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화
-뭘 건드린 거지?
로키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가하란은 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망막을 관통했던 주황색 선이 사라지고 없었다. 밝게 빛나던 벽도 무채색으로 변했다.
“봤어?”
-보이는 건 없었다. 다만, 비정상적인 마나 운동은 확인했다. 다시 한번 묻지. 뭘 건드린 거지?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
‘착안’이라고 했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진 목소리.
누구도 알지 못했던 눈에 대해 목소리는 알고 있었다.
가하란은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루루가 꼬리를 바짝 만 채 매달려 있었다.
손을 들어 등을 쓰다듬어줬다. 떨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목소리가 들렸어.”
-내 감각 장치에는 변화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전해진 목소리였어.”
가하란이 벽으로 한 걸음 다가설 때였다.
“개방합니다.”
천장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기 무섭게 바닥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마름모꼴 타일이 살짝 들리더니, 천천히 밑으로 꺼졌다.
폭 3m 정도의 지하 입구가 드러났다.
-흥미롭군.
로키를 챙기고 완만한 경사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공기가 건조해졌다. 경사면을 따라 바닥에 도착한 순간 사방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살짝 찌푸리며 정면을 바라봤다.
긴 복도였다.
하늘석 중심을 관통하듯 길게 이어진 복도.
가하란은 우측에 있는 문을 바라봤다. 손잡이도 문틀도 없지만, 보는 순간 출입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왜일까?
“손상된 착안을 복구 중입니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한테 말을 거는 거 같은데.
로키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뭐지? 착안은 또 뭐고?
“등록되지 않은 개체입니다. 답변을 거부합니다.”
로키의 안구가 가하란을 향했다.
-웃지 말고 날 이해시켜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가하란은 미소를 지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모른다니까.”
-그렇다면 나 대신 네가 물어봐라. 너한테는 호의적인 것 같으니.
가하란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 질문에 답해줄 수 있어?”
“정식 등록을 마친다면 보안 레벨 0에 해당하는 모든 자료에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정보제공에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네 이름부터 알려줄래? 네가 하는 일도 말해주면 좋고.”
문으로 보이는 벽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이유 모를 확신이 든다. 막혀 있지만, 분명 문이다.
착안과 하늘석 내부의 목소리.
그리고 눈을 관통했던 주황색 선.
“이전 사용자가 붙인 이름은 ‘올’입니다. 정식명은 ‘다변 위상 관측 중계 기기’입니다.”
“올. 앞으로 이렇게 부르면 될까?”
“좋습니다.”
“올, 다변 위상 관측 중계 기기라는 게 정확히 뭔지 설명해 주겠어?”
벽에 손바닥을 대고 연신 움직일 때였다. 정전기가 일 듯 손끝에 미세한 자극이 왔다.
매끈했던 벽면에 실선이 생기며 안쪽으로 벽이 들어갔다. 문이 열린 것이다.
“대답에 앞서 사용자의 지적 능력을 측정해야 합니다.”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으려면 질문자의 수준을 알아야 한다.”
가하란은 칼리고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어린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말해줄 수 있을까?”
“1층에서 노는 아이와 2층에서 노는 아이가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기입니다.”
-원거리 통신.
로키가 짤막하게 말했다.
머니페니는 하늘석을 이용해 대화를 나눴던 걸까?
“1층과 2층이라는 게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 개념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이곳 세계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벽한 설명은 아닙니다. 먼 미래, 어쩌면 변화된 과거에 이해를 뛰어넘은 간섭이 생겼습니다.”
“미래에 벌어지는 일도 알 수 있어?”
“추측입니다. 사용자의 존재가 그걸 증명합니다. 또한 변화한 세계가 또 다른 증거입니다.”
올의 말을 들으며 방안을 살폈다.
침대와 책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침대 매트는 짚이나 솜, 말총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채워 넣었는지 탄성이 대단했다.
반듯하게 놓인 책상은 나무가 아닌 정교하게 마감 처리한 쇠로 돼 있었다. 단조로워 보이지만 들인 수고와 기술을 생각하면 최고급품이리라.
“여긴 누가 사용하는 방이지? 전 사용자?”
“그 방은 일반 투숙실입니다.”
밖으로 나와 옆방을 살폈다.
똑같은 구조의 방이었다. 가구 배치도 동일했다.
-사용한 흔적이 없어.
“이곳 사람들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해소되지 못한 물음들이 끝없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없습니다.”
“없어? 사라진 거야?”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없다니. 그러면 이 방들은…….”
“지금과 같은 변화를 상정해 제작해뒀을 뿐입니다.”
-저것의 말을 신용하는 건가?
로키가 말했다.
“너처럼 거짓말할 수도 있으니 의심해야 한다?”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대화를 들었는지 올이 끼어들었다.
“저는 무의미한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처리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내가 할법한 말이군.
“그쪽에 있는 단순한 연산 기기의 발성 장치를 잠시 봉인해 둘까요?”
-뭐?
로키의 기계 안구가 화가 났다는 듯이 천장을 바라봤다.
“그게 가능해?”
“가능합니다.”
“해봐.”
기계 안구가 홱 돌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성능은 확인해 봐야 하잖아?”
-인간 놈들의 발상…….
로키가 말 도중에 침묵했다. 치, 픽, 치이, 이상한 잡음이 감각 장치를 통해 흘러나왔다.
