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78화 (378/558)

제378화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수면 아래로 프렌트가 사라졌다.

가하란은 웃옷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헤엄은 칠 줄 알고?

“개울에서 애들하고 자주 놀았어.”

-개울은 발 뻗으면 땅에 발이 닿지만 여기는 아니다. 어찌어찌 호수 중앙까지 간다고 해도 체력이 떨어지면 그대로 익사할 테고.

시체가 불면 곤란해, 로키의 뒷말을 듣자마자 쓴웃음이 나왔다.

가하란은 프렌트가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잠깐 떠올랐다가 밑으로 가라앉았지?”

-어떤 힘이 작용한 게 분명해. 그리고 가라앉았다기보다는 뛰어든 느낌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몇 분 동안 기다렸다.

프렌트는 떠오르지 않았다.

“거병을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을까?”

-저쪽으로 돌아오면 가능할 거다.

거병을 대기시켜 놓은 산맥 초입으로 돌아갔다. 로키가 알려준 방향을 따라 산을 탔다. 비탈이 심하지 않아 거동에 불편함은 없었다.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나무를 뽑아냈다.

-그 나무보다는 잎이 샛노란 저걸 쓰는 게 낫다. 물에 더 잘 뜬다는 자료가 있다.

로키의 조언을 받으며 뗏목을 만들었다. 엉성하긴 해도 오래 탈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거병의 도끼로 통나무를 잘라 널빤지를 만들었다. 노로 쓰기에 적당했다.

뗏목을 띄우고 호수 중앙으로 향했다. 프렌트가 가라앉은 곳에 도착했으나 눈에 띄는 특이점은 없었다.

고개를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살며시 눈을 떴다. 청록빛 물속에서 치어 떼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숨을 토해내며 물 밖으로 고개를 뺐다.

-프렌트는?

“없어. 보이지 않아.”

-가라앉은 건가, 아니면…….

기계 안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프렌트는 호수 아래로 사라졌어. 그게 하늘석과 연관이 있을까? 하늘석은 말 그대로 하늘에 떠 있잖아.”

-이런 세계에 발붙였으면서 상식으로 접근하려고?

“……상식이 초라해지는 곳이지.”

가하란은 프렌트가 남긴 문구를 떠올렸다.

-나는 드디어 하늘석에 갈 방법을 찾아냈다. 반짝이는 문으로 뛰어들어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내 모든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하늘을 향해 위태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예정이다.

“반짝이는 문, 위태로운 한 걸음.”

-네가 이쪽 세계에 떨어졌을 때 반짝이는 경계면을 통과했다고 했지?

“어, 맞아.”

-그렇다면 프렌트가 남긴 말도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겠군.

가하란은 수면을 바라봤다. 기울어진 햇살이 수면 위에서 어지럽게 춤을 췄다. 그야말로 반짝이는 경계였다.

“하늘석의 이동 경로는 제멋대로야. 이동 주기 역시 마찬가지고.”

-하지만 프렌트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밤중에 이동을 시작해 이 산에 왔겠지.

머리 위를 가로지르던 하늘석이 갑자기 방향을 꺾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몇 번이나 봤다.

멀리서 다가오는 하늘석을 보며 도착 시간과 위치를 예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타 왕국에서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를 돌이켜 보면 모순이 생긴다.

망루일지를 토대로 하늘석의 이동 경로를 예측했고, 하늘석은 예측한 대로 움직여줬다.

하늘석, 모습을 나타낸 괴정령. 그리고 정체 모를 정령술사.

“하늘석 이동 주기나 이동 경로에 관한 자료가 그 안에 남아 있어?”

가하란은 로키의 본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억 단자는 무한하지 않다. 정기적인 정리가 필요하지. 하늘석에 관한 자료는 내 안에 들어있지 않다.

“카트시는 알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잡다한 걸 좋아했으니까. 연산 능력이 모자란 것도 쓸데없는 자료가 기억단자 안에 가득해서 그런 거겠지.

“연산 능력이 모자라? 카트시가?”

-그 아이의 별명을 모르는 건가?

