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7화
조용하다.
젖은 잎이 스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저 너머에 놈들이 있다.
“상사님.”
뒤따라온 라틀 하사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척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밀레나는 전방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목표물로 추정되는 개체를 발견했습니다.”
“보호 병력은요?”
“현재로써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유인책일 가능성이 있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놈들이 쉽게 약점을 노출할 리 없죠.”
“3, 4분대는 계속 대기. 2분대는 우측 능선으로 돌아가서 길목을 점거하세요.”
“알겠습니다.”
라틀 뒤에 있던 병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곳은요?”
“작전병이 바삐 오가고 있는데, 딱히 변한 건 없습니다.”
“누군가는 결국 진입해야 할 텐데.”
“저희가 나설까요?”
“위험하다는 거 알잖아요.”
“상사님께서 시선을 끌어준다면 해볼 만하죠.”
“상관을 고기 방패로 내세우려고요?”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밀레나는 작게 웃었다. 라틀이 자그마한 철제 병을 내밀었다.
“한 모금 하시죠.”
“군법이 무섭지도 않나 봐요.”
“얼어 죽을 날씨에 사흘이나 산속을 헤맸습니다. 이거 없으면 다들 못 버텼을 겁니다. 그리고 상사님은 군법 같은 거 신경 안 쓰시니 괜찮고요.”
밀레나는 병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마음만 받을게요. 이 정도 추위는 버틸 만해요.”
“저도 젊을 때 신체술을 제대로 연마했다면 상사님처럼 됐을까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마흔이시잖아요. 한창 뛸 나이죠.”
“끔찍한 소리 마십쇼.”
라틀이 병을 입에 물고 목을 꺾었다.
겨울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허벅지 밑을 쓸고 지나갔다. 라틀이 병을 군복 안에 감추며 말했다.
“이틀 더 있다가는 언 생선마냥 눈 뜬 채 쓰러지는 애들도 나올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단독작전을 수행해도 문제 될 건 없지만, 이번 건은 조심을 기해야 했다.
명령체계가 제각각인 소대들이 한 작전에 투입된 것도, 대기라면 치를 떨 사람들이 혹한 속에서도 침묵한 채 기다리는 것도 이번 작전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안둔이 생각나는군요.”
라틀이 말했다.
“안둔에 계셨나요?”
“예. 한창 젊을 때, 그러니까 상사님 정도 나이 때 그곳에 있었죠.”
“엘리트셨네요.”
“엘리트는요.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가는 병사들 사이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죠.”
“그곳도 여기만큼 추웠다죠?”
“사실 안둔과 비교하면 여긴 버틸 만하죠. 거긴 발밑으로 물이 흘렀거든요. 이상하죠? 콧물도 꽝꽝 얼어붙는 날씨인데 물이 흐르다니. 덕분에 군화는 얼고, 그 안에 있는 발가락도 같이 얼고. 전투에 죽어 나자빠지는 놈들보다 발가락 잘려 이탈한 놈들이 더 많았죠.”
으슬으슬하다며 다시금 병을 꺼내 드는 라틀이었다.
“정말 한 모금 안 하실 겁니까?”
밀레나는 으쓱거리며 병을 받아든 뒤 단숨에 술을 마셨다.
“자, 잠깐만요. 상사님.”
세 모금 꿀꺽하니 병이 텅 비었다.
“한 모금 마시랬지 누가…….”
“이제 필요 없으니 제가 대신 비웠어요.”
“그 말씀은…….”
“움직이죠.”
라틀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몸을 뺄 때였다. 뒤쪽에서 병사가 다가왔다. 옆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년병이 있었다.
체형만 봐도 알 수 있다.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다. 어디 소속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 오, 오라클 소대 소속 댈린 이, 입니다.”
턱이 얼었는지 제대로 발음조차 못 했다. 라틀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거 자기 몸 관리도 못 하는 애를 보냈네. 학회 분들도 참 대단해.”
