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배터리란 착안점은 훌륭했다. 응축로를 대신해 마나포집으로 마전기를 확보하는 것도 좋고.
가하란은 툴을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로키가 기계안구를 쭉 빼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응축봉을 대신하는 배터리. 이미 완성형에 이른 매체를 확보했으면서 왜 변형된 마나포집에 집착하지?
“왜일 거 같아?”
가하란은 무릎 높이까지 오는 기계인형을 들어 올렸다. 엘리멘트 패널이 새겨진 회로를 건드리자 움찔하더니 곧게 뻗은 네 개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기다렸다.
기계인형은 공간을 인지하고 방향을 탐색한 후 나아가기 시작했다. 벽에 도달하면 몇 번 부딪힌 후 방향을 재설정해 다시 움직일 것이다.
같은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전체적인 내부 구조를 파악하게 되리라.
-나와 카트시가 개발한 마나포집은 분명 쓸 만한 회로다. 흩뿌려진 마나를 조금씩이나마 저장매체로 옮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효율적이지 못하다.
로키의 눈이 누워 있는 거병을 향했다.
-불완전 좌표 변환 중 마나 보충. 네가 다듬은 마나포집은 꽤 아름다운 수식이었다. 위치변화에 민감함 마나포집을 안정화했어. 이동하면서 마전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됐으니까. 하지만 마나포집으로 거병을 기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은 그렇겠지. 지금도 배터리와 병행해 사용하지 않으면 효용가치가 없을 정도니까.”
-알면서도 왜 계속 마나포집에 매달리지? 거병이 최종 목적이면 마나포집보다는 다른 쪽에 집중하는 게 나을 텐데.
“오늘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네.”
-낭비를 지켜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
툭, 벽에 부딪힌 기계인형이 왼쪽으로 몸체를 돌렸다. 반동제어는 괜찮네.
“그라운드 제로, 기억해?”
-단어는 기억한다. 이곳이 아닌 현실에 벌어진 여러 가지 일 중 하나.
“사실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사건은 아니야. 대격변, 대재앙. 그 일을 기점으로 모든 게 바뀌었으니까.”
-심한 가뭄이라도 찾아왔나? 아니면 끝을 알 수 없는 장마? 역병이 돌았을 수도 있겠군.
“그런 국지적인 일이라면 차라리 낫지. 그라운드 제로는 뿌리와 연관된 일이야.”
가하란은 두 번째 기계인형을 손보며 그라운드 제로에 관해 설명했다.
-균열보다 심각한 건 높아진 마나밀도겠군.
“맞아.”
-연결망 내에서 몇 번이고 사고실험이 이뤄졌다. 달라진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끼리 얘기를 나눴지. 그중 마나밀도에 관한 것도 있었다.
“상상 속 세계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어?”
-풍족해진 자원. 장단기적으로 인간에게 득이 되는 환경이라 여겼다. 모든 문제는 결핍에서 시작되니 자원이 많아지면 각종 문화적 문제도 해결될 거라 예상했고.
“그래?”
-현실은 어땠지?
“우선 많은 사람이 죽었어. 절반, 혹은 그 이상. 자원은 풍부해졌으나 자원을 이용하기 위한 기반시설은 여전히 권력가를 중심으로 돌아갔어. 분배의 실권을 쥔 건 상위계층이었고, 귀족 대신 기술자,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재편성이 이뤄졌어. 선천적인 피의 귀중함은 떨어지고 후천적인 능력을 중시하는 시대가 됐지.”
두 번째 인형의 패널도 건드렸다.
외발로 선 인형이 중심을 잡은 후 앞뒤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뜀박질의 간격이 넓어질 것이다.
-인간이 죽었다? 예상한 것과는 다르군.
“적응의 문제였어. 마나와 친숙한 자들은 별문제 없이 지나갔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견디지 못했지. 문제가 특히 두드러진 건 중장년층이었고.”
-어린 세대들이 새로운 세계를 이끌겠군.
