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이불에서 손을 떼고 집을 나섰다. 머리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밖으로 안구를 내민 로키였다.
-어딜 가지?
“은행. 저쪽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나도 데려가라. 원거리 음성 통신은 흥미로우니까.
안될 건 없지, 가하란은 로키를 대동한 채 은행으로 향했다. 저번과는 달리 은행 안은 조용했다.
지하실로 내려갔다. 머니페니 넷이 장부를 정리 중이었다. 쪽방 안에서 연신 숫자를 외치던 트릿족이 양손을 위로 쭉 들었다.
“피곤하네.”
-퓨렐. 불면증이 또 도진 거야?
“모르겠어. 잠은 잘 자는데 영 개운해지질 않네.”
업무가 끝났는지 사적인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천장을 향해 뻗어나간 주황색 선을 톡 건드렸다.
역시나 손가락 끝이 불에 댄 것처럼 얼얼했다.
-뭘 한 거지?
로키가 물었다.
“만지면 안 되는 걸 잠깐 만져봤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만 볼 수 있거든.”
정기회의에 관해 머니페니들이 대화를 나눌 때였다. 칙,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트릿족이 머리를 긁적였다.
“잡음이 또 일어나네. 그쪽에도 들렸어?”
-아니. 여긴 깨끗한데.
“교신기 문제인가? 저번에는 그쪽에서만 잡음이 들렸지?”
-어. 손보고 싶어도 뭘 알아야 고칠 수 있지. 이러다 고장 나 버리면 골치 아픈데.
“가문의 역사와 함께해온 장비야. 고장 난 적은 없어. 연결 상태가 고르지 못한 건 날씨 때문이겠지.”
대화 사이사이에 칙, 치익, 칙 이런 소리가 계속 섞여 들어왔다.
“교신기라고 했지? 통신에 필요한 장비가 이 방 어딘가에 있는 걸까?”
가하란이 쪽방 이곳저곳을 살펴볼 때였다. 로키가 다급히 말했다.
-조용.
“왜 그래?”
-입 좀 다물어 봐.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붙였다. 이유 없이 다그칠 놈은 아니니까.
트릿족이 디저트 가게에 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자잘한 잡음도 계속 귀에 박혔다.
-반짝 반짝 작은 별.
무미건조하게 꺼낸 말.
가하란은 로키의 안구를 바라봤다.
“그 노래는 왜?”
-씰 부호다.
“씰 부호?”
-우리 중 하나가 만들어낸 통신부호다. 원거리 음성 통신이 불가능한 이유는 알고 있겠지?
“특정대역 고정화가 힘드니까.”
단순한 음성 증폭이라면 엉성한 마나회로로도 가능하다. 모든 거병에 탑재된 시스템이기도 하고.
하지만 장거리, 그것도 음성 통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거리 음성 통신도 온갖 제약에 막혀 기술이 답보 상태고.
-우리는 연결망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씰이 그러더군. 만약 연결망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연결망을 대체할 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는가.
로키는 이어서 말했다.
연결망을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차선책으로 내놓은 것이 씰 부호였다. 온전한 음성 전달은 연결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수대역을 이용한 연결 상태를 유지하는 건 가능하지. 마나포집도 그걸 기반으로 제작된 것이고.
“제대로 된 정보교환은 어렵지만 상대의 위치정도는 알 수 있는 상태인 건가?”
-그 정도 수준이지. 씰 부호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사용 가능한 통신체계다. 연결에 일시적인 장애를 줘 잡음을 만들고, 그 잡음을 통해…….
“단순한 문장을 전달한다.”
로키의 안구가 천장을 바라봤다.
-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반짝 반짝 작은 별. 계속 반복해서.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 중 하나가 통신대역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발산을 일으킬 정도면 시스템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고.
주황색 선과 연결된 유사정령이 있다. 이 선은 대체 무엇일까? 또 유사정령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환상체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천장을 바라보며 고심할 때였다.
-내가 볼 수 없다는 게 정확히 뭐지?
“정보의 선. 그중에서도 주황색 선이 이 방을 시작으로 하늘로 뻗어나가고 있어.”
정보를 감출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자료를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어 답을 도출해야 한다.
-정보로 이뤄진 선? 비가시영역에 존재하는 건가.
“이걸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볼 수 있는 건 너뿐이고?
“일단은.”
생각에 잠겼는지 로키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물리적인 간섭을 받았다는 건 만질 수 있단 뜻이겠지?
“만질 수는 있어. 잠깐이긴 하지만.”
-내 커넥터와 연결 가능한가?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야.”
-어째서지?
“주황색 선은 그간 내가 봐왔던 정보 형태와 달라. 물리력을 갖고 있어.”
가하란은 손바닥을 펼쳤다. 이곳으로 넘어올 때 생긴 화상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선을 쥔 대가야. 화상을 입는 것 같기도 하고 동상에 걸린 것 같기도 해.”
-신비롭군.
“직접 연결하면 무슨 문제가 생질지 알 수 없어.”
-내 걱정을 하는 건가?
“접촉으로 인해 생길 변수가 걱정돼. 물론 네 안전도 신경 쓰이고.”
-조사할 만큼 조사했다.
로키가 지하실 입구를 바라봤다.
-봐서 알겠지만, 하늘석에 관한 자료를 더 수집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다. 할 만큼 한 끝에 막다른 길에 도착한 거지.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지금 당장 결과를 낼 방법이 하나 있지. 도박을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은 판돈을 올려야 할 때다.
“죽는 게, 기능 정지가 두렵지 않아?”
