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아침에 줄을 깨우는 걸 가장 좋아해요.
마운의 목소리가 대기 속으로 퍼지고 이내 잔향마저 사라졌을 때, 가하란은 슬쩍 로키를 바라봤다.
-도움이 됐나요?
마운이 말했다.
“어, 뭐,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대답하며 다시금 로키를 바라봤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일단 쉬고 있을래?”
-버리는 거 아니죠?
“나중에 다시 부를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점멸하던 보라색 점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재미난 친구네.”
-뭐라고 했지? 청각 영역을 닫고 있어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다 듣고 있었으면서. 그나저나 다들 개성이 뚜렷하네.”
-저 아이를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모자라지는 않지만 성격이 약간 엇나가 버렸어. 주입된 자료를 바탕으로 극단적인 상황만 시뮬레이션하더니 저렇게 됐지. 장담컨대 마운보다 근심이 많은 개체는 없을 거다. 세상 모든 고민은 혼자 하고 있지.
자존심 강한 로키가 ‘모자라지 않다’고 표현할 정도면 마운의 능력은 뛰어날 것이다.
하긴, 하늘석 시스템에 접근할 정도면 뛰어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많은 걸 얻었지만 정작 중요한 건 손에 넣지 못한 거 같은데.
“고민해 봐야지. 좌표를 얻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원류를 찾아내야 해.”
-찾으면 돌아갈 건가?
“가야지. 만나야 할 사람이 거기에 있으니까.”
가하란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왜? 떠난다니까 섭섭해?”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곧바로 부정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머쓱해져서 올을 바라봤다.
“위상 균열 말인데…….”
말문을 열기 무섭게 몸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방이, 아니, 하늘석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평평했던 바닥이 비스듬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기울기가 점점 심해져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로키의 본체가 쿵쿵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져 벽에 처박혔다. 품 안에 숨어 있던 루루가 겁을 잔뜩 집어먹으며 목을 휘감았다.
“올!”
주르륵 미끄러지며 외쳤다.
점멸하던 세 개의 점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재차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선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로키가 먼저 굴러가고, 가하란도 뒤따라 미끄러졌다.
붙잡을 게 하나도 없는 공간.
선체가 요동칠 때마다 몸을 이리저리 굴려야 했다.
-저기.
마운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보라색 점도 눈앞을 날아다녔다.
-네가 뭔 짓 한 거냐?
로키가 외쳤다.
-내가 뭘 하겠어. 난 얌전히 있었어. 근데…… 날 감시하던 선생님의 눈이 사라졌어. 평소라면 이쪽으로 들어올 수 없었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해.
“마운! 올한테 말을 걸어봐. 하늘석이 흔들리고 있어.”
-네? 추락하는 건가요? 안 돼요! 안 돼!
소용돌이에 휩쓸린 먼지처럼 보라색 점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불안감이 증폭될 때였다.
“시스템을 복구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동이 멎고 하늘석도 평형을 되찾았다.
“올,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에너지 고갈로 최중요 장치를 제외한 모든 기관이 셧다운됐어요. 임시 복구 후 바로 돌아온 거고요.”
이유 없이 문제가 생겼을 리 없다.
“위상 균열 때문이야?”
“정확한 원인은 좀 더 분석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비트와 마나가 제 예상보다 더 어그러졌어요. 하마터면 부유 기관이 멈출 뻔했고요.”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선체가 흔들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상으로 추락할 뻔했다는 건가?
“하늘석 상태는 어때?”
“확인 중이에요.”
세 개의 점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선체 외부에 있는 전송탑을 보셨죠?”
“마나가 회오리치던 탑 말이지?”
“13번 탑에 문제가 생겼어요. 자가 수복 기기가 작동해야 하는데, 조금 전 오류로 응답이 끊겼어요.”
눈앞에 그림이 생겨났다.
보자마자 하늘석의 평면도라는 걸 깨달았다.
“이쪽은 조감도예요.”
