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화
-저 인간은 마치 줄을 보는 것 같군.
관찰 두 달째.
로키가 내린 평가였다.
“줄리어스는 평소에 뭘 하고 지냈어?”
가하란은 으깬 고구마를 떠 입에 넣었다.
맞은편에는 프렌트가 책상에 앉아 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킨도 그 옆에서 무언가를 옮겨 적고 있고.
-줄의 연구실과 휴게실을 봤다고 하니 설명하기 쉽겠군. 줄은 오전 11시쯤 일어났다. 일찍 자든 늦게 자든 기상 시간은 변함없었지. 일어나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우리 곁으로 와 회로를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일과라 부를 수 있는 몇몇 작업을 끝내고 나면, 줄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물건들을 살펴보곤 했다. 어느 날은 작은 인형을, 어느 날은 가시 돋친 풀을, 또 어느 날은 말라비틀어진 시체의 손을.
“공통점이 전혀 없네.”
-줄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다. 자신만의 세계가 워낙 견고한 나머지 타인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지.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줄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에 관심을 뒀다. 마력선 짜맞춤은 그런 다양한 접근 속에서 탄생한 거겠지.
연구원들이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점심을 해결하러 간 모양이다.
클랜 건물에 남은 건 프렌트, 킨, 이슨 셋뿐이었다.
“밥 먹고 하죠.”
킨이 말문을 열었다. 도시락을 꺼낸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잡담이 이어졌다. 하늘석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가하란은 남은 사과 반쪽을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먼저 들어가. 난 이거 마저 보고 갈 테니까.”
“한잔하러 가죠.”
“제수씨한테 혼나지 말고 얼른 들어가.”
오후 8시.
클랜에는 프렌트 혼자 남았다. 머리맡에 작은 유등을 가져다 둔 그는 낮에 보던 고서에서 들추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기지개를 켠 후 프렌트 곁에 앉았다.
정밀한 시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긋남 없이,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위치에 있는 시침과 분침처럼 프렌트는 하루를 정확하게 쪼개 연구에 몰두했다.
몇 년이나 이렇게 살아온 걸까.
집념이란 단어조차 모자라 보인다.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군.
오후 10시.
8구역 통행 제한 직전에 클랜을 떠난 프렌트는 집으로 돌아가 두 딸에게 늦은 인사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서 술을 즐기는 사소한 유흥조차 없었다. 이제 다음 날 새벽 6시가 되면 기계처럼 일어나 두 딸의 얼굴을 살피고 클랜으로 향할 것이다.
지난 두 달간 봐왔던 것처럼.
-결과를 알지 못했다면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했을 거다. 저 인간이 보고 있는 자료는 정말 엉망이니까.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렌트가 붙잡고 있는 고서는 옛 연구가들이 남긴 자료 모음이었다.
안에는 하늘석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온갖 잡다한 정보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문제는 무엇이 하늘석과 관련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필요와 불필요를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별해낸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이 막막했다.
등대 없이 밤바다를 헤쳐 나가야 하는 작업. 프렌트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
-인내의 결과가 성공이든 아니든, 저 인간은 무언가를 본 게 확실해.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저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프렌트를 뒤따라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큼지막한 자루를 진 트릿족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부탁할 게 하나 생겼다.
“갑자기?”
-너도 구미가 당길 일이니 거절하지 않길 바란다.
“일단 들어보고.”
기계 안구가 트릿족을 향했다.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트릿족의 안식처는 어떤 문헌에도 공개된 적 없는 비밀 중의 비밀이라고.
“설마…….”
-현실 세계였다면 기웃거릴 수도 없고, 침범하려 들면 극형에 처해지지. 그건 시간이 흐른 미래에서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렇지 않나?
“맞아.”
돈이 있는 곳에는 머니페니, 트릿족이 존재한다. 현재는 은행이란 형태로 인간과 협업하고 있으며, 계좌라는 특수한 체계를 통해 돈을 관리해준다.
자유 시민의 돈이든, 귀족의 돈이든 모두 트릿족 손을 거쳐 시장으로 뿌려지는 것이다.
