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묻는 건데, 바로 뛰어들 생각은 없겠죠?”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워?”
“종종 위험한 결단을 했으니까요. 기껏 착안을 연 현 사용자가 어처구니없이 사망한다면 저 역시 책임감을 느낄 거예요.”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누구보다 살고 싶은 게 나니까.”
“그렇다면…….”
눈앞에 그어진 주황색 선, 비트가 빛을 뿜어냈다.
“비트는 마나와 어떤 관계야?”
가하란은 비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둘 다 매개체이고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죠. 단, 마나는 계에 종속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자원이고, 비트는 소수를 위한 자원이죠. 사실 소수라고 표현했지만 온전히 사용했던 건 신뿐이었어요.”
손가락을 내밀어 비트를 툭 건드렸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통증이 올라왔다.
“착안을 얻어도 아픈 건 변함없네.”
“불의 성질을 이해했다고 해서 불구덩이에 맨손을 집어넣으면 다치겠죠?”
“……그렇지.”
“모든 정보는 에너지의 다른 형태예요. 비트는 막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요. 가하란은 그나마 익숙해졌고, 어릴 때부터 단련돼 쓰라린 정도에서 그친 거예요.”
“다른 사람이 실수로 비트를 만지게 되면…….”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비를 작은 양동이로 받을 수 있을까요? 못 받죠? 잉여 정보가 접촉자의 모든 저장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고, 이내 터져 버리겠죠.”
“터진다고?”
“비유가 아니에요. 실제로 일어날 일이죠.”
슬쩍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너 터질 뻔했대.”
-방금 한 말은 이해했으나 그 외의 말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발치에 놓인 로키가 안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널 이해시키려면 꽤 오랫동안 얘기해야 해. 그러니 지금은 참아. 이따가 설명해줄 테니까.”
1분 정도 기다렸을 때였다.
“위상 균열을 생성합니다.”
비트가 가로지른 공간에 초소형 번개가 내리쳤다. 마전기 방출 현상과 비슷해 보였다. 소리 없이 공간을 휘저은 번개 사이로 반짝이는 경계면이 나타났다.
-저게 뭐지?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문.”
-놀랍군. 들어갈 수 있는 건가?
“지금부터 그걸 실험할 거야.”
가하란은 로키를 번쩍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지?
“실험.”
-뭘?
“이 세계에 종속된 널 데리고 갈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알아볼 거야.”
-심히 불안한 말이군. 날 저 안으로 집어넣겠다는 뜻인가?
“걱정 마. 던지지는 않을 거야.”
가하란은 픽 웃으며 말했다.
“두려우면 그만두고.”
-그런 감정은 내 안에 없다.
“그렇다면 잠깐만 참아.”
본체를 든 손을 경계면 안으로 집어넣었다.
착안을 얻었다. 세계의 이면을 엿봤으니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본체를 든 손이 경계면을 통과한 순간, 로키의 본체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경계면 바깥쪽에 있는 안구가 좌우로 움직였다.
-없어지고 있다. 네 팔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내 몸은 흐릿해지는군.
“아무래도 널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것 같네.”
경계면 밖으로 손을 꺼내고 올에게 말했다. 균열을 닫아달라고.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사라져요. 연 균열을 억지로 닫는 법은 저도 몰라요.”
가하란은 경계면 안쪽을 바라봤다. 어둠 저편에 출구가 보였다. 들쥐 한 마리가 경계면 앞을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 몸을 들어 올렸다.
저쪽은 안전한 세계일까?
시각만으로는 정보 수집에 한계가 있었다.
“올, 저 너머의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있겠어?”
“안타깝게도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텅 비었다는 개념만 인식될 뿐.
가하란은 손가락을 들어 반대편에서 기웃거리는 들쥐를 가리켰다.
“저거 나만 보이는 거야?”
-뭐가 있지?
“쥐 한 마리가 나랑 눈싸움 중이야.”
-내 시각 장치는 고장 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건너편 상황은 너만 볼 수 있는 것 같군.
