…….
밀레나는 고개를 틀었다. 마수의 눈동자도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마나 밀도가 변하고 있다.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접근해 있던 분대원들도 몸을 피했다.
정확히 3초 후.
파지지직!
백색 섬광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아파! 아파아아!
순백의 마전기에 노출된 마수는 온몸이 오그라들며 역한 냄새를 피워냈다.
장작에 오른 고기처럼 지글지글 끓으며 뒤틀리더니 이내 탁한 회색을 띠며 움직임을 멈췄다.
밀레나는 코밑에 손을 대며 좌측을 바라봤다.
쿵, 쿵, 쿵.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청백색 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병마법식 전용 매개체, 인지의 창을 앞세운 오라클 소속 거병들.
묵빛으로 물든 창끝에 방출되지 못한 마나가 맴돌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들이.”
라틀이 성질을 내며 멈춰선 거병을 바라봤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마법에 휩쓸렸을 것이다. 마수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몰랐을까?
아니.
저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마나 밀도를 감각해 마법을 분사하는 거병이 신체술을 사용 중인 인간을 감지 못했을 리 없다.
알면서도 쓴 것이다.
-작전구역 내에 타 부대가 있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선두에 선 거병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틀 하사가 앞으로 나섰다.
“뻔뻔하게 위에서 떠들지 말고, 체임버 뚜껑이라도 열고 말하쇼! 인간이 정도라는 게 있지, 작전 중인 거 뻔히 알면서 마법을 처 갈겨?”
-우린 사전에 보고 받은 게 없습니다. 개별 행동한 그쪽 소대의 잘못 아닙니까? 타리움의 보고 체계에는 문제가 없었고, 그쪽도 피해 본 건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죠.
씩씩대던 라틀이 얼굴을 굳히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꼭지가 돌았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내버려 두면 거병 밑으로 뛰어들어 에너지 탱크 덮개를 열고 배터리의 마전기를 역류시킬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밀레나는 손을 들어 라틀 앞을 막았다.
“작정하고 죽이려고 한 건 아니니까 여기까지 하죠. 저번에 우리한테 한 방 먹어서 열이 잔뜩 받은 거 같으니.”
경고 가득한 위협 사격이었다.
작정하고 노렸다면 분대원들은 공격에 휘말렸을 것이다.
인간을 향해 마법을 분사한 것에서 이미 제정신이 아니지만, 저들과 드잡이할 필요는 없었다.
위험지역에 사전 보고 없이 들어온 건 사실이니까.
상식을 배제하고 딱딱한 야전 규범만으로 상황을 정리하면 군법회의에서도 저들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애초에 오라클 소대에게 잘못을 묻지도 않겠지만.
-주……죽고 싶지…… 않아.
오그라든 마수가 떠듬떠듬 말했다.
거병들이 특수케이지를 들고 마수 옆에 섰다. 바닥에 눌어붙은 마수를 떼어내 케이지 안으로 옮겼다.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잘 해결됐군요. 협조해줘서 고맙습니다. 독립소대 여러분.
들으나 마나 한 겉치레를 남긴 거병들이 몸을 돌렸다. 뒤이어 나타난 보병대가 주변을 조사하며 샘플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타리움의 입김이 나날이 세지네요. 이러다 옛날처럼 제국이 들어서겠어요.”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죠.”
다섯 개의 도시가 연합하여 탄생한 통치기관 타리움. 시대가 원한 정치연합체라고는 하지만 손에 쥔 권력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타리움의 핵심이 된 둔의 삼중회. 군부, 학회, 상인연합회의 수장들은 타리움 내에서도 강력한 발언권을 가져 사실상 타리움의 주인이라고 봐야 했다.
“우리 쪽에도 압박이 들어오고 있어요. 독립소대들 전부 타리움 산하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해 봐야겠죠. 지원이 끊기면 우리도 손쓸 방법이 없으니까요.”
“설마 끊기려고요. 타리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리엘 시장과 꽤 친분이 있으시잖아요.”
“그 언니, 욕심이 많거든요. 무엇보다 사적 친분보다 도시 이익이 더 크면 무얼 선택해야 할지, 너무 뻔하잖아요?”
“타리움의 지시를 받는 건 영 못마땅한데.”
“아직은 괜찮으니까 좀 더 지켜보죠. 용병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으니까.”
밀레나는 멀어져 가는 거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거병이 눈에 들어왔다.
라틀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학회에 있어야 할 분이 계속 최전선에 얼굴을 비치네요. 저러다 사고라면 나면 어쩌려고.”
“알아서 하겠죠.”
유단의 전용기, 체시를 눈여겨봤다.
저 먼 곳에서부터 시선이 느껴진다. 저쪽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 뭐냐, 은퇴하시게 되면 저희 잊지 마세요.”
라틀이 말했다.
“갑자기 은퇴요?”
“소문이 살살 도니까요. 학회장님과 은밀한 만남을…….”
밀레나는 살짝 미소를 띤 채 라틀을 바라봤다.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를 담아서.
라틀이 코끝을 매만지며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딴 헛소문을 대체 누가 흘렸을까요? 우리 상사님을 뭘로 보고.”
“제가 은퇴하길 원하세요?”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냥 해본 소립니다. 부대 내로 학회장님이 찾아온 경우도 더러 있고 해서.”
“개발 중인 거병 건으로 찾아온 거죠. 제 입으로 말하니까 좀 우습긴 하지만, 제 조종 실력이 보통은 아니잖아요?”
“그럼요. 우리 상사님이 거병에 올라타면 오라클도 상대가 안 되니까요. 아마도.”
체시가 멀어져 간다.
저 안에 타고 있을 인간은 무얼 꾸미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꾸미고 있는 게 있을까?
몇 년이 지났다.
그 몇 년이란 시간 동안 유단이 보여준 행보는 ‘성인’ 그 자체였다.
트집 잡을 게 하나도 없었다.
교수를 독살하고 권력을 쥔 건 올바른 정의를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는 구설수 하나 없이 인간 사회를 위해 종주 중이었다.
사람 한 명을 죽인 죄.
그리고 수십만을 살린 업적.
이젠 뭐가 뭔지, 유단을 어떤 심정으로 대해야 올바른 건지 알 수 없게 됐다.
“가시죠.”
라틀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