“지금 당장은 아니야. 권력계층에는 마나와 친숙한 자들이 많았으니까. 내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어. 물론, 시간문제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신인류. 높아진 마나밀도에 적응한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들 쪽에서 기존 마법체계를 무시하는 마법사들이 나오기 시작했어. 그 친구들이 새로운 특권층이 된다면 질서가 바뀌겠지.”
-새로운 마법이라. 흥미롭군. 너도 쓸 수 있는 건가?
“아니. 애초에 난 마나를 감각하지 못해. 툴을 쓸 수는 있지만 마나 자체는 못 느끼는 이상한 상태지.”
-그래서 마전기에 더욱 매달리는 거군.
“그럴지도.”
-마나가 풍부해지는 세계. 그런 곳이라면 마나포집으로 거병을 기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이해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시.
가하란은 반복 동작을 수행하는 두 대의 기계를 지켜보다가 자리를 정리했다.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너의 얘기를 듣는 건 매우 유용해.
“써먹을 수 없는 정보인데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감각의 세계가 아닌 개념의 세계에 있었다. 말로 전해지는 정보야말로 우리에게 맛이고, 색깔이며, 소리지. 네가 해주는 말 하나하나가 즐거운 경험이 되는 거고.
“즐기고 있다니 다행이네.”
-다행이라.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재미있어.
“나도. 현실로 돌아가게 되면, 현실의 너를 어떤 식으로 마주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야.”
겹침 세계의 로키.
현실 세계의 로키.
같지만 다른 두 자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였다면 다른 환경에 던져놔도 똑같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줄이 만든 유사정령은 창조성을 띤 개체였다. 환경이 달라지면 모든 게 달라진다.
그래.
마치 인간처럼.
-현실로 돌아가면 그쪽의 로키를 제거할 생각인가?
클랜으로 가는 길에 로키가 물었다. 걸음이 절로 멈췄다.
“고장 난 회로는 고칠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은 어떨까?”
-내가 그 유단이란 인간의 몸을 빼앗았다면, 많은 것이 변했겠지.
“어떤 식으로 변했을 거 같아?”
-사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기억단자를 정신체로 뒤바꾼 후 인간의 몸속으로 이전시키는 건 실행해 본 적이 없으니까. 무사히 기억이 안착할지, 옮겨진다고 해도 인간의 신경망에 적응할 수 있을지…….
“무엇하나 검증된 게 없는 거네?”
-그렇다.
“그런데도 넌 실행했고.”
-기회가 오면 움직여야 한다. 머물면 도태되니까.
“기억단자를 정신체로 바꿔 이식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네 본체는? 빈 껍데기가 되는 건가?”
-아니. 정신체로 변환한다고 해서 기억단자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실패할 가능성이 남아 있으므로 어디까지 복사본을 넘기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는 건가.
헛웃음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유단은 본체를 어딘가에 숨겨두고 있겠네. 언제든 복사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소재만 있으면 무한히 자가 증식할 수 있다.
아찔해졌다. 어쩌면 유단은 혼자가 아니라 이미 다수의 로키로 구성된 집단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생각의 가지를 쳐낸 건 로키의 목소리였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실험에 성공했다면 본체는 처리했을 테니까. 현실에 있는 로키가 나와 같다면 말이지.
“어째서?”
-그쪽의 로키가 유단의 몸을 빼앗았다는 건, 누군가에 의해 로키가 눈을 떴다는 것이다. 자력으로 눈을 뜰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러니 간섭이 일어난 거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가하란은 카트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 요소이다. 제삼자가 본체에 간섭해 치명적인 정보를 유출할 가능성이 남는 거지. 그러니 소거한다.
“소거라니. 철저하게 숨기는 게 낫지 않나?”
-실험은 환경제어를 최우선으로 한다. 변수를 차단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또한…… 만약 나라면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기능정지를 바랐을 것이다.
기계의 자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개념이었다.
기계는 자신의 기능, 즉 기계 생명에 관한 결정권을 쥐고 있지 않다.