경계면이 한층 더 빛나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뒤로 물러섰다. 부서진 유리처럼 반짝이던 경계면이 한순간 닫혀 버렸다.
“직접 가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건데.”
-너를 제외한 그 무엇도 저곳을 통과할 수 없는 건가?
“아마도.”
-하늘석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착안으로 바라봐도 정보화되지 않는 하늘석. 신의 작품이라면 경계면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 않을까?
본래 다른 위상을 오가기 위해 제작됐으니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생성할 수 있는 위상 균열의 크기는 제한돼 있어요.”
올이 말했다.
“설마 아까 그 크기가…….”
“네. 그 이상은 만들어 낼 수 없어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뿌리와 비트, 두 매개체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어요. 위상 균열의 크기를 더 키웠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요.”
올의 경고를 넘겨들어선 안 될 것이다.
“원류의 좌표를 안다면 위상 균열을 원류에 연결할 수 있는 거야?”
“확률이란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지금은 높은 확률로 연결할 수 있다고 대답할게요.”
“확정은 아니다.”
반대편으로 뛰어들었는데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라면 그대로 끝이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
“좌표를 얻을 방법이 없을까? 내가 얻은 지식도 돌아가야 쓸모가 있는데.”
“연결된 신호가 있다면 획득할 수 있어요.”
“신호?”
“네.”
“위상끼리 완전히 단절된 상태니까…….”
“얻을 수 없다는 거죠.”
“남은 건 도박뿐이네.”
가하란은 희미해진 비트를 보며 말했다.
“위상 균열을 다시 열어줄래?”
“지금은 불가능해요. 마나 보충이 필요해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까?”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략 일주일 후면 시행 가능해요.”
“일주일.”
가하란은 로키를 바라봤다. 위기를 감지했는지 재빨리 대꾸했다.
-날 재울 생각은 마라. 어차피 이동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난 위협이 되지 않아.
“우린 비즈니스 파트너잖아. 나는 제공할 게 많은데 넌…….”
-빌어먹을.
“입이 점점 험해져.”
-너한테 배운 거다.
“내가?”
-마수와 전투 중에 종종 내뱉곤 했다. 어감이 좋아서 나도 배웠지. 줄리어스는 이런 말을 쓰지 않았으니까.
미운 정이란 게 이리도 무섭다.
“단절시킬까요?”
올이 물었다.
“아니. 다양한 의견이 필요한 시점이니까 로키는 내버려 둬.”
“단순한 만큼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겠네요. 잘 부탁해, 내 먼 후손.”
-끔찍하군.
후손이란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마운. 줄이 만든 유사정령이 이곳에 있을 텐데.”
“네, 있어요. 놀랍게도 보안시스템 외곽에 기생 중이에요. 처리할 수 있는 애였지만, 노력이 가상해서 내버려 두고 있어요.”
“그 친구는 하늘석에 어떻게 온 거야? 보안시스템에 있다는 걸 보면 본체가 아닌 정신체만 옮겨진 거 같은데.”
“줄리어스가 만든 연결망. 약간이나마 비트에 간섭할 수 있는 그 체계를 이용해 하늘석으로 옮겨왔어요. 나타 왕국이 대폭발에 휩쓸린 날이었죠.”
“대폭발?”
“누군가가 뿌리에 손을 댔어요. 신은 그 현상을 관측하며 흐뭇해했죠. 의도에서 벗어나 개입한 아이들이 생겨났다면서.”
과거에도 뿌리를 이용한 사고가 있었구나. 융성했던 나타 왕조의 유산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은 건 ‘대폭발’이라 불린 사고 때문이겠지.
“마운과 얘기하고 싶은데.”
“데리고 올게요. 하지만 대화는 조금 어려울 거예요.”
-어렵긴 하지.
로키가 옆에서 대꾸했다.
“왜 어렵다는 건데?”
-만나면 알게 될 거다. 세상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사는 지독한 겁쟁이였으니까.
비트가 사라진 허공에 다시금 점 세 개가 찍혔다.
