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83화 (383/558)

제383화

“반복?”

겹침 세계의 환상체들을 말하는 걸까? 넉 달 주기로 반복되던 일상이 이제 끝났다는 건…….

“제가 말하는 반복과 가하란이 이해한 반복은 분명 다를 테죠.”

“다르다니? 이쪽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게 아니야?”

“여기도 반복하고 있죠. 하지만 이건 원류에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위상이에요. 전 사용자가 세운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 반복 같은 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죠.”

“원류라니?”

“창조주 손에 만들어진 세계. 하나뿐인 실질의 세계. 가하란이 본래 있던 곳이 원류에요.”

“여기는 지류 같은 곳인가? 강물에서 흘러나온 한 가닥 물줄기 같은.”

“음, 예전에는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정확한 설명이 불가능해요. 이유는 아시겠죠?”

“창조주가 손을 뗐으니까. 무엇이 원류이고 무엇이 지류인지, 이제는 구분할 수 없겠네.”

사방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찾아든 어둠에 눈이 적응을 못 했다.

“외부 투영을 잠시 멈췄어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하늘석 바깥 풍경 대신 회색 벽이 보였다.

“시간의 반복. 시간은 관념의 산물이고 실질적으로 계측할 수는 없어요. 창조주 역시 본래 세계에서 시간이란 관념을 빌려왔을 뿐이고요.”

“본래 세계? 혹시 ‘계’ 바깥을 말하는 거야?”

“맞아요. 이미 옛 황제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전 사용자는 이곳이 아닌 곳에서 왔어요. 그분은 본래 세계의 지식을 활용해 이곳을 창조했고 하나의 계로 다듬었죠.”

눈앞에 하얀 직선이 생겨났다.

직선에는 검은색 점이 한 뼘의 간격을 두고 두 개 찍혀 있었다.

“창조주가 어떤 자였는지, 계 바깥 세계는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어요.”

“보안 때문에?”

“아니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순 없으니까요. 저도 계 밖의 세상이 궁금해요.”

눈앞에 그어진 선이 빛을 냈다.

“말할 수 없는 ‘계’보다는 현 사용자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 말해보죠. 선 위에 두 점이 보이시죠?”

“보여.”

“하얀 선은 시간을 시각화한 거예요. 물론 이제 시간은 직선이 아니죠.”

일직선이었던 선이 방사형으로 뿌려지더니, 이내 넓은 구체가 돼 방 전체를 감쌌다.

가하란은 둥근 거미줄 속 중심에 서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동시에 존재해요. 사실 동시란 말도 정확하지는 않죠.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

일직선상에 놓여 있던 두 개의 검은 점이 수백, 수천 개가 돼 사방에 뿌려졌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행위로 이뤄진 동일한 사건이지만 고삐 풀린 시간의 굴레 안에서는 다양한 사건으로 존재해요.”

사방으로 퍼져 있던 시간의 구체가 작게 변해 눈앞으로 왔다. 구체 옆에 다시 직선 하나가 그어졌다.

직선은 왼쪽.

구체는 오른쪽.

“전 사용자가 운명이란 수단을 통해 세계를 손에 쥐고 있을 때, 시간은 직선의 형태였어요.”

“직선 위에 검은 점이 사건이랬지?”

가하란은 점멸하는 검은 점을 바라봤다.

“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류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했죠.”

직선 왼쪽 끝에서 사람의 형태를 한 빛이 오른쪽 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기처럼 네 발로 선 위를 기어가다가 첫 번째 검은 점 위에서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빛으로 된 사람은 점점 자라나 청년으로 이내 중년을 거쳐 노년에 접어들었다.

건장한 사내에서 허리가 휜 노인까지.

순리에 맞게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던 빛으로 된 인간이, 두 번째 검은 점 위에 섰다.

“반복.”

올의 목소리와 함께 두 번째 검은 점 위에 서 있던 노인이 다시 첫 번째 검은 점으로 이동했다.

