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성도의 겨울은 둔보다 빨랐다.
옷을 껴입고 코끝을 문지르며 작업실로 향했다. 환상체들의 익숙한 대화가 귀에 꽂혔다. 어김없이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
-기공을 잊지 말고.
“저번보다는 작게 뚫어야겠어.”
낙하산 제작은 순조로웠다.
드넓은 성도에는 온갖 자재가 널려있었다. 식료품은 썩어서 손댈 수 없지만 그 외의 것들은 먼지만 털어내면 바로 쓸 수 있었다.
시제품을 만든 건 석 달 전.
4층 높이 건물에서 낙하산을 펼친 채 뛰어내렸다.
결과는 발목 염좌.
감속이 이뤄지기 전에 이미 땅에 도착해 있었다. 의족의 배터리를 사용해 충격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염좌가 아니라 골절이었을 것이다.
로키의 지식은 완벽한 게 아니었다. 실증을 거치지 않은 자료. 결국 몸으로 부딪쳐서 결괏값을 도출해야 했다.
체력을 담보로 삼은 실험이 이어졌다.
4층 건물에서는 공기 저항을 제대로 느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산을 탔다.
깎아지는 비탈이 실험대가 됐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는 로키의 조언은 사뿐히 무시했다. 단명은 목표가 아니니까.
비탈이라면 설령 낙하산 줄이 꼬이더라도 몸을 굴려 부상을 방지할 수 있었다.
도약이 시작됐다.
1차, 2차, 3차.
뛸 때마다 줄의 길이와 재질, 천의 크기와 재질이 바뀌었다.
통짜 낙하산에서 다양한 천을 겹겹이 덧댄 낙하산으로 변모하기까지 몸은 비탈을 굴러야 했다.
실험 회수가 늘어나면서 느낀 게 하나 있었다.
의족이 아니었다면 실험 같은 건 꿈도 못 꿨을 거라는 점.
의족이 방출하는 마전기의 파장이 착지 시 위험은 줄여주었다. 높이가 높아지면 기댓값이 낮아지겠지만, 실험 도중에 비명횡사하는 건 막아주었다.
가하란은 완성된 낙하산을 바라봤다. 접는 방식과 펼치는 방식도 중요했다. 줄이 엉켜서 낙하산의 형태가 뭉개지면 그다음 뭉개지는 건 내 몸일 테니까.
-오늘이군.
“예정대로 되긴 했네.”
거병을 끌고 성도를 벗어났다. 서쪽에 있는 이름 모를 산으로 올랐다.
가하란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기나긴 절벽 밑에 강이 보였다. 물살은 세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물도 돌처럼 단단해진다. 속도란 건 참으로 신비하지.
“그 신비한 체험을 내가 해야 하고.”
로키를 단 배낭을 메고 곱게 접은 낙하산은 가슴에 품었다.
비탈에서 시행된 실험은 어제부로 끝이다.
오늘은 하늘석에서 낙하할 때를 대비한 실전훈련이었다.
-고소공포증은 없는 것 같군.
“그런 병도 있어?”
-나도 문헌으로만 접했다.
다시금 발밑을 내려다봤다.
멀리 있는 강물이 이상하게 가까워 보였다. 아니, 엄청 멀어 보이기도 하다.
-낙하지점을 인식하고 뛰어라.
“최대한 노력해 볼게.”
-같이 강물에 수장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겁나면 넌 여기 있어.”
-아니. 비행 경험을 포기할 수는 없지.
잡담은 끝.
백여 회에 가깝게 구르며 체득한 걸 실수 없이 펼쳐내면 된다.
높이만 높아졌을 뿐 다를 게 없다.
“가보자.”
로키는 말했다.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고.
그러니 둘 중 하나였다.
뛰어넘거나 포기하거나.
한걸음 크게 내디뎠다.
발밑이 허했다. 발바닥을 지그시 누르던 체중이 한순간 사라지고 아찔한 부유감이 몸을 휘감았다.