“모, 몸 관리 하, 하 줄 아, 압니다.”
“예, 예, 예. 그러시겠죠. 그만 떨고 제대로 말해.”
“그, 그쪽이 소대 지휘관은 아니잖아요.”
“얼씨구.”
라틀이 고개를 틀어 밀레나를 바라봤다.
“상사님. 직접 상대하고 싶다니 나서시죠.”
밀레나는 추위에 덜덜 떠는 오라클 소속 댈린 앞에 섰다.
“밀레나 특임 상사시죠?”
“그래요. 확인했으면 전할 말 전하고 돌아가요. 우리 소대는 시체 치우는 곳이 아니니까.”
댈린이 발끈해서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눈에 힘을 주고 지그시 바라봤다.
떨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들던 댈린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내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12분 후 진입하면 됩니다.”
“명령권자가 누구인데 나한테 그런 식으로 전하는 거죠?”
“네, 네?”
이제 보니 전선에 막 배치된 신참을 보낸 것 같았다. 오라클 소대에 몸담았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겠지.
지난 2년간 그들이 세운 업적을 생각하면 콧대가 높아지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빛나는 공적을 찬양하며 드높여주는 건 민간인들이지, 최전선에서 구르는 군인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우리 초임병이 뭘 몰라서 실수했네. 이 친구야, 우리 소대는 군부 예하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학회 소속도 아니지. 기원을 따지면 용병에서 시작된 독립소대. 타리움에 협조할 뿐 명령을 무조건 따르진 않아.”
라틀이 끼어들며 말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던 댈린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얼탔다고는 하나 머리가 좋은 친구들이다. 신식마법을 익혔다고 해서 모두가 오라클에 소속되는 건 아니니까.
고된 선별과정을 통과해야지만 오라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실례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지. 그래서 작전권은 어디 발이지?”
“타리움입니다.”
“다른 소대도 다 따르겠네. 상사님, 이건 저희도 끼어들죠? 괜히 고기 방패 할 이유는 없잖아요?”
허허,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댈린의 등을 툭툭 치는 라틀이었다. 댈린이 눈치를 살피다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내버려 두시지 그랬어요. 어디까지 하나 구경하려고 했는데.”
“상사님이 애 잡을 기세라 얼른 끼어들었죠.”
“제가 또 뭘 잡는다고.”
“막 전선에 배치된 애들이나 상사님하고 눈씨름 하지, 며칠 구르고 소문 듣기 시작하면 다들 앞에서 설설 기잖아요. 자식 생각도 나고 해서 제가 그놈 살려줬죠.”
“앞으론 저 말고 하사님이 상급자 하세요.”
“전 고기 방패에 소질 없어요. 우리 상사님 뒤만 잘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8분.
“함정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깊게 들어가진 마요. 다른 소대와 대열 유지하며 전진하고, 뭔 일 생기면 일단 몸 빼고요. 우리가 완충재 역할 할 필요 없어요.”
“그런 건 알려주지 않아도 잘하죠. 누가 가르쳤는데.”
뒤쪽에 있는 소대원들이 눈을 씰룩이며 웃었다.
“나왔어.”
바람과 함께 샬롯이 내려왔다. 주변에 내려앉은 눈이 한순간 안개처럼 일었다가 흩어졌다.
“바람이 접근하는 걸 거부했어. 단순한 더미는 아닌 것 같아.”
“정령이 기피할 정도면 뭔가 있긴 하네.”
“정말 ‘게웰’일까?”
“들춰봐야 알겠지.”
마수 게웰.
마수와의 전쟁이 장기화된 이유.
전쟁 초기에는 섬멸을 목적으로 했다면, 지금은 게웰 토벌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마수들의 두뇌.
군부에게 참패를 안겨준 안그라스 평야전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수였으나, 밀레나는 그 마수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서쪽의 불청객.
엔엔의 말은 옳았다.