-멈춘다는 건 쓸쓸한 일이지. 하지만 전에 말했듯 도태되는 건 그보다 더 절망적이다. 나아갈 길을 찾았다면 일단 나아간다. 그게 내 방식이다.
가하란은 기계 안구와 로키를 연결한 커넥터를 바라봤다.
“시도해 본 적 없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정말 괜찮겠어?”
-네 이론대로라면 어차피 난 이 세계에 종속됐다. 결국 이곳에 머물러야 하지. 변함없는 이곳에 말이야.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상태. 그러니 괜찮다.
본체에 연결된 기계안구를 분리했다. 커넥터 끝을 붙잡은 후 왼쪽 눈을 통해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솟구치고 있는 주황색 선 앞에 섰다.
숨을 고른 후 커넥터 끝자락을 주황색 선에 가져다 댔다.
파아악, 청록색 불꽃이 튀었다.
가하란은 이를 악물었다. 커넥터를 쥐고 있는 손에서 김이 올라왔다.
손아귀가 익어가고 있었다. 아니, 얼어붙고 있었다.
“로키!”
본체를 확인하며 외쳤다.
로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떼야 하나? 아니면 버텨야 하나?
-그만!
로키가 외쳤다.
가하란은 주황색 선에서 커넥터를 떼어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말 뒷발에 치인 기분이었다. 접촉할 때 튄 청록색 불꽃이 커넥터를 분리하는 순간 전신으로 분사됐다.
쪽방에서 튕겨 나와 한 바퀴 굴렀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마른기침을 간신히 토해낸 후 대자로 뻗어버렸다.
온몸을 휘감은 열기와 냉기가 서서히 증발하고 있었다. 저릿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쪽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로키가 보였다.
“……로키.”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가 ……최대 ……이런 ……하늘.
음성 장치에 문제가 생긴 걸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복…… 기다…….
다행히 언어 시스템은 멀쩡한 듯했다. 자가수복이 가능하면 좋을 텐데.
한동안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마수와 전투하며 단련된 몸이 아니었다면 기절했거나, 더 심한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5분 정도 몸을 추슬렀다.
루루를 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같이 있었다면 부상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으리라.
얼굴을 매만졌다. 벗겨지거나 진물이 나오진 않았다. 충격에서 그친 걸까.
“로키, 말할 수 있겠어?”
-정리 중이다. 처리할 수 없는 정보가 밀려들어 회로가 붕괴할 뻔했다. 차단하지 않았다면 고철이 됐겠지.
“그거 다행이네.”
로키 옆에 철썩 주저앉았다.
“뭐 얻은 거 있어?”
-난해한 것들이 너무 많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99.99%. 아니. 소수점 밑으로 9가 몇 개를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다.
“전부 다 이해 못 했다는 거네.”
-기억 단자의 한계수용력을 아득히 넘은 양이었다. 접촉시간은 단 7초였는데. 믿을 수 없는 정보의 양이었다. 연결망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하란은 본체 위에 손을 올려봤다. 땡볕에 장시간 놓인 것처럼 뜨거웠다.
-정리가 끝났다. 수용 못 한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거둬들인 것 중에 쓸 수 있는 건?”
-가하란.
“왜?”
-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갑자기?”
-난 방금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찰나였지만 우주를 엿본 기분이었어. 내 모든 걸 충족시키는 그 감각은 잊을 수 없겠지.
“그건 부럽네.”
-그러고 너 역시 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인즉슨?
가하란은 로키의 본체를 빤히 바라봤다.
-하늘석에 올라갈 방법을 알아냈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아이가 알려줬다.
“아이? 네 동료?”
-노래 말고도 올라오는 법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보다 눈을 연결해줘. 안 보이니 답답하군.
기계 안구를 연결해 주었다.
-……시계가 이렇게 난잡했던가. 내가 봐왔던 것들은 정말 궁색한 것이군.
“아는 게 많아지면 보는 눈도 달라진다더니.”
본체를 들고 일어섰다.
“갈 방법, 알려줄 거지?”
-물론이다. 너는 내 충실한 수하로서 하늘석에 올라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언제부터 내가 네 부하가 된 건데.”
-지금부터. 이제 돌아가자. 준비해야 할 게 많다. 낙하산도 만들어야 하고.
“낙하산?”
-살아서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다. 공기저항을 이용한 생존 장치 정도로 생각해라.
은행을 빠져나오며 물었다.
“하늘석에 네 친구가 있다는 거, 정말이야?”
-그렇다. 어떻게 그곳에 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아이가 맞다.
“누군데?”
-‘마운’. 연결망을 통한 기억 전송에 몰두하는 아이였다.
“유사정령이 하늘석에 있다라.”
가하란은 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유사정령의 본체를 들고 하늘석에 갔다는 건가?”
-혹은 정신체를 하늘석으로 옮겼거나.
“전자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는…….”
-나도 안다. 만약 정신체만 옮겼다면 하늘석 안에는 본체를 대신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니까.
하늘석.
모든 걸 관찰해온 바라라족조차 기원을 알지 못하는 거대한 돌덩이.
“하늘석 근처로 간 거병이 정지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
-거병이 어떻게 하늘석에 근접했지?
“과거에 하늘석의 고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진 적이 있어. 그때 일어난 일이야.”
어릴 때 엔엔한테 들은 얘기였다.
-자기방어 능력이 있는 건가.
“우연일 수도 있고.”
-올라가 보면 알 수 있겠지. 자연의 산물인지, 마법의 유산인지, 아니면 마법공학의 작품인지.
가하란은 얼굴 옆으로 온 안구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방법이 뭔데?”
로키가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 듣는 경쾌한 웃음이었다.
-역전. 거울 속으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