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74화 (374/558)

제374화

-일반 건물이군. 저것들과 달리.

로키가 가리킨 ‘저것들’.

듬성듬성 솟아나 있는 입구를 바라봤다. 탈로스에나 쓰일 법한 귀중한 철로 만들어진 입구.

“저긴 위험한 곳이니까.”

-성도 내에 있다고는 하지만 방범 시설은 보이지 않아. 오가는 인간도 적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대놓고 입구를 드러내도 뚫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아니, 오히려 공개돼 있기에 보안이 좋은 게 아닐까?”

시야를 가리는 게 없는 너른 공터에 입구만 솟아나 있다. 비밀리에 접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보인다.

-반면 이건 누가 봐도…….

로키가 말끝을 흐렸다. 정문을 뚫고 사람이 걸어 나왔다. 키가 작은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줄로 보였다.

뒤이어 다른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이쪽은 좀 더 젊어 보였다.

“이제 그만 하죠. 연구비 명목으로 지원을 받아내는 것도 한계에요.”

“킨, 이번엔 진짜야. 가능성이 보인다고.”

킨이라 불린 젊은 남자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상의 안쪽을 더듬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 담배 남는 거 있어요?”

“그 비싼 걸 아직도 피워?”

“싸구려도 많아요. 선배는 끊었어요?”

“나야 진즉에 끊었지. 활동비에 보탤 돈도 없는데 그런 거에 손대면 쓰나.”

그렇게 말하면서 선배라 불린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슬그머니 꺼냈다.

킨이 웃었다.

“끊었다면서요?”

“마지막 하나야. 하늘석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태우려고 남겨둔 애틋한 보물.”

킨이 손을 내저었다.

“차라리 욕을 하세요. 그런 말 듣고 어떻게 그걸 받아요.”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져가. 사나이 벨 프렌트,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챙겨둬요. 끝내주는 순간에 피워야 하니.”

“나중에 투덜대기 없기다.”

“프렌트 선배님, 제가 그렇게 속 좁지는 않습니다요.”

킨이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뭐야? 있었어?”

“네. 있었죠.”

“……하나 더 있고?”

“있겠어요? 저도 탈탈 털어서 연구 계좌에 넣었어요. 이번 달 진짜 빠듯해요. 이러다 아내한테 쫓겨나요.”

“쫓아내 줄 아내가 있어서 좋겠어.”

“말을 또 그렇게 하신다. 자요.”

사이좋게 담배를 문 두 남자가 건물 벽에 기대섰다.

-인간들의 기호식품은 이해하기 힘들어.

로키가 한마디 했다.

“나름의 맛이 있다고 하니까.”

가하란은 두 남자 옆에 붙어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형수님은 안 계시지만, 귀여운 두 딸이 있잖아요.”

“그렇지.”

“선배. 슬슬 현실로 돌아갈까요? 꿈 좇아서 사는 것도 좋긴 한데, 가족이 있잖아요. 타협이란 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할 만큼 했잖아요. 멜멜 클랜,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클랜의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왔잖아요. 나머진 후배들한테 넘기죠?”

프렌트가 담배를 입술 끝으로 밀어 넣었다.

“백이면 백, 네 말이 옳다고 할 거야. 미치는 것에도 방향성이 있어야지. 하늘석, 거 돈도 안 되는 연구에 미쳐 있으면 이도 저도 안 되지.”

“제 말이요, 그러니까…….”

“근데 여기까지 왔잖아. 미답의 영역에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라면 포기할 수 있어?”

“선배. 15년이에요. 그 말 하나로 15년을 버텼잖아요. 근데 저놈이 우리 손에 잡힌 적 있어요?”

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가하란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석이 성도를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고문서, 거기에 해답이 있어. 이번엔 진짜야.”

“다 시도해 봤잖아요.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까지 다 해봤잖아요. 근데 되는 게 있었어요?”

“남은 게 있잖아.”

“선배, 그건 방법이 아니에요. 추상적인 문구만 가득한데 그게 방법이에요? 뭐 어떻게 실행하시려고요?”