놈은 살아 있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눈이 멀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거병을 이끌고 대열을 이탈해 전진하고 있었다.
샬롯이 막지 않았다면 평야를 가로질러 수천의 마수가 득실거리는 숲속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밀레나는 어둠에 잠긴 숲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저 안에 숨어 있는 게 게웰이길.
놈의 비명을 들으며 몸체를 토막 내야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아니, 풀릴 리 없나.
“언니.”
밀레나는 웃음을 거뒀다. 흥분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적인 복수심보단 소대의 안전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저 안에 있는 게 정말 게월이라면…….
“혼자 갈 생각 마. 나도 그놈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샬롯의 얼굴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였을까.
앳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슬슬 준비하시죠.”
라틀이 소대원에게 신호를 줬다.
시간이 됐다.
좌측 능선에서 불이 번쩍였다.
타리움의 자랑, 오라클 소대가 진군을 시작한 것이리라.
* * *
-쳇바퀴에서 나뒹굴어라!
거병이 든 수레바퀴에서 푸른 불꽃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불꽃이 흐느적거리며 앞으로 기어갔다.
캬아악!
작은 마수들이 불꽃을 피해 도망쳤으나 속도가 붙은 푸른 불꽃은 집요하게 마수를 따라잡아 집어삼켰다.
“거참 화려하네요.”
라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으니 좋죠. 게다가 화려하게 해준 덕에 우리도 안전해지고.”
빛을 발산하는 마법을 펑펑 터트리고 있으니 마수들도 눈이 뒤집혀 오라클 소대로 뛰어갔다.
거병 앞으로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지상의 마법사들이 각자의 마법을 펼쳤다.
호흡을 맞춰 상충하지 않는 마법을 연이어 쏟아냈다.
겹겹이 쌓이는 마법에 성난 마수들은 짖어댈 뿐 접근하지 못했다.
“쟤네들도 많이 발전했네요.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라틀의 말대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유단이 선보인 ‘거병마법식’이 보편화되기까지, 무려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삐걱거릴 때가 있지만 아군끼리 폭사하는 일은 아예 사라졌다.
“이쪽 고개까지 진입하려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먼저 진입하죠. 4분대는 이곳에 대기시키고요.”
“신병 애들도 견학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에 있는 게 정말 게웰이라면 우리 발목만 잡게 돼요.”
“것도 그렇네요. 견학은 다음에 시키죠.”
이번 작전에 거병은 대동하지 않았다. 장애물을 밀면서 전진하는 오라클 소대와 달리 일반 거병은 산지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본대에서 일제히 매들이 날아올랐다. 랍파들이 길 안내를 시작한 것이다.
에단도 저쪽에 있으려나?
소대를 이끌고 전진했다.
본대에서 발광탄을 아낌없이 발사 중이라 숲이 대낮처럼 훤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앞에서 소대를 끌던 샬롯이 손을 들어 올렸다. 바람이 무언가 발견한 것이다.
“저거야.”
샬롯이 가리킨 곳에 검은 웅덩이가 있었다. 호흡하듯 위아래로 출렁이던 웅덩이가 이내 부풀어 올랐다.
게웰인가?
형태는 비슷해 보였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장 달려들라고 소리치는 감정을 억제하며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게웰은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마수를 대동하며 이동했다.
“주변에 균열은 없어. 저번처럼 매복은 아닐 거야.”
샬롯이 말했다.
“한 마리라면 해볼 만한데요.”
라틀이 검을 뽑아 들었다. 뭉툭한 검이지만 마전기가 감도는 순간 마수의 외피 따윈 한순간에 짓이겨 버릴 것이다.
결정해야 했다.
놈을 칠 것인가.
아니면 본대가 올 때까지 계속 관찰할 것인가.
그때였다.
-게웰! 어디 있어! 약속이 다르잖아! 인간이 너무 많아. 이건 아니라고! 이건 아니야! 난 인간이 무섭다고! 어서 우릴 이끌어줘! 게웰!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마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