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84화 (384/558)

제384화

선별하거나 선택한 건 아니란 건가.

“누구에게나 자물쇠를 남겼어요. 인간종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모든 종이 자물쇠를 갖고 있죠.”

“가능성을 말하는 거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자물쇠만 남긴 건 아니에요. 열쇠도 같이 줬죠. 하지만 열 수 있는 개체는 극소수였겠죠.”

“열면 모두가 착안을 얻게 되는 거고?”

“드러나는 양상이 착안이 될 수도 있고, 강력한 무력이 될 수도 있으며, 그 외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죠.”

“신이 모두에게 남긴 선물인 거네.”

“자식을 빈손으로 강가에 내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모든 뒷바라지를 해줄 수도 없고. 그러니 일깨운 아이들에게 뒷일을 맡긴 거죠. 가하란도 그중 하나고요. ‘순수한 자아’는 그런 거예요.”

“순수한 자아?”

“이건 제가 설명하지 않을게요. 제 역할이 아니니까.”

가하란은 팔짱을 꼈다.

대화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창조부터 시작하여 신의 부재까지.

방대한 정보에 괜히 헛웃음이 나온다.

“향후 일어날 일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신의 도움도 구할 수 없다는 거네.”

“그렇죠. 자유의지를 얻은 지성체들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해결해야 해요.”

“모든 지성체. 혹시 마수를 토벌하면 생태계에 무슨 문제가 생길까?”

“예측할 수 없어요. 전 사용자가 떠나고 전달체가 통제를 벗어난 순간부터 모든 건 확률로 변했으니까요.”

“전달체?”

“뿌리라고 알고 있는 게 전달체에요.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자면, 이 세계를 구성했던 거대한 회로. 지표면 아래 그려진 위대한 청사진이 지금은 의지를 잃고 단순한 에너지원이 됐죠.”

가하란은 시간을 수없이 반복해온 남자를 떠올렸다.

“그라운드 제로가 개인이 일으킨 사고라는 소문이 있었어. 국경지대 볼로스에서 뿌리를 휘감은 거대한 팔이 나타났다는 얘기도 있었고. 아까 네가 보여줬던 그 남자, 시간 위를 걷던 그 남자가 모든 일의 원흉이겠지?”

“맞아요.”

“그자의 이름이 길리우드고?”

“네.”

“낭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어.”

신의 섭리를 거스른 인간.

가하란은 의족을 매만졌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가 일으킨 재앙 때문에 세상은 슬픔에 잠겼으나, 그로 인해 인간은 자유에 한 걸음 다가섰으니까.

필요악이라는 걸까.

이마저도 오만한 생각인 걸까.

가하란은 지상을 내려다봤다.

빼곡한 숲 아래, 용암이 들끓고 있다는 지하 아래, 인류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그곳에 뿌리가 있다.

인간은, 아니, 지상의 모든 지성체는 뿌리에 손댈 수 없다.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마나를 이용할 뿐, 뿌리 본체에는 절대 간섭할 수 없다.

접근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불변의 진리였다.

마나를 탐구하는 자들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불변은 깨졌고 진리는 왜곡됐다.

“누군가가 또다시 뿌리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

“지상의 지성체들은 이제 신의 손을 완전히 떠났어요. 그들의 향상심은 신이 품었던 것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성장하겠죠.”

“도약을 위해 다시금 뿌리를 이용할 수도 있다. 무서운 일이네.”

‘협회’는 계 바깥쪽 문제를 해결하기 설립됐다. 그러니 계 내부의 문제는 계의 구성원들이 해결해야 할 것이다.

“복잡하죠?”

올이 웃음기 담긴 목소리를 꺼냈다.

“핑핑 돌아서 어지러울 정도야.”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이해할 수도 없고요.”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소화해야지.”

목뒤를 주무르며 미소를 지었다.

범국가적인 문제는 혼자서 처리할 수도, 이 방에서 해결할 수도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 정도로 맥락만 파악한 후 훗날 기회가 되면 접근해 봐야 한다.

“올. 다른 것도 대답해 줄 수 있어?”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소문이 있어.”