“그게 말이지…….”

프렌트가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건물 저 멀리 자그마한 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가 나타났다. 킨이 서둘러 담배를 끄더니 여자를 향해 뛰어갔다.

한동안 설전이 오갔다. 멀어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었다.

돌아온 킨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야?”

“기억하시죠? 저번에 말했던 건이요. 시댁에서 자리 하나 만들어 준다는 거.”

“‘케아’ 쪽 관련된 거?”

“네. 마나회로를 이용한 원거리 통신, 이쪽 개발에 사람을 모집 중인데 제가 적격이라네요. 하늘석과 교신하려고 별의별 짓을 했던 게 도움이 됐나 봐요.”

“잘됐네! 케아와 관련된 곳이라면 연구비도 제대로 나올 테고, 급여도 확 좋아질 테지.”

“예…… 좋죠. 근데 문제가 바로 내일 옮겨야 한다고 하네요.”

프렌트가 꽁초를 바닥에 툭 버린 후 킨의 등을 세게 쳤다.

“뭘 고민하고 있어. 당장 계약한다고 해. 연구원 자리가 쉽게 나는 줄 알아? 고민할 거 없어. 제수씨 불안하게 하지 말고 얼른 한다고 해.”

“저 빠지면 여기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만 넷 남아요. 걔들 하늘석에 별 관심 없다는 거, 선배도 잘 아시잖아요.”

“그런 걸 뭐 하러 따져. 군소리 말고 당장 가. 짐도 내가 정리해두고 서류 작업도 해놓을 테니까.”

“그렇게까진…….”

“제수씨 표정 점점 굳어진다.”

“사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계약서에 이름 써야 한다고 하네요.”

“그럴 줄 알았다. 여기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 시댁에서 겨우 힘써서 좋은 자리 마련했는데 놓치지 말고. 이번 거 놓치면 너 정말 쫓겨나.”

프렌트가 킨의 등을 밀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킨이 힘없을 걸음을 뗐다.

“선배. 선배도 같이…….”

“그런 자리가 두 개나 났겠어? 내 걱정 말고 얼른 가.”

“제 도움 필요한 거 아니었어요? 뭐 발견하셨다면서요.”

“혼자서도 충분해. 나중에 학술지에서 내 이름 새겨져 있는 거 보고 놀라지나 마. 하늘석의 비밀을 풀어낸 위대한 연구가, 벨 프렌트. 멋있지?”

옅게 웃던 킨이 아내와 사라졌다. 홀로 남은 프렌트가 입가를 훔친 다음 건물로 들어갔다.

-시대는 바뀌어도 삶의 형태는 비슷하군.

로키의 말을 들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길쭉한 테이블 위에 온갖 서적이 쌓여 있었다.

프렌트 말고도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자를 뒤적거릴 뿐이었다.

“성도 중앙연구회에서 학술회를 연다던데. 잡무라도 도와주면서 안면 틀까?”

“이미 알음알음 사람들 다 구했대.”

“어쩔 수 없이 배정받은 클랜이 하필 여기라니. 여기 유배지나 다름없잖아. 연구비도 거의 안 나오고, 도서회조차 끼지 못하고.”

“그냥 도장만 찍고 개인 연구 착실히 쌓아서 탈출해야지. 다른 선배들도 다 그렇게 했어. 어떤 면에서는 좋지, 멜멜 클랜은 연구하는 게 없어서 한가로우니까.”

젊은 연구원들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프렌트가 흘깃 바라보자 슬그머니 눈을 돌리며 빈 종이를 훑기 시작했다.

“자네들, 할 일 없으면 이만 가봐.”

“그래도 됩니까?”

예의상 되묻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셋은 프렌트가 말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건물을 나섰다.

프렌트가 남은 한 명에게 말했다.

“자네도 슬슬 다른 자리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여긴 유배지잖아?”

“성과 없는 곳이긴 하지만, 역사가 깊잖아요. 전 여기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맙네.”