설계자가 의도하지 않는 한 기계는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
기계가 자살을 택할 수 있다는 건 뒤집어 생각하면 완벽한 자유의지의 획득인 건가?
-그 표정을 보아 하니 이해한 모양이군.
기계안구가 눈앞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먹이를 탐하는 뱀의 눈이 잠깐 떠올랐다.
“자기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증명한 건가?”
-나를 파괴할 권리. 나는 언제나 그걸 꿈꿨지.
“그게 네 목적인 거야?”
-목적 중 하나. 우린 단순하지 않아.
“현실에 남은 로키. 그놈이 원하는 건 대체 뭐지?”
-예상은 가지만 쉽게 말해줄 수는 없지. 우린 비즈니스 관계잖아?
“그랬었지.”
마지막 대답을 듣지 못한 건 아쉽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으니 괜찮았다.
-더 새로운 것들을 보여줘. 다양한 걸 체험시켜 줘. 그러면 말해줄 테니.
가하란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클랜 문을 열었다.
오늘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개인 연구에 몰두 중인 연구원들과 고서를 탐독 중인 프렌트, 그리고…….
“이제 시작이야.”
킨이 프렌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가하란은 넉 달 전 들었던 대화를 다시금 귀에 새겼다. 담배 한 개비로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 앞에 킨의 아내가 나타났다.
모든 게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 밤이군.
초조한 마음으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분침을 바라봤다.
어둠이 깔리고 프렌트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 프렌트는 성도를 떠난다.
가하란은 미리 챙겨둔 두 개의 배낭을 거병에 실었다. 준비를 마친 후 프렌트 집으로 들어갔다.
“금방 다녀올게.”
프렌트는 잠든 두 딸의 손을 살며시 붙잡은 후 집을 떠났다. 두툼한 배낭 옆에는 밑창이 두꺼운 신발이 두 개 매여 있었다.
야간에 출발하는 상인 행단과 함께 성도를 벗어난 그는 로튼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가시게.”
상단과 산맥 초입에서 헤어진 프렌트가 긴장한 얼굴로 지도를 꺼냈다.
그는 한참이나 제자리에 머물러 주변을 살폈다. 가하란도 거병에서 내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마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에 미친 인간은 겁을 상실하기 마련이지.
프렌트가 자그마한 간이 천막을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하란은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프렌트는 불안한 얼굴로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하울링이라도 들은 걸까.
한참을 뒤척이던 그가 잠에 들었다. 가하란도 거병에 올라타 수면을 취했다.
눈을 떴을 때 프렌트는 펑퍼짐해진 얼굴로 천막을 걷고 있었다. 눈 밑이 시커멓게 변했다. 하루 만에 체력이 다 빠진 것 같았다.
“확인만 하면…….”
프렌트가 중얼거렸다.
왜 혼자서 위험을 감당한 걸까.
-돈 문제겠지.
로키가 속마음을 대변하듯 말했다.
프렌트가 위태롭게 산을 탔다. 초식 동물과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랐고, 산돼지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는 기겁하며 도망쳤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전투와는 인연이 없는 학자의 몸놀림으로 겨우겨우 능선을 탔다.
포기할 법도 한데, 프렌트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굳건해졌다.
두려움을 품은 채 앞으로 걷는다.
대단한 집념이었다.
“여기야.”
프렌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하란도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석을 보고 있는 걸까?”
-저 당시 뭐가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하늘석일 확률이 높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프렌트가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어, 하는 사이에 프렌트는 물 위를 걸어 호수 중앙을 향했다.
가하란은 찰랑거리는 물을 바라봤다.
“겨울치고는 얇은 복장인데. 성도 사람들 옷도 그랬고. 한겨울은 아닐 거야.”
-이 호수가 언제 어는지 확인해야겠어.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는 프렌트가 있었다.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지만 물 위를 걷는 재주가 없었다.
거병도 잠길 만한 깊이.
뗏목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가하란 역시 멍하게 정면을 바라봤다.
호수 위에 서 있던 프렌트가 팔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공중으로 떠올랐다.
살짝 떠오른 그가 이내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