평면도 아래 사선으로 내려다본 하늘석 사진이 생겨났다.
“여기가 13번 탑이고요.”
탑으로 향하는 선이 그어졌다.
“예비 동력이 바닥을 드러냈어요. 설계상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하더라고.”
가하란은 목에 매달린 루루를 떼어내 로키 옆에 뒀다.
“수리를 서둘러야겠지?”
“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로키, 루루 좀 데리고 있어.”
-……내 지식이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어쩔 수 없군.
기계 안구에 연결된 커넥터를 이용해 루루를 살며시 감싸는 로키였다.
방에서 벗어나 긴 복도를 뛰었다.
앞서서 날아가는 세 개의 점을 향해 외쳤다.
“내가 선체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제가 옆에서 보좌할게요. 거병을 제작한 실력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착안을 열었을 때처럼 지식을 내 머릿속에 전해줄 수 없어? 그게 나을 거 같은데.”
“이미 비트를 통해 정보가 옮겨진 상태예요. 그럼에도 떠오르지 않는 건 가하란을 보호하기 위함이죠.”
올이 했던 비유가 떠올랐다.
작은 양동이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전부 받아낼 수 없다.
동굴을 벗어나 숲을 가로질렀다.
새의 환상체가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하늘 아래, 전송탑이 있었다.
모노클을 쓰고 전송탑을 확인했다.
“마나가 모여들지 않아.”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어요.”
다가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전송탑 앞에 섰다. 지면에 박힌 부분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3번 지지대 안쪽에 회로기판이 들어 있어요.”
덮개를 열고 안쪽을 살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엘리멘트 패널이 노출됐다.
“물리적으로 손상된 거라면 교체 부품이 필요해.”
감각기를 손에 꼈다. 시그니처를 불러와 마나 회로를 공중에 띄웠다.
마력선 짜맞춤에 익숙해진 눈으로도 감별하기 쉽지 않은 회로였다.
점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회로 안에 복수의 층으로 이뤄진 회로가 집약돼 있었다.
회로 도면이 없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A3 레이어 10번을 확인해 주세요.”
“A3이라면…….”
올의 설명을 들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세 개의 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줬다.
회로를 파고들수록 머릿속에서 파편화된 단서들이 떠올랐다. 난생처음 가보는 길인데 마치 이전에 와본 것 같은 기이한 기시감이 든다.
“습득하고 있어요. 어지럼증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대비하세요.”
“그런 건 익숙해.”
착안을 연 채 회로에 집중했다.
다중 겹침으로 구성된 회로 안을 살피며 마나 흐름이 막힌 곳을 찾을 때였다.
“여긴 거 같은데?”
가하란은 왼손을 비틀었다. 회로가 확대됐다. 긴밀하게 연결된 하부 회로와 달리, 지금 확대한 곳은 상하 레이어와 분리돼 있었다.
“잘하셨어요. 단절 부위에요.”
“회로 도면을 보여줘. 수복해 볼게.”
점 세 개가 길게 늘어지더니 회로 도면으로 변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 구조였다.
양손 손가락을 모두 펼친 채 마력선을 유도했다. 청사진이 존재하니 남은 건 어긋나지 않게 회로를 연결하면 된다.
단순 반복 작업이지만, 워낙 촘촘한 회로기에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잇고 자르고 확인하고.
“18번 단자 신호는 어때?”
“전달 속도가 정상 범주에 들어왔어요.”
시린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물러섰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다른 회로에서 문제를 찾지 못했으니, 이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패널을 교체해야 한다.
“여분의 패널이 있어?”
“재고가 몇 개 없어요. 수복 기기가 처리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거든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고장 날 리 없는 기체니, 이해는 되지만.”
덮개를 닫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가동합니다.”
대기 중에 흩뿌려졌던 마나가 서서히 전송탑으로 몰려들었다. 특정대역의 마나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고 지하로 빨려 들어갔다.
“된 거 같은데?”
가하란은 모노클을 벗었다.