기계 안구가 좌우로 움직였다. 입을 틀어 막혀 답답해 보였다.
“올, 어떻게 한 거야?”
“기본 구조 회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핵심 코어에 직접적인 간섭은 어려우나, 발성 장치로 이어지는 에너지 간섭은 가능합니다.”
기계 안구가 벽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로키가 발작하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니까.
“원상태로 돌려줄래?”
“알겠습니다.”
올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만! 그만!
로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때? 단순한 연산 기기가 된 기분이.”
-당장 저것과 날 연결시켜라. 단숨에 제압해서 내 밑으로 기어 다니도록 만들 테니.
“되겠어? 안 될 것 같은데.”
천장에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커넥터가 슬그머니 눈앞으로 내려왔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한 기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거친 면이 있었다.
-껍데기 안에 있는 모든 걸 살펴봐주마.
“그게 가능할까요?”
가하란은 천장과 로키를 번갈아 보다가 커넥터를 붙잡았다.
“후회하지 마.”
-잔소리 말고 연결해라.
위험성이 다분한 제안이었다. 올이 로키를 제압하는 건 상관없는데, 그 반대가 되면 곤란해지니까.
하늘석의 제어권을 로키가 쥐면 대형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가하란, 절 믿으세요.”
“내 이름을 아네. 밖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들은 건가?”
“듣기도 했고, 전해 받기도 했으며, 엿보기도 했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믿음은 허술한 거야. 내가 널 믿어야 할까?”
“연결된 순간 믿음은 확신이 됐을 겁니다. 당신은 이제 착안을 알며 이해하기 시작했을 테니까요.”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커넥터를 쥔 손에 망설임은 없었다. 로키 본체에 커넥터를 연결했다.
-기다려라. 곧 내가…….
팅, 기계 안구가 축 처지며 바닥을 때렸다.
“내려놓으세요. 지금 제 안에서 잠들어 있으니까요.”
가하란은 배낭에 연결된 로키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없겠네?”
“네.”
“그걸 위한 도발이었구나.”
“꼭 필요한 건 아니었어요. 감각 장치에 간섭해 청각 회로에 잡음을 넣으면 됐으니까요. 하지만 따로 살펴보고 싶어서 부탁드렸죠.”
“부탁 맞아?”
“맞을걸요?”
장난치듯 주고받는 대화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가하란은 벽면을 쓸면서 안쪽으로 이동했다.
“처음 와본 곳이야. 본적도 없는 설계고. 근데 기시감처럼 떠올라.”
가하란은 발밑을 바라봤다. 이 아래쪽에도 공간이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착안에 담긴 자료가 조금씩 전해질 거예요. 개안을 시작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겠죠.”
“착안(着眼).”
“현상을 올바르게 보는 눈.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눈. 완벽한 관찰의 눈. 그 이름을 붙인 게 누구인지 이제는 알겠죠?”
가하란은 스며드는 지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오롯한 자.”
가하란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을 인지한 순간 문이 오른쪽으로 슬며시 열렸다. 안으로 들어갔다.
지상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외부의 정보를 받아 내부에 투영한 건가?”
“그런 방식이죠.”
“‘그분’은 이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보고 싶다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볼 수 있잖아.”
“처음에는 그랬죠. 하지만 모든 걸 설계했을 때 전 사용자는 이런 현상마저 예측했는지, 이 공간을 만들었어요.”
본다는 행위를 거쳐 사물을 인식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지만, 하늘석의 설계자한테는 불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는 만물을 뜻대로 다루는 자니까.
“한때는 운명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사라진 창조주의 규율.”
“산카가 한 말이군요.”
역시나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
하늘석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전 사용자는 정말 사라진 거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분명 어딘가에 남아 계시겠죠. 단지 모든 의지를 잃어버리셨을 뿐.”
“모든 게 사실이었구나. 운명이란 게 사라졌어.”
“저도 주인을 잃었고요.”
“신은 널 통해 뭘 얻으려 했지?”
“엇나가기 시작한 세계를 고쳐보려 했죠. 고치기 위해선 문제점을 정확히 알아야 하니 관측이 필요했고요. 전 사용자조차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이 생겨 층과 계가 엉망이 된 순간부터 제대로 된 일을 시작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죠.”
가하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를 새하얗게 만드는 격통이 밀려들었다. 안압이 상승하고 뇌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인식 절차가 끝났으니 착안을 다시 닫아둘게요.”
어디선가 솟아난 주황색 선이 눈을 관통했다.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들던 앎의 고통이 한순간 사라졌다.
가하란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토해냈다.
“안다는 건 두려운 일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적응해서 이곳을 찾아왔다는 건 적임자란 뜻이니까요.”
“적임자가 아니었다면…….”
“중계를 시도하다 죽었겠죠. 의지와 상관없이 타층과 연결돼 이상한 걸 불러오다가 죽거나, 혹은 밀려드는 정보를 버티지 못하고 뇌가 타들어 가 죽거나.”
“신은 배려심 같은 게 없나 봐.”
“전 사용자에게 있어 모든 사건은 그저 현상일 뿐이에요. 거기에 선악은 없죠. 삶과 죽음도 없고.”
“그래, 창조주를 이해하려 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지.”
식은땀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모든 걸 알 것 같았는데, 다시 아리송해졌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올이 조금 지쳤다는 투로 말했다.
“반복이 끝났으니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