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75화 (375/558)

제375화

이십오일이 지났다.

프렌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사도 없었다. 별볼일없는 클랜에서 연구가가 증발하는 건 흔한 일인지, 아니면 다들 예견했던 것인지 조용히 지나갈 뿐이었다.

그나마 프렌트를 따르던 이슨이란 연구원이 수소문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말없이 사라진 사람을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내가 그때…….”

가하란은 프렌트 집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킨을 바라봤다. 유모와 대화할 때부터 계속 저 표정이었다. 허탈과 후회, 미안함.

뒤따라 유모가 나왔다.

“이런 때 이런 말 꺼내는 게 정말 미안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말끝을 흐리는 유모였다.

가하란은 무슨 문제인지 알고 있었다.

돈.

옛 성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인간사, 백 개의 문제가 있다면 그중 아흔 개는 돈 문제라고.

“돈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조금만 더 보살펴 주실 수 있나요?”

“꼭 돈 문제만은 아니에요. 큰애가 아빠를 찾아요. 솔이 계속 아빠가 보고 싶다고 보채는데, 더는 둘러댈 말이 없어요.”

솔.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첫째 딸의 이름이 솔인 것 같았다. 보름간 지켜봤는데 이름을 이제야 알게 됐다.

“정말 바빠서 못 온다고 말해주세요.”

킨은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보모 손에 쥐여주었다.

“소식은 없는 건가요?”

유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해서 찾아보고 있긴 한데, 찾아낸 게 없네요.”

“말없이 사라지실 분이 아니었는데. 딸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분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 되는 거고요.”

유모와 인사를 끝낸 킨이 걸음을 옮겼다.

-네가 말한 대로 사고사겠군.

로키가 말했다.

“기록대로라면 발견이 될 거야.”

웰턴이 했던 말에 의하면 노토를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 역시 찾게 된다.

가하란은 킨의 뒤를 밟았다. 멜멜 클랜에 도착한 그는 이슨과 함께 클랜 내부를 살폈다.

프렌트가 사용하던 책상을 꼼꼼하게 살피고 연구 자료를 들췄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해하던 다른 연구원들도 눈치를 보며 손을 보탰다.

“집에도 안 들어가셨다던데.”

“아무래도 뭔 일 생긴 거 같지?”

수군대는 연구원들을 킨이 노려봤다.

“선배님.”

이슨이 가죽끈으로 엮인 노트를 들고 나타났다.

“필체를 보니까 프렌트 선배님께서 남기신 거 같아요.”

“이리 줘봐.”

킨이 노트를 살폈다. 가하란도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석에 관한 개인적인 해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여기, 이거 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야.”

킨이 가리킨 대목을 바라봤다.

-나는 드디어 하늘석에 갈 방법을 찾아냈다. 반짝이는 문으로 뛰어들어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내 모든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하늘을 향해 위태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예정이다.

웰턴이 말해줬던 문구다.

아래쪽에는 ‘로튼산’이라고 휘갈겨 쓴 단어가 있었다.

“로튼산이라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미개척 지역과 맞닿은 곳이라 사냥꾼들만 드나드는 곳이지.”

킨이 노트를 챙겼다.

“잘 찾았어.”

“지금 가보시게요?”

“가봐야지. 조난당했을지도 몰라. 그 양반, 체력이 좋지는 않았으니까.”

나서려는 킨을 이슨이 붙잡았다.

“저도 같이 갈게요.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해요.”

“그런 곳을 어떻게 혼자 가겠어. 길드에 신속 의뢰를 넣을 거야. 아는 사람이 있어서 수색대를 금방 꾸릴 수 있어.”

문을 나서던 킨이 이슨을 돌아봤다.

“같이 갈 거면 따라오고.”

둘이 클랜을 벗어났다. 남은 연구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난장판이 된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했으면 좋겠네.”

“몹쓸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몽상가였을 뿐.”

“진짜 하늘석의 비밀을 찾아 나선 걸까? 결단력은 없어 보였는데.”

“모르지. 10년이 넘게 이곳에 있던 사람이잖아. 적당히 타협하고 시간 보낸 게 아니라, 정말 치열하게 준비하고 마침내 실행한 거라면…….”

말하던 연구원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우린 꿈 먹고살 거 아니잖아.”

그래, 라고 대답했지만 셋 다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가하란은 킨과 이슨을 따라 움직였다. 길드에서 사람을 모집하고 랍파의 도움을 받아 수색대가 꾸려지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며 대기가 보랏빛으로 변한 시간. 킨이 대동한 사람들이 성문을 벗어났다.

“로튼산이라면 야간에 움직여도 큰 탈은 없습니다. 이정표가 되는 적색 바위가 있는데, 그 뒤로만 안 넘어가면 문제없어요. 지금 출발하면 새벽녘에 도착할 테고, 야영지를 꾸린 후 본격적인 수색은 내일부터 진행하죠.”

랍파가 말했다.

수색대가 성문을 나가는 걸 확인한 후 거병을 끌고 그 뒤에 붙었다.

4시간 정도 동쪽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마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마수와 조우한다면 환상체들의 기록을 놓치게 된다.

-조용하군.

산맥에 들어섰다. 거병을 끌고 갈 수 없는 비탈이었다.

다행히 수색대도 걸음을 멈췄다. 산맥 초입에서 야영지가 꾸려졌다.

가하란은 거병을 대동한 체 주변을 수색했다. 기척을 숨긴 마수가 있다면 미리미리 처리해야 했다.

-한 마리. 변동폭이 낮은 걸 보면 심도는 낮은 것 같다.

작은 마수였다. 공격성이 두드러지지 않은 마수인지 먼발치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다.

사냥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가오면 그때 처리하면 된다.