안고 있던 낙하산을 뿌리듯 던졌다.
차곡차곡 갠 낙하산이 활짝 펼쳐졌다. 양옆에서 공기가 회오리쳤다. 몸이 좌우로 휘청거리다가 회전을 시작했다.
기공이 머리 위로 오는 걸 확인한 후 줄을 꽉 움켜줬다. 의족에 박아 넣은 배터리를 사용해 파장을 일으켰다.
쑥 꺼지던 느낌이 점차 완화되며 완만한 비행이 시작됐다.
-큰 원에서 점점 작은 원으로.
요령을 떠올리며 의족의 파장을 조절했다. 배터리가 마전기를 분출하며 허공에 지지대를 생성해 주었다.
중심이 완벽하게 잡혔다.
“로키! 우리 날고 있어!”
-정확히는 느리게 추락 중이다.
가하란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강이 점점 가까워진다. 강변의 무른 땅을 목표로 삼았다.
다리를 곧게 펴고 미끄럼틀을 타듯 바람에 몸을 맡겼다. 착지 순간 몸을 살짝 말았다.
하!
머금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대략 1.7km 상공에서 안전하게 지면으로 내려왔다.
“감을 익힌 거 같아.”
-하늘석은 이보다 더 위에 있다. 게다가 자료에 따르면 하늘 위 하늘의 공기는 사납다고 하고.
“하늘 위에 하늘은 대체 뭐야?”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자료에 있는 걸 읊었을 뿐이니까.
“출처는?”
-용.
“……믿음직한 출처네.”
낙하산을 긁어모았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툭툭 치며 거병으로 돌아갔다.
탈출 방법은 강구했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성도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건식과 배터리를 눌러 담은 배낭을 체임버 안쪽에 던져 넣고 옷가지를 챙겼다.
예비용 낙하산 두 개도 보관함에 넣었다.
준비를 마친 후 로튼산으로 향했다.
쌀쌀해진 날씨. 하지만 물이 얼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랍파의 기록지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주일 간격으로 로튼산 위로 하늘석이 지나간 건 1년에 8번. 시기적으로 봤을 때 지금이 아니면 여름까지 기다려야 한다.
“여름에 호숫물이 얼 리는 없겠고.”
산맥을 돌아 로튼산 호수에 도착했다. 가하란은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새하얀 입김이 터져 나왔다. 체감온도가 성도보다 훨씬 낮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성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단단히 얼었군.
가하란은 탁한 얼음 위에 발을 올렸다. 체중을 실어도 깨지지 않았다.
거병에서 짐을 내리고 천막을 쳤다. 저 멀리, 하늘석이 보였다. 일주일 전 성도를 지나 로튼산을 통과한 하늘석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불을 지폈다. 옷을 껴입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일렁거리는 주홍빛이 호수 전역을 감쌌다.
-성공하면 하늘석에 발을 딛겠군.
“문제는 그다음이지.”
-하늘석의 환경은 짐작할 수 없다. 마운과 대화할 수 있다면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가하란은 옆에 둔 도끼를 매만졌다. 하늘석에 마수가 득실거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역사 속 드래곤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뛰어내려야지.”
-서두르다가 낙하산을 엉뚱하게 펼치지 마라.
가하란은 옅게 미소 지으며 뜨거운 물을 마셨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은은한 달빛 사이로 촘촘하게 박힌 별이 보였다.
-하늘석에 오르면 저 별에도 닿을까?
“저건 하늘석보다 더 위에 있지 않을까?”
-가보고 싶군.
“나도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네.”
천막으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로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렀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 * *
-일어나라.
누군가가 얼굴을 사방으로 당긴 느낌이었다. 얼얼한 볼살을 문지르며 눈을 떴다.
“죽는 줄 알았네.”