-저 다람쥐들은 노동의 대가로 받은 보수를 어딘가에 차곡차곡 저장해 둔다고 하지. 인세의 모든 보물은 트릿족 안식처에 있다는 말도 있고.
가하란은 은행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트릿족을 바라봤다.
잠들어 있던 호기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었다. 범법 행위란 단어조차 무색해지는 영역.
-표정에 다 드러나는군.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볼 곳이니까.”
-의견이 맞는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야. 도덕이란 걸 잠시 잊고 얼른 저 다람쥐 뒤를 따라가라.
“그 말을 안 꺼냈으면 걸음걸이가 좀 더 가벼웠을 텐데.”
-혼자인 세상에서 양심이란 게 소용이 있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은행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외관이 양호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균열이 생기고 이름 모를 덩굴이 건물 전체를 덮겠지만.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입구 안쪽에 다시 입구가 두 개 있었다.
왼쪽은 붉은색을 띤 쇠문으로 크기가 2m에 달했고, 오른쪽 끝에 있는 문은 평범한 나무 문이었다.
사용인을 대동한 귀족은 왼쪽으로, 나머지는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도 귀족이 직접 나서야 했군. 다람쥐들은 본인이 아니면 돈을 내어주지 않으니까.
“공증을 비롯한 복잡한 절차를 거치면 대리 승인이 가능한데, 매번 갱신해야 하니 귀족들도 직접 찾아오는 수밖에.”
오른쪽 문 안쪽을 슬쩍 살펴봤다.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트릿족이 무언가 분주히 받아 적고 있었다.
간간이 붉은빛이 번쩍였는데, 계좌를 만드는 것 같았다.
“통행 제한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네.”
-은행 업무에 한해 통행을 허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타 시절에도 해가 떠 있을 때는 신성한 노동을 해야 했으니까.
“신성한 노동?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까 좀 이상하네.”
-노동의 중요성은 나도 알고 있다. 나 역시 노동의 일환으로 태어난 것이기도 하고.
로키의 말을 들으며 왼쪽 문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의자가 띄엄띄엄 놓여 있고, 귀족들이 앉아서 대기 중이었다.
커튼이 쳐진 공간도 따로 있었는데, 그쪽은 신분이 높은 자들이 대기하는 곳 같았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은행에서는 일단 대기해야 한다. 콧대 높은 귀족들이 은행 안에서는 얌전히 기다리는 걸 어릴 때 몇 번 봤다.
“저 너머로 들어갈 수 있는 건 트릿족뿐이야.”
가하란은 노신사와 대화 중인 트릿족 옆으로 걸어갔다.
쇠창살로 막힌 벽면. 여닫는 곳이 사슬로 감겨 있었는데 자물쇠가 걸린 건 아니었다.
녹슨 사슬을 풀어내고 빗장을 푼 다음 창살을 밀었다. 뻐근한 소리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은 길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갔을 때 가하란은 작은 문과 마주했다.
손잡이가 없는 문. 힘껏 밀어봤지만 밀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걸만한 곳이 없어 당길 수도 없었다.
-보안장치가 있는 건가.
열 방법을 궁리할 때였다.
트릿족이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까슬까슬한 털이 돋아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동전을 뽑아 들었다.
자그마한 문 귀퉁이에 동전을 대자 주황빛이 흘러나왔다. 그 후 트릿족은 문 너머로 사라졌다.
-마법공학이 아닌 트릿족의 특수한 마법이라면 풀어낼 수 없겠군.
가하란은 모노클을 눈에 얹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은은한 마나 파장이 문 주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장기간 방치해도 유지되는 특수한 마법.
“부수면…….”
-트릿족의 안식처는 외부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다. 왜인 줄 아나?
“아니.”
-억지로 열려고 하면 붕괴해 버린다. 비밀을 지키는 완벽한 방법은, 비밀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거지.
비밀은 비밀로 남겨둬야 하는 걸까.
그때였다. 가하란은 기억을 더듬었다. 트릿족이 사용한 동전. 낯이 익었다.