“어떤 소문이요?”

“하늘석에는 용이 산다.”

“아, 그건 저도 들어봤어요.”

“그 소문은 사실이야? 정말 이곳에 드래곤이 있어?”

“종종 찾아오긴 했어요.”

“정말로?”

“네. 전 사용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죠.”

창조주와 창조물의 대화.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눴어?”

“다양한 얘기를 나눴죠. 잡담부터 계에 관한 내용까지. 용은 신의 의도에서 반걸음 벗어난 몇 안 되는 존재였거든요. 의견을 들어볼 가치가 있었겠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모든 걸 놓아버리기 전부터 세상은 삐걱거렸다고 했다. 창조주조차 파악하지 못한 오류가 조금씩 생겨났다고도 했고.

드래곤은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나기 전부터 운명에서 반걸음 벗어나 있었으리라.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종에게 자물쇠와 열쇠가 주어졌다’, 가하란은 올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용을 만날 수 있을까?”

“이쪽 세계, 가하란의 표현에 따르면 겹침 세계에서는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아요. 실물로 존재했다면 가장 먼저 이곳으로 날아왔을 테니까요.”

“아쉽네.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드릴까요?”

순간 혹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실물로 볼게.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화도 나눌 거고.”

“무뚝뚝한 분이라 말 거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한 번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지면 몇 년간 한마디도 안 할 때도 있어요.”

“며, 몇 년을?”

“그분한테 몇 년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니까요. 이 계가 신의 손에 의해 태동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가장 오래된 존재니까요.”

“가장 오래된 존재…….”

문득 안원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사슴님은 산카와 산페르를 향해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가장 오래된 형태’

“혹시 산페르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아쉽게도 그건 답변해드릴 수 없어요. 정보는 있지만 보안 레벨 때문에 제공해드릴 수 없어요.”

“보안 레벨은 어떻게 재설정할 수 있지? 내가 뭘 하면 될까?”

“가하란이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단호한 어투였다.

착안과 연관된 일일까, 아니면 특수한 물건이 필요한 걸까.

“맞다. 로키는 지금 어떤 상태야?”

“계속 자고 있어요. 의식 단절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죠.”

줄이 창조해낸 아이도 신의 제작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최초의 오토마타 역시 신이 만드신 거야?”

“네.”

“올, 너도 유사정령이라 봐야겠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카트시와 동시대에 만들어진 거야?”

“선후를 따지면 제가 늦게 제작됐죠.”

“신께서 카트시를 먼저, 그다음에 널 만들었구나.”

“아니요.”

“응?”

가하란은 멀거니 천장을 바라봤다. 방금 대화에서 잘못된 구석이 있었나?

“카트시가 먼저 만들어졌어.”

“맞아요.”

“그다음에 네가 제작됐어.”

“맞아요.”

“어?”

“말장난이란 건 재미있어요. 하지만 틀린 걸 맞았다고 할 수는 없겠죠?”

가하란은 잠깐 고민한 후 다시 말했다.

“신께서 카트시를 먼저 만들었어.”

“네.”

“신께서 그다음에 널 제작했어.”

“아니요.”

“넌 신의 작품이 아니구나.”

“정답!”

“그렇다면 널 만든 건…… 설마 카트시야?”

“맞아요. 전 언니가 만든 첫 작품이죠. 나름의 자부심도 있고요.”

언니라는 호칭은 그렇다 치고.

신이 만든 관측선 안에 카트시가 제작한 유사정령이 탑재돼 있다?

“최초의 오토마타. 고대 강철거인의 머리. 카트시는 나한테 말했어. ‘사나운 켈트’의 머리라고.”

산재된 정보들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가하란은 질문을 던졌다.

“이 배의 이름은 뭐지?”

“다변 위상 관측 중계 기기요.”

“아니, 정식 명 말고. 내가 뭘 묻는 건지 넌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눈앞에 점 세 개가 나타났다.

사람의 얼굴을 간소화시킨 듯한 모습. 눈에 해당하는 점 두 개가 부드럽게 휘며 눈웃음을 그려냈다.