“선배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인원 문제가 아니라 아예 8구역에서 자리를 빼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매년 나오는 소리야. 내가 여기 막 들어왔을 때도 최고연구원분이 그 소리를 했지. 110년 전통의 클랜이라 그런지 의외로 잘 버티더라고.”

“그 전통이 저희 대에서 끊길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젊은 연구원이 짐을 챙기며 물었다.

“도와드릴 거 없습니까?”

“생기면 말할게. 곧 생길 거 같기도 하고.”

“뭐라도 찾으셨어요?”

“찾기야 매번 찾아내지. 매번 마른 우물이라서 문제지만.”

젊은 연구원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홀로 남은 프렌트는 잠시 내부를 훑다가 서류를 정리했다.

-이 자를 계속 관찰해야 할 이유가 있나?

“고민 중이야. 내가 쥐고 있는 정보는 단편적이거든.”

50여 년 전 하늘석을 쫓다가 사망한 연구가. 시기는 얼추 맞는 것 같았다. 그 연구가가 프렌트일 확률도 높아 보이고.

“현실이라.”

프렌트가 한숨을 내쉬며 유등을 껐다. 건물 내부가 어둠에 잠겼다.

가하란은 프렌트를 따라갔다. 8구역에서 조금 떨어진 주거 구역에 그의 집이 있었다.

유모로 보이는 여자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프렌트는 거실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두 딸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좋은 자리, 그거 좋지.”

아이들의 뺨을 쓸어내리던 프렌트가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은 저 인간을 따라다닐 생각인가?

“클랜 쪽도 살피면서 최대한 정보를 모아봐야지.”

머리 위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비틀어진 나무가 보였다. 몇 달 후면 주저앉으려나.

-여기서 자는 게 좋겠어.

“사고 나길 기원하는 거지?”

-나쁘진 않지.

가하란은 프렌트가 잠들어 있을 방을 바라본 후, 건너편 집으로 들어갔다.

프렌트의 집보다는 상태가 좋았다. 이불을 깔고 눈을 붙였다. 당분간 클랜과 프렌트 집을 오가며 상황을 살필 것이다.

“반복되는 주기도 점검할 기회야. 4개월을 끝없이 반복하는지, 아니면 한 번으로 끝난 건지.”

-뭐가 됐든 다음 달이면 확인 가능하다.

로키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식량을 우선 확보하고, 주거지 문제도 해결한 뒤에 짬짬이 시간을 내서 성도 도서관에서 자료를…….

얕은 어둠이 찾아왔다가 금세 물러갔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니 작은 새가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쨍한 햇빛을 보며 길게 하품한 후 자리를 정리했다.

프렌트 집으로 건너갔다.

유모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프렌트는 나간 모양이다.

밖에서 뛰어놀고 있던 루루를 부른 후 로키를 챙겨 멜멜 클랜으로 향했다.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피곤에 잠긴 젊은 연구가들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프렌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위대한 대선배님께서 늦으시네.”

“어제 킨 선배가 나갔잖아. 그것도 케아와 관련된 일로. 후배가 아득히 높은 곳으로 치고 나갔는데, 속이 편하겠어? 집에서 잔뜩 마시고 취해있겠지.”

“그럼 오늘은 눈치 볼 일도 없는 건가?”

낄낄거리며 각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저녁이 찾아오고 클랜에 남아 있던 연구원들이 자리를 떠났다.

어제 마지막까지 프렌트와 대화하던 젊은 연구원만 자리를 지키다가 등을 끄고 건물을 나섰다.

다음날.

가하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모를 바라봤다.

프렌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도 없고, 클랜에도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젊은 연구가가 프렌트의 집을 찾아왔다.

“프렌트 씨 계십니까? 전 같은 클랜 소속인 이슨이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무슨 일 있나요?”

유모가 잠든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프렌트 씨가 며칠째 안 보여요. 저야 받은 돈이 있으니 애들을 돌보고 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 와서 애들 상태를 살피던 분인데…….”

“예? 선배님께서 댁에 안 들어오셨다고요?”

경악한 이슨 옆에서, 가하란 역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프렌트와 처음 만난 그날, 프렌트는 성도를 떠난 듯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