“방금 본 동전에 트릿족 얼굴이 그려져 있었지?”
-그렇다.
“잠깐만.”
가하란은 상의 안쪽에 손을 넣어 주머니를 꺼냈다. 할아버지의 은반지처럼, 항상 지니고 다니는 물건은 이 주머니에 넣어놨었다.
주머니 바닥에 동전이 하나 있었다.
-그걸 네가 왜 가지고 있지?
“어릴 때 머니페니에게 받았어. 트릿족은 공짜로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서 이걸 줬지.”
기념품이라 생각했다. 아니, 현실 세계에 있었다면 기념품으로 남았을 것이다.
동전을 든 채 은행 빗장을 풀고 여기까지 내려와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동전이니까.
환상체의 행동을 따라 해봤다. 동전을 문에 대는 순간 주황빛이 일렁거렸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가하란은 허리를 접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금은보화 같은 건 없었다. 삭막한 풍경이 반겨줄 뿐이었다.
네모반듯한 책상이 벽면을 따라 세 개 놓여 있고, 트릿족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장부로 보이는 책자를 넘기며 알아들을 수 없는 숫자를 연신 내뱉는데, 중앙에 있는 트릿족이 숫자를 받아 적어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따라가 봤다.
굉장히 좁은 방이었다. 신장이 1m가 안 되는 트릿족조차 목을 움츠려야 할 정도였다.
좁은 방 안에서 트릿족은 벽면에 손을 댄 채 숫자를 읊었다.
무엇을 하는 걸까?
듣는 이도 없는 골방에서 연신 숫자를 외치던 트릿족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관을 통해 전해지는 소리 같은 게 아니었다. 이 방은 문 쪽을 제외한 모든 곳이 막혀있었으니까.
“둔 지부는 어때?”
트릿족이 말했다.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특이사항 없다며 말한 후 메마른 기침을 했다.
둔 지부?
그렇다면?
-원거리 음성 통신. 200m 내라면 모를까, 둔에서 여기까지 연결되는 통신이라고?
둔에서 성도.
‘단어 몇 개’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다량의 마나응축봉이 소모된다. 게다가 핫라인을 설치해야지만 가능한 전송법이었다.
하지만 트릿족은 제약 없이, 그것도 음성으로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거였군. 떨어진 곳에서도 계좌관리가 가능했던 이유. 이들의 마법이었어.
“마법?”
가하란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트릿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마법인 걸까?
왼쪽 눈에 힘을 주었다. 주변 풍경이 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닐지도 몰라.”
주황색 선.
카트시 본체에서 뿜어져 나오던, 세계의 경계면을 관통하던 그 주황색 선이 골방 천장을 뚫고 하늘을 향해 있었다.
이 선은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겹침 세계에서도 목격되는 걸까?
처음에는 카트시가 발산하는 특수한 영역대의 마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의 경계면에서도 주황색 선은 발견됐다.
그리고 트릿족은 정체불명의 선을 사용해 저 먼 둔과 소통하고 있었다.
가하란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달아오른 왼쪽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행에서 일직선으로 올라온 가느다란 주황색 선이 방사형으로 퍼져 대기 사이로 녹아들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봤다.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트릿족만이 주황색 선의 사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선.”
-뭐?
“지금 고민 중이야. 이걸 너한테 말해야 할지.”
-내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
“그럴지도.”
하늘로 흩뿌려지던 주황색 선이 일시에 사라졌다. 원거리 통신이 끝난 모양이다.
가하란은 저 멀리 점처럼 떠 있는 하늘석을 바라봤다. 왼쪽 눈으로 바라봐도 선으로 변하지 않고, 본래 모습을 유지한 채 유유히 떠다니는 거대한 돌덩어리.
“연관이 있는 걸까.”
유용한 정보를 하나 더 수집했다.
가하란은 머릿속을 정리하며 프렌트의 집으로 향했다.
프렌트가 실종되는 그날, 만약 프렌트가 하늘석의 비밀을 풀어낸 것이라면…….
많은 것이 뒤바뀌게 되리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