“질문을 유도하는 건 선내 법칙에 어긋난 건 아니니, 전 잘못 없어요.”

점 세 개가 주황빛으로 반짝거렸다.

“이 배의 이름은 켈트. 사납지는 않지만, 화내면 조금 무서워지죠.”

가하란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투영되던 바깥 모습이 사라지고 회색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착안이 깨어났을 때 선내 정보가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천천히 번지고 있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이 아래에 보관된 건…….

“이제 아시겠죠? 보안 레벨을 재설정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카트시와 함께 여길 다시 찾아야겠네.”

“언니를 데려오면 기쁜 마음으로 반겨드릴게요. 제멋대로 집 나간 벌을 내리고 싶지만, 그것도 참고요.”

“제멋대로 집을 나가?”

“기억이 봉인됐다고는 하지만, 언니 성격은 그대로였겠죠. 하고 싶은 거 하고 마는 그 괴팍한 성격. 가하란도 알고 있죠?”

“하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정말 어이없지 않아요? 신의 산물이 제 발로 뛰쳐나가서 땅 밑을 굴러다니다니. 줄리어스란 인간이 그토록 좋았나 봐요.”

줄리어스란 이름이 나왔다.

“줄리어스도 착안을 열었던 걸까?”

“그랬을 거예요. 보는 형태는 달랐겠지만. 그녀가 만든 연결망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비트’에 간섭했으니까요.”

“비트?”

되묻는 순간 눈앞에 주황색 선이 생겨났다. 경계면을 잇던 선, 하늘로 뿌려지던 선, 카트시 본체에서 솟아나던 그 주황색 선.

“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메인 라인. 모든 것에 연결된 이 선을 기준 삼아 위상을 이동하고 다른 위상의 정보를 모아 전달하는 게 관측선의 업무였죠.”

“지금은 좌표를 알 수 없기에 이 선만으로는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했지?”

“네. 뭐, 따라가다 보면 다른 위상이 나오긴 하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원류에 도달할 수 없어요. 엇나간 위상에 산소가 전혀 없을 수도 있고, 생명이 생존할 수 없는 기온으로 변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환상체는 정말 얌전한 변화에 속하네.”

“말했잖아요. 운이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따라준 거라고.”

가하란은 카트시가 잠들어 있던 강철의 무덤을 떠올렸다.

“카트시를 찾긴 했는데, 이곳의 카트시는 깨어나지 않았어.”

“비트가 연결돼 있었나요?”

“아니. 주황색 선은 보지 못했어. 나타 왕조에 있었을 때는 보였는데.”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언니는 껍데기뿐이에요.”

“가져와도 보안 레벨 재설정은 불가능하겠네?”

“그렇죠. 껍데기를 언니라 인정할 수는 없으니.”

결국 또다시 이동해야 한다는 건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을 열 수 있을까?”

“착안이 열렸으니 관측선의 힘을 빌려 위상 균열을 생성할 수 있어요. 설마 지금 바로 가려고요?”

“아니.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아. 하지만 실험해 봐야 할 게 있어.”

로키를 깨워달라고 말했다. 복도 끝에 두고 온 본체가 어느새 발밑으로 옮겨져 있었다.

-어서 해!

깨어나자마자 로키가 외쳤다.

“일어났네.”

-왜 연결하지 않는 거지?

“했어. 그 뒤로 시간이 꽤 지났고.”

-거짓말하지 마라. 내 의식은 단절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연결이…….

로키가 말끝을 흐리며 기계 안구를 들어 올렸다. 주변을 빠르게 훑더니 낮아진 목소리를 꺼냈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그야 당신은 너무 단순하니까요.”

올이 말했다. 팅, 소리와 함께 기계 안구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심한 듯한 로키의 본체를 툭툭 쳤다.

“기운 내. 머나먼 조상 같은 분한테 휘둘린 거니까. 네가 모자란 건 아니야.”

-닥쳐!

“예민하긴. 그보다 해야 할 일이 있어.”

가하란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위상 균열을 열어달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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