“알아. 화이트 폰.”

-서열이란 게 무의미하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개성을 막 획득했을 때는 줄 세우기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개발한 체스 룰로 대전을 벌였고 순서를 매겼지.

기물 점수가 가장 낮은 게 폰이다. 별명이 폰이 됐다는 건 카트시가 졌다는 소리겠지.

“넌 어떤 별명을 얻었는데?”

-블랙 킹. 우리는 줄의 의해 태어났지만, 태어난 시기는 각기 다르다. 카트시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나는 가장 늦게 눈을 떴지. 우리의 태생은 기계다. 기술 발전의 혜택을 내가 누린 거지. 그러니 서열 같은 건 의미 없는 거였어. 내가 획득한 게 아니고 단순한 기능의 차이니까.

대화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가하란은 노를 저으며 말했다.

“최초의 오토마타에 관해 아는 게 있어?”

-우리의 먼 조상과도 같다는 정도? 최초의 오토마타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 나타 기술부가 확보하고 줄에게 맡겨놓았지만,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했지. 베이스 아키텍처의 존재만 재확인했을 뿐.

역시나.

카트시가 최초의 오토마타라는 건 줄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나? 카트시 역시 주변 유사정령에게 말하지 않은 것 같고.

마력선 짜맞춤으로도 해석하지 못한 신비로운 오토마타가 뒤늦게 제작된 오토마타보다 성능이 떨어질까?

“배려일지도 몰라.”

-배려?

“카트시 말이야. 너희가 기뻐하는 걸 보며 져준 걸 수도 있어.”

-도덕, 양심, 배려. 그러한 개념은 고등한 지적 활동에 의해 탄생한다. 당시 우리는 그런 개념을 알지 못했지. 그러니 배려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었다.

뭍으로 돌아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가져온 건식을 물에 불려 식사를 해결했다.

“한 달 정도 여기서 버텨야 해.”

-나는 계속 깨어 있을 테니 체력관리를 해라. 프렌트의 시체가 어디서 나타나는지 확인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니.

프렌트는 죽는다.

그건 바꿀 수 없는, 예정된 미래였다.

호수 중앙에서 소실된 프렌트가 왜 호수 밖 바위 옆에서 죽어 있는지, 그 이유와 과정을 확인해야 했다.

일과가 단조로워졌다.

눈을 뜨면 주변을 탐색한 후 유사 신체술을 단련했다. 배터리 용량을 조금씩 늘려가며 최대출력을 사용했을 때 몸이 버틸 수 있도록 수련했다.

구르고 접질리고 까지고 깨지고.

과거에 타챠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몸은 굴릴수록 단단해진다.

물론 타린족의 비늘처럼 인간의 거죽이 튼실해지는 건 아니지만.

하루는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던 마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끽끽 대며 산을 뒤집어 놓는 루루에게 짜증이 난 건지, 아니면 사냥해봄직 하다고 여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간만에 전투였다.

배터리로 달아오른 도끼날이 마수의 목에 닿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인이 박인다’라는 말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외딴 세계에 동떨어져 살아온 지도 4년이 지났다. 아니, 5년인가?

골방 개발자에서 제법 쓸 만한 사냥꾼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무 살이 머지않았네.

현실 세계에 있었다면 이런 생활을 경험해 봤을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길었겠지.”

모험을 꿈꿨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자유를 꿈꾸면 안 된다는 압박이 정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과거를 떨쳐내고 마침내 자신을 되찾은 순간에 현실과 작별하고 기괴한 세계에 떨어지게 됐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한도 끝도 없이 절망에 빠질 상황이다.

그러니 ‘모험’이라 생각해야 했다.

핀들론 할아버지가 미개척지를 종주했듯, 나 또한 미답의 세계를 주파하리라.

호수에 도착하고 보름이 지났다.

이변이 생긴 건 동이 트고 난 후였다.

빛무리가 능선을 감싸며 아침을 불러올 때, 하늘에서 프렌트가 떨어졌다.