가하란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건 이쪽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잖아. 내가 있던 곳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요? 아니요. 있었어요. 단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뿐. 아니죠! 기억을 못 한다는 표현은 잘못됐네요. 없었던 일이 되는 거니까 기억할 수 없죠. 가하란에게는 반복되는 매 순간이 첫 번째 인생이었을 거예요.”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를 바라봤다.

때론 누군가를 죽이고, 때론 돕고, 때론 비참하게 울다가, 때론 어깨동무하며 밝게 웃었다.

반복이었으나 선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매번 달랐다.

하지만 두 번째 점에 도착하는 순간, 그는 어김없이 첫 번째로 돌아갔다.

“이게 사실이라고?”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벌어졌던 일이에요.”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겠지?”

허구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경험해온 것들이 너무 많았다. 상식 저편의 일들이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니까.

“혹시 이 남자가 반복을 주도한 거야?”

“네. 개인이 벌인 일이에요.”

“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알고 있었죠.”

“근데 왜 막지 않은 거지?”

“막으려 했으나 막을 수 없었죠. 그리고 막고 싶지도 않았을 거예요.”

“막고 싶지 않았다고? 자신이 만든 세계가 엉망이 돼 가는데?”

선과 구체 위쪽에 주황색 빛이 점멸했다. 빛이 서서히 퍼지더니 이내 개의 형태를 갖춰갔다.

장난기 가득한 눈과 더운 듯 길게 내뺀 혀, 부들부들한 털까지.

툴이었다.

“기억하죠?”

“잊을 수 없지.”

손을 뻗었다. 빛이 뭉개지며 형태가 흐릿해졌다.

“강아지도 성격이 있죠. 취향도 있고요.”

“툴은 평상시에는 얌전했지만, 한 번 꽂히는 게 생기면 말을 해도 안 들었어.”

“말을 안 듣는 툴을 보며 이런 생각 안 했나요?”

“생각?”

“없애고 다른 개를 키워야겠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왜죠?”

“같이 커왔으니까. 가족이니까.”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답이 됐다.

“그분이 방치한 건 아니에요. 전 사용자도 노력했어요. 하지만 만들 때는 작은 세계였지만, 세계가 자생하기 시작하면서 간파하지 못한 영역이 생겨났죠.”

“창조주는 전지전능한 게 아니니까.”

“인간과 같죠. 인간도 여러 물건을 창조해요. 규율도 만들고요. 하지만 좋은 의도로 만든 그 모든 것들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요. 게다가……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불순물이 넘어오기 시작했고요.”

“외계.”

옛 황제가 말했다.

외계에서 올 수도 있는 위험을 대비해야 한다고.

“계 밖에서 온 것은 신도 손을 댈 수 없었어요. 격리하는 게 전부였죠.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허술해졌고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악과 신의 관계에 대해.

범인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신도 불완전했기에 나타난 일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점점 변해갔죠. 그분은 상실감과 두려움을 느꼈으나, 동시에 기뻐하기도 했어요.”

가하란은 툴에 빗대어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툴을 지켜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답답하기도 하고, 왜 말을 안 듣지 하며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훌쩍 큰 툴을 보며 마냥 기쁘지 않을까?

“자식을 자립시키는 게 부모의 마지막 책무라고, 신은 항상 말했어요. 언제까지 손을 붙잡고 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두 개의 검은 점 사이를 무수히 오가던 남자 앞에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검은 하얀 선을 가르고 지나갔다. 두 개의 검은 점이 추락하고, 선 위에 있던 남자도 같이 떨어졌다.

이윽고 직선으로 표현된 시간이 희미하게 변해 대기로 흩어졌다.

남은 건 구체형 시간이었다.

“하늘을 가르던 검…… 본 적이 있어.”

그라운드 제로가 벌어진 날.

대륙 위에 사는 온 생명체는 그 검을 봤을 것이다.

“운명의 실을 끊어낸 검. 모든 종이 자유의지를 획득하고 결정된 미래에서 벗어난 순간이죠. 동시에 전 사용자가 설계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죠.”