추워도 너무 추웠다. 품에 안고 있던 신발에 발을 쑤셔 넣었다. 비명을 지르는 온몸을 달래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거의 다 왔다.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점처럼 보이던 하늘석이 거대한 몸체를 들이밀며 능선을 넘고 있었다.
배낭을 챙겼다. 언 호수를 가로질러 프렌트가 서 있던 곳에 도착했다.
-발밑에 생긴 문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라.
“본 적도 없는 네 친구의 말을 한번 믿어보자고.”
-기계는 거짓말을 모른다. 그러니 믿어라.
“아, 그러셔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저공비행 하는 하늘석이었다.
호수 전체가 그림자에 잡아먹혔다.
머리 위쪽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하늘석을 바라볼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황색 빛이 새어 나왔다. 수면에 반사된 햇빛처럼 반짝거렸다.
불투명한 얼음이 빛무리에 잠겼다.
지름 2m 정도의 원형으로 빛났는데, 모습을 드러낸 순간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하늘석의 이동 경로를 유추하고, 호수가 얼어붙은 날에, 정확한 지점에서 대기해야 목격할 수 있는 현상.
“죽음보다 도태가 더 두렵다.”
로키가 했던 말을 작게 되풀이하게 빛무리를 향해 뛰었다.
빛에 닿는 순간 몸이 살짝 들렸다.
그리고.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위아래가 뒤집혔다.
가하란은 뒤통수에 양손을 대고 몸을 말았다.
이윽고, 쿵!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방향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앞뒤로 맨 배낭 덕분에 몸통에 가해지는 충격이 줄어들었다.
-살아 있나?
“죽길 바란 건 아니지?”
-입이 산 걸 보니 멀쩡하군. 일어나라. 이 풍경을 너도 봐야 해.
풍경?
가하란은 배낭을 풀며 몸을 일으켰다.
숲이었다. 풀도 자라 있고 나무도 자라 있다.
부리가 길쭉한 새가 몸을 통과해 날아갔다. 새의 환상체가 꽤 많이 보였다.
하늘석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도착한 건가?
고개를 돌릴 때였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작게 기침하며 숨을 들이켰는데, 숨 쉬는 게 조금 껄끄러웠다. 입을 크게 벌려 숨을 한 움큼 삼켜도 모자란 기분.
“여긴 어디지?”
-하늘석이다. 떨어질 때 넌 못 봤겠군.
기계 안구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렸다. 빼곡한 나무 저편으로 하늘이 보였다.
길게 이어져야 할 땅이 뚝 끊어져 있었다.
전율이 온몸을 때렸다. 거친 숨을 내쉬며 땅끝을 향해 걸어갔다.
아.
탄성과 탄식 중간 어디쯤에 있는 감정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발밑에…….
성도가 있었다.
빼곡한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다시금 소름이 끼쳤다.
하늘석에 도착했다.
미답의 영역에 발자국을 찍은 것이다.
-저기.
로키의 안구가 가리킨 방향에 배낭이 있었다. 삭아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오래된 배낭의 주인이 누구인지,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먼지를 털어낸 후 배낭 안을 살폈다. 너덜너덜한 수첩이 한 개 보였다.
자리에 앉아 수첩을 들쳤다.
-발목을 삐었다. 설마 하늘석 위로 떨어질 줄이야.
글씨체가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프렌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글씨만으로도 전해졌다.
프렌트는 보이는 모든 것을 기록해 뒀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장을 펼쳤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니 두렵다. 입구는 확실했으나 출구는 불확실하다. 만약 아니라면? 날 맞아주는 건 호수가 아니라 땅바닥일 것이다.
가하란은 마지막 문구를 바라봤다.
-만약 이 기록이 발견된다면, 부디 멜멜 클랜에 전해주길. 그리고 염치없는 부탁을 하나 더 하자면, 내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길. 내 이름은 벨 프렌트. 멜멜 클랜의 연구원이다.
수첩을 덮고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꿈을 이룬 몽상가는 행복했을까?
“글쎄. 하지만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았을 거야.”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