거병 안에서 눈을 붙였다.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프렌트는 정말 하늘석을 발견한 걸까, 아니면 단순한 사고사일까.

이 세계가 4개월 주기로 반복되는 거라면 곧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재수가 없다면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시간이 역행할지도 모른다.

고민의 바다를 표류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었다.

수색대로 자리를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탐사에 나섰다.

하늘로 오른 매가 긴 울음을 뿜어냈다. 사냥꾼들이 풀어놓은 개들도 코를 킁킁대며 뛰어다녔다.

“찾을 수 있을까요?”

“찾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야.”

하루, 이틀, 사흘.

킨과 이슨이 수척해져 갈 때쯤 소식이 들려왔다.

“변사체를 찾긴 했는데, 본인 확인이 필요할 거 같군요. 보기 좋은 상태는 아니라 각오 좀 하셔야 할 겁니다.”

랍파의 말에 킨과 이슨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수색대가 능선을 따라 움직였다. 매가 맴돌고 있는 하늘 아래, 자그마한 호수가 있었다.

산맥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호수.

호수 옆 평평한 바위 옆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킨과 이슨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가하란이 먼저 움직였다.

완전히 함몰된 얼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팔과 다리, 터져버린 복부.

이름 모를 새가 시체 턱 주변에 득실대는 구더기를 쪼고 있었다.

손을 흔들어 새를 쫓아보려 했으나, 환상체한테는 간섭할 수 없었다.

가하란은 시체의 신발을 바라봤다. 프렌트가 실종되기 전날 신고 있던 신발이다.

신원은 확인됐다.

프렌트는 이곳에서 죽은 것이다.

고개를 깊숙이 숙여 애도를 표한 후 시체로 걸어갔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산맥으로 조사차 나왔다면 배낭이나 하다못해 수통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들짐승들이 물어서 옮긴 걸까?

“……선배.”

시체 앞으로 다가온 킨이 무너지며 내뱉은 말이었다. 이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노랗게 질린 얼굴로 호수에 고개를 처박았다. 속에 든 걸 게워내는 듯했다.

“벨 프렌트. 찾던 사람이 맞습니다.”

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랍파가 다가왔다. 두꺼운 천으로 시체를 정성스럽게 감쌌다.

역한 냄새가 진동할 텐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 매가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다른 새들을 쫓아냈다.

“옮기죠.”

목적을 이룬 수색대가 호수를 떠났다.

가하란은 시체의 흔적이 남은 돌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여기 말이야.”

가하란은 평평한 돌 측면을 가리켰다. 핏자국이 보였다.

“프렌트 씨가 이쪽에 부딪힌 걸까? 뭐에 쫓기고 있었던 건가?”

-아니. 혈흔으로 보건대 옆에서 부딪힌 게 아니다.

“옆에서 부딪힌 게 아니다?”

로키의 기계 안구가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하란은 설마,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인간, 위에서 떨어진 거다.

질리도록 새파란 하늘이었다.

산맥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호수. 주변에 절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높은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하란은 완전히 함몰된 두개골을 떠올렸다. 보통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복부 상처도 상당한 압력에 의해 그렇게 된 거라면?

“정말 하늘석에서…….”

-멍하게 있을 시간이 있나? 곧 주기가 찾아온다. 환상체들이 시간 역행을 일으킨다면 진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

로키 말이 옳았다.

어물쩍거릴 때가 아니었다.

거병에 올라타 수색대를 뒤쫓았다. 늦은 밤이 돼서야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망인을 인도받아야 할 자식들이 너무 어렸기에, 뒤처리는 킨과 이슨이 담당했다.

소식을 전해 받은 유모는 선 자리에서 눈물을 훔쳤다. 남겨진 아이들이 너무나도 가엽다면서.

이미 벌어진 일.

지나간 과거.

그럼에도 가슴이 쓰라렸다. 첫째 딸이 문밖으로 나와 우는 유모를 붙잡았다.

“아빠는?”

“그게 말이지…….”

유모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킨이 몸을 숙여 첫째 딸을 바라봤다.

“아빠가 좀 먼 곳에 갔단다.”

“언제 와요?”

“곧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좌우로 돌아가는 둥근 눈이 한순간 떨리는 걸 보았다.

가하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아이는 직감했다. 다시는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는 걸.

첫째 딸이 목놓아 울었다. 둘러대는 말로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이 전해진 것이다. 집안에서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옹알이도 못 하는 아이가 언니를 따라 우는 것이었다.

-안쓰럽군.

로키가 말했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로키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감정을 안다는 건 때론 불편한 일이지. 물론 안쓰러운 것과 별개로 내가 저 아이들한테 뭔가 해줄 마음은 없지만.

“마음은 없어도 해줄 여건이 된다면, 뭔가를 해줬을까?”

-글쎄. 과거에 대고 호소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저건 지나간 일이니까.

그때였다.

눈앞에 있던 환상체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코앞으로 짐을 진 아낙이 걸어갔다. 털이 짧은 개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정겨운 웃음소리가 거리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아빠!”

첫째 딸의 손을 붙잡은 프렌트가 방긋 웃으면서 집 밖으로 나왔다.

-앞으로 4달간 저 인간을 관찰해야겠군. 어떻게 죽어가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하니까.

결정된 과거.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프렌트는 나아갈 것이다.

그걸 되돌릴 수단은 없다.

순간 악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죽음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지나간 일로 감상에 젖을 거라면, 그 몸을 나한테 넘겨라. 인간이면 인간답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해야지. 넌 창조주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목매달지 마.

비꼬는 듯한 말투였으나 어쩐지 위로가 된다.

“지켜봐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가하란은 밝게 웃는 프렌트를 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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