“데려왔어요.”
올이 말할 때마다 입에 해당하는 점이 좌우로 벌어졌다.
-제가요, 제가요 진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늘석에 올라오는 방법을 온 세상에 알리다니. 정말 미친 짓이죠. 하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올의 자아를 형상화한 세 개의 점 옆에 보랏빛 점이 점멸했다. 저게 마운인가?
-저기요?
첫 대면의 인상만으로도 왜 겁쟁이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저기요? 선생님? 제가 비위를 상하게 했나요? 입 다물고 있을까요? 네?
“저기, 마운.”
-누구시죠? 이 목소리는 대체 누구죠? 절 구하러 오신 분인가요? 아니면 절 속이고 있는 건가요? 그렇군요! 절 가지고 놀고 있는 거군요. 화가 났다면 사과할게요. 제발 절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로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비웃더니 한 마디 꺼냈다.
-여전하군, 마운.
-세상에! 이젠 로키의 목소리를 복사한 건가요? 제 내부를 전부 훔쳐보셨군요. 절 놀리는 건가요? 놀리는 건 좋은데 제발 절 없애지 말아 주세요. 전 그냥 이것저것 관찰하면서…….
-혼자 떠드는 버릇은 여전하네. 입 좀 다물고 말을 들어.
가하란은 올을 바라봤다.
“마운에게 눈을 달아줬으면 하는데.”
“시각을 공유할게요.”
보랏빛이 요란하게 깜빡이다가 로키 옆으로 갔다.
-감각 장치에 간섭에 조작된 풍경을 보여주는 건가요?
-아니. 난 실존하고 있다.
-정말 로키야?
-그래.
가하란은 둘의 재회를 가만히 지켜봤다. 마운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재빨리 설명하기 시작했다.
-체시가 일을 낼 줄 알았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어머니가 우릴 봉인한 건 올바른 판단이었어. 내버려 둔 결과 모든 게 없어졌으니까.
뿌리에 간섭한 자.
인간이 아닌 줄의 아이라는 대목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의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생명체’라고 여겼다. 올은 ‘지성체’라 했지만 지성을 가진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줄에 손에서 태어난 유사정령이 인간을 이용해 뿌리를 노출시켰다.
기계인형에 의해 인간 문명이 사라진 것이다.
-나만 살아남았어. 다들 시뻘건 용암 밑으로 사라졌어. 연결망은 해체됐고 난 여기서 떠날 수 없게 됐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내가 하늘을 떠돌면서 너희를 그리워한 줄…….
-신파극은 적당히 하고. 그 외 뭔가 아는 게 있어?
-없는데.
로키의 기계 안구가 가하란을 쳐다봤다.
-이 녀석 다시 잠재워도 된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니까.
“친구한테 너무 무자비하네.”
-저 녀석을 깨워두면 계속 무섭다고 칭얼거릴 거다. 연결망 내에서도 저 녀석이 끼어들면 우린 항상 한쪽 귀를 닫아뒀지.
보라색 점이 로키 주변을 빙빙 돌았다.
-나쁜 놈! 나쁜 놈!
-시끄러워.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방법이 있어.
-방법?
-보면 알아. 줄 외에 네가 인간한테 설명하는 거 처음 봐. 게다가 명령조로 말했지만 인간은 날 재우지 않았지. 너, 저 인간보다 명령단계가 아래인 거지?
-…….
-이것 봐! 이것 봐! 저기, 안녕하세요.
보라색 점이 눈앞으로 날아왔다.
-전 마운이에요. 저 나쁜 놈의 비밀 하나를 말씀드릴 테니, 절 보호해 주시겠어요? 어둠 속에 갇히는 건 정말 싫어요.
-너!
상황이 웃기게 돌아간다.
가하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 말해봐. 양질의 정보라면 널 보호해줄게.”
로키가 뭐라 떠들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올이 간섭한 것 같았다.
-로키는요! 로키는요!
귀를 연 채 마운의 말을 들었다.
-아침에 줄을 깨우는 걸 가장 좋아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