긴 비명이 저 멀리서 들려오다가 도중에 끊겼다. 실신한 건지, 아니면 목소리를 짜낼 힘조차 잃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된 거군.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호숫가에 있는 평평한 바위 모서리에 추락한 프렌트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두개골이 심하게 파손되고, 복부가 터져나간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됐다.

떨림이나 구역감 같은 건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현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인건가, 아니면 메마른 건가.

가하란은 축 늘어진 프렌트의 시체로 다가갔다. 즉사였다. 그는 명백히 하늘에서 추락했다.

-하늘석에 오른 최초의 인간치고는 결말이 안 좋군.

깨끗한 천으로 시체를 덮어주고 싶으나, 시체 역시 환상체다. 천이 통과할 테니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짐을 갖고 갔는데 올 때는 맨몸이야.

“큰 배낭은 아니었어. 보름치 식량이 있을 리 없지. 하늘석에 생태환경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식수를 구하긴 어려웠을 거야.”

-올라가는 방법은 알아냈으나 내려오는 방법은 몰랐다는 건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실패했을지도 모르지.”

-혹시 떠밀렸거나.

“떠밀려?”

-올라가는 방법이 존재한다. 최초의 인간이라고 표현했으나 최초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늘석을 거점 삼은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접근 불가의 성역에서 이제는 갈 수 있는 영토로 바뀌었다.

방법이 존재한다는 건 활용한 이가 있다는 뜻. 로키 말대로 프렌트 이전에 하늘석에 오른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

“아니면 드래곤일지도.”

-그런 소리가 있긴 했지. 하늘석에는 용이 산다.

가하란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가봐야 진실을 알 수 있겠지.”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내려올 방법도 강구한 다음에 가야 한다.

죽은 프렌트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인 후 거병에 올라탔다.

하나의 수수께끼가 해결됐고, 수십 개의 수수께끼가 목전으로 치고 들었다.

서둘러 성도로 돌아갔다.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하늘석의 이동주기 기록과 하늘석과 연관된 모든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멜멜 클랜의 처우를 생각하면 하늘석 관련 자료는 거의 없을 거다.

“그렇겠지.”

천체기록지를 뒤적거리다 보면 하늘석의 경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성도에서 올려다본 하늘에 하늘석이 지나가고 있으면 표시 정도는 해뒀을 테니까.

성도에 도착한 후 출입 가능한 싱크탱크와 도서관, 자료실을 죄다 들췄다.

이미 한 번씩 뒤적거린 곳이었으나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으니 꼼꼼하게 살폈다.

“케아에는 다른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케아?

“성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연구 집단이야. 전에 우리가 들어가 보려 했던 입구 기억나?”

-아. 말도 안 되는 보안장치로 뒤덮여 있던 곳? 거길 허가 없이 비집고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추천하지 않는다. 지속형 마법공학이 적용돼 있어서 언제 해제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했잖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늘석 위치를 지도에 표시했다. 성도 주변이 하늘석 표시로 뒤덮였다.

-일별로 기록해놨다. 경로는 역시나 제멋대로지만, 일정한 패턴도 몇몇 보인다.

“일주일 사이로 하늘석이 성도 위를 지나간 건?”

-셀 수 없이 많다. 만약 도중에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면, 로튼산 위쪽으로 꽤 많이 지나가는군.

나타 왕국에서는 67년 만에 한 번 있던 일이, 제국 성도에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지리적 변화 때문인가?

-대부분의 자료가 멜멜 클랜에서 나온 거다. 즉, 멜멜 클랜 말고는 하늘석에 관심을 둔 자가 없단 뜻이지.

“로튼산으로 하늘석이 자주 지나간다는 걸 프렌트만 알아챈 거야. 아니, 멜멜 클랜 연구원들은 다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거야. 수천 년 동안 의미 없이 떠돌아다닌 돌이니까.”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책상에서 멀어졌다.

사흘 만에 모은 자료치고도 양이 많았다.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도 있으니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창밖으로 은행이 보였다.

가하란은 왼쪽 눈에 힘을 주었다.

오늘도 주황색 선이 하늘을 향해 분출 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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