“거대한 검. 신이 마침내 결단을 내린 거야?”

“아니요.”

올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더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내가 있는 이 겹침 세계도…….”

“일종의 오류죠. 회로 꼬임.”

“수정할 수 있을까?”

“글쎄요. 저는 모르겠어요. 이건, 신의 손을 떠난 일이니까요. 구조의 법칙조차 이제는 통용되지 않아요. 얽힘 속에서 새로운 규칙이 제멋대로 탄생할 테고, 그걸 정립하여 수식화하는 건 이 밑에 사는 모든 이들의 숙제겠죠.”

회색 벽에 다시금 바깥세상이 투영됐다. 울창한 숲과 메마른 대지 너머로 끝없는 푸른 물결이 보였다.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저게 바다구나.”

“넓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하지만 저 넓은 바다조차 계의 시점에서 본다면 먼지 같겠죠.”

“바다가 먼지 같은데 인간은 어떨까.”

복잡한 머릿속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끝없는 푸르름은 평생 지켜봐도 질리지 않으리라.

“잠깐만.”

가하란은 지상을 내려다봤다.

균열이 없는 세계.

이곳은 그라운드 제로가 벌어지기 이전의 세상이다.

하지만 하늘석의 관리자인 올은 미래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

“나타 왕조에 있을 때도 하늘석 만큼은 변함이 없었어. 이쪽도 마찬가지고.”

“모든 위상에 동일하게 존재하니까요.”

“그렇다는 건 다른 세계에 가도 올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거야?”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아요. 이전 상태였다면 위상이 수백 수천 개가 존재한다고 한들, 저는 하나였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쪼개졌죠. 신의 창조물도 이제는 별수 없는 상태가 됐어요.”

“그라운드 제로를 기점으로 올도 여러 개체로 분열된 건가?”

“아마 그럴 거예요. 제가 인식하지 못한 곳에 또 다른 제가 있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단편적인 정보만 제공해도 또 다른 저는 어느 정도 유추해낼 수 있을 테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바닥에 앉으려는데, 불쑥 의자가 솟아났다.

“이건 어떻게 한 거야?”

“물질이 아닌 마나에요.”

“가시화된 마나는 극도로 위험해서…….”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의자를 만져봤다. 질감이 있었다. 쇠의 질감은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물먹은 솜?

“제어 관리를 정밀하게 한다면 위험하지 않아요. 물론 바깥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워요. 관측선 내부 환경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제어가 가능하기에 이뤄낼 수 있는 기술이죠.”

가시화된 마나를 다루는 것이 마법이 아닌 기술이라.

살며시 의자에 앉았다.

“가야 할 길이 머네. 공학도로서 말도 안 되는 걸 봐버렸어.”

“창조주가 설계한 함선이에요. 불가사의한 게 당연하겠죠.”

“함선. 하늘을 나는 배. 재미있는 표현이네.”

대화할수록 질문이 쌓여간다.

하지만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올. 원류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겠네요. 착안은 설계자의 눈이에요. 올바른 형태를 볼 수 있게 해주죠. 하지만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어떤 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하죠.”

“좌표. 원류의 좌표가 있으면 귀환 가능할까?”

“최소 조건이에요. 사실 오류로 뒤범벅이 된 세계를 오간다는 건 정신 나간 짓이에요. 그것도 인간의 몸으로. 하지만 가하란은 두 번이나 성공했죠.”

“운이 좋았던 걸까?”

“운이 따랐던 건 확실해요. 하지만 모든 걸 운으로 치부할 수는 없죠. 착안을 일깨웠다는 건 전 사용자가 남긴 자물쇠를 열었다는 거니까요. 자격이 있는 거예요.”

가하란은 왼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신은 왜 나한테 이걸 남긴 걸까?”

올이 작게 웃었다.

“아쉽게도 특별 대상이라 착안을 남긴 건 아니에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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