“안정화까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네, 수리됐어요.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어.”
가하란은 주변을 돌아봤다. 가동 중인 다른 전송탑이 눈에 들어왔다.
“위상 균열을 함부로 열 수 없겠네.”
“더 살펴봐야 하지만, 만일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위상 균열 생성은 두 번이 한계일 겁니다.”
“두 번.”
수백, 아니, 어쩌면 수만 개 존재할지도 모르는 위상 속에서 단 두 번의 기회로 원류를 찾아내야 한다.
가능할까?
“일단 지상으로 돌아가야겠어. 카트시를 데려와 볼게. 혹시 모르니까.”
“알겠어요.”
“근데…… 어떻게 내려가?”
“당연히 하늘석을 내리면 되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릴 필요는 없었다.
“하늘석에 오를 때 공간이동이 이뤄졌어. 위상 균열을 기반으로 한 이동 같았는데.”
“맞아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격납고 안쪽에 도착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모든 게 엉망이라 좌표가 하늘로 옮겨졌죠. 근데 이마저도 고정된 건 아니에요.”
“고정된 게 아니라면…….”
“물질 사이에 겹치는 일은 없겠지만, 더 높은 하늘에 옮겨질 수도 있어요.”
하늘석에 도착했던 순간을 되짚어봤다. 4m 상공에서 곤두박질쳤다. 4m도 대비하지 않으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만한 높이인데, 그보다 높아진다?
“그래도 하늘석 밑으로 옮겨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웃을 수 없는 농담이야.”
가하란은 실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나저나 격납고라.”
“이제는 아시겠지만, 이 아래 잠들어 있는 걸 꺼내는 건 재고해 주세요.”
“어렴풋이 떠올랐을 뿐이야. 강철 거인이 이 아래 누워 있다는 게.”
카트시.
사나운 켈트의 머리.
모든 거병의 시초가 발밑에 누워 있었다.
“근데 내가 원하면 깨울 수 있는 거야?”
“아니요. 그래서 재고해 달라는 거예요. 착안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비트를 오가는 모든 정보를 이해한 뒤에도 언니의 몸을 깨우는 건 위험해요. 저건…… 신께서 만들어놓은 일종의 보험이니까요.”
“계 밖에서 오는 자들을 대비하기 위한?”
“네.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제가 눈을 뜨고 ‘올씽아이’로서 작동을 시작한 순간, 언니는 몸에서 벗어났으니까요.”
부모가 자식들의 세계를 위해 남겨둔 장치. 멋대로 손대서는 안 될 것이다.
호기심이 치밀어 오지만 억누르기로 했다.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겠네.”
“맞아요. 보험은 쓰이지 않을 때가 가장 좋아요. 설령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고 해도.”
“막대한 비용?”
올이 전송탑을 가리켰다.
“부유 기관을 위한 장치지만, 동시에 언니의 몸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기도 해요. 자그마한 인간도 살아가기 위해서 음식을 섭취하잖아요? 인간이 그럴진대, 언니의 몸은 어떻겠어요?”
“기계니까 멈춘 상태라면 에너지 공급이 필요 없지 않아?”
“대기 상태를 항상 유지해야 해요. 완전히 기능을 정지시키면, 재기동까지…… 대략 150년은 걸릴걸요?”
“아찔한 시간이네.”
전송탑이 빨아들이는 마나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형 배터리도 전송탑 옆에 던지면 순식간에 차올라 터져버릴 것이다.
막대한 마나가 고작 ‘대기 상태’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니.
“카트시한테 잘 보여야겠네.”
가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원류. 찾아낼 수 있을까?”
“찾아내길 빌게요.”
“빈다는 표현이 재미있네. 누구한테 빌어야 할까?”
“놀면서 구경 중인 전 사용자한테 빌어 봐요. 지금도 우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은퇴하신 분에게 그럴 순 없지.”
가하란은 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걸음을 뗐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능성 있는 거는 다 찾아보자.”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