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3화
-부패 정도로 보아 1년 정도 된 것 같군.
로키가 말했다. 배낭 위로 길게 내뺀 기계 안구가 상자 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런 것도 보면 알아?”
-정확한 건 아니다. 환경에 따라 다르니까.
가하란은 복면을 끌어 내렸다. 냄새를 막기 위해 쓴 건데 별 소용이 없었다.
“둔에서는 그나마 건질 게 있었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어.”
-네가 인식한 시점에서 세계의 시계가 움직인다. 괴이한 가설에 점점 힘이 실리는군.
상자 뚜껑을 닫고 일어섰다. 지하실에 비치해둔 비상식에도 곰팡이가 폈다. 제아무리 건식이라 해도 관리가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건가.
-삭아가는 건물과 썩은 내 진동하는 거리. 그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는 인간들이라.
가하란은 맞은편 가게를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식사 중인 가족이 보였다. 오붓한 정경이었다. 비틀어져 반쯤 부서진 창문과 반쯤 내려앉은 지붕만 뺀다면.
“성벽은 상태가 좋았는데.”
-마법적 처리를 해놨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을 거다. 관리자가 없으면 부식이 시작되겠지.
마주 오는 환상체들을 통과하며 길을 걸었다. 목적지는 우뚝 솟은 왕성.
“크네.”
성 꼭대기에서는 성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것이다. 안 그래도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은데 건물까지 길쭉하다.
어떤 공법을 사용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취악기의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트막한 해자 위로 설치된 도개교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복 차림의 남자들이 줄 맞춰 섰고, 매끈한 털을 자랑하는 말들도 일렬로 늘어섰다.
푸른 사자가 그려진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거리를 바삐 오가던 사람들도 제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
성도를 꽉 채울 듯 소리를 뿜어내던 악기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성문 밖으로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황제와 황비.
옛 제국의 주인들을 향해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압도적인 모습에 괜스레 목을 움츠리게 됐다.
-나타 왕과 달리 기품이란 게 있군. 동시에 사나워 보이고. 맹수를 닮은 인간이야.
느긋하게 걸음을 떼는 황제 뒤로 갑주를 착용한 기사가 보였다. 왼쪽 가슴에 푸른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사단과 3m 정도 떨어진 후열에는 고풍스런 복장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귀족들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젊었다. 노귀족은 보이지 않는다. 제국 황제와 같은 길을 걷는 젊은 귀족들.
황제만큼이나 권력이 강했다던 의회의 핏줄들일까?
한동안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만질 수도 대화할 수도 없는 환상체들이다. 구경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황제의 행차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람들을 뚫고 지나갈 때였다.
가하란은 걸음을 멈췄다.
바로 앞에서 걸어오는 또래 남자의 얼굴이 발길을 붙잡았다.
정중한 듯하면서도 도발적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눈. 사용인임을 알리는 단출한 복장이지만, 화려한 귀족들의 옷보다 맵시가 있었다.
바로 옆에 선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귀족에게 작게 속삭이는 남자.
가하란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훤칠하시네요, 할아버지.”
멀어져가는 증조부를 지켜보다가 상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은색 반지를 꺼내 들었다. 첼의 유품. 반지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고 하브가 말했다. 직접 듣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이제는 맞으려나.
검지에 반지를 껴봤다. 어릴 땐 헐렁하던 반지가 이제는 딱 들어맞았다. 치수를 재서 만든 것처럼.
-반지?
“증조부의 유품.”
-학습한 것에 따르면 반지에는 축복과 저주, 두 가지의 의미가 공존한다고 한다.
“축복과 저주?”
-상대가 연인이라면 평생 행복하길 기원하며 동시에 배신했을 때 끝없이 고통받길 염원하지.
“그건 좀 무섭네.”
-시대마다 기념품의 의미는 다를 테니까. 물론 우리 시대의 반지는 기념품보다는 주술적 의미가 매우 강한 물건이었지만.
가하란은 반지를 매만졌다.
“주술적인 물건은 아니야. 그런 힘도 없고. 대신 숨겨진 이야기는 있다고 했지.”
-숨겨진 이야기?
반지 안쪽에 적힌 글귀를 말해줬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그건 바람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글쎄. 알 수 없지. 정답은 할아버지만 알고 계실 테니까. 아, 하브 씨도 알고 계시려나.”
과거를 잠시 추억하다가 이내 털어냈다. 우선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멜멜 클랜의 위치를 대략적이라도 아는 건가?
“아니. 성도도 이번이 처음이야.”
-어떻게 찾을 생각이지? 물어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꽤 오래된 클랜이라고 했어. 성도 내에 남은 유일한 하늘석 연구 클랜이기도 하고. 왕성 내 서적을 뒤적거리다 보면 뭐라도 하나 나오지 않을까?”
-하늘석이라.
왕성으로 들어갔다. 지하에 있는 조리실부터 차근차근 탐사했다.
-저쪽.
2층으로 올라왔을 때 로키가 말했다. 기계 안구가 향한 곳을 바라봤다.
“기록보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쌓인 캐비닛들이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중앙에 놓인 둥근 탁자에는 종이가 수북했다.
울타리처럼 쌓인 종이 너머로 묵묵히 펜대를 움직이는 자가 보였다.
황금빛이 도는 털색. 서로 다른 크기의 길쭉한 귀. 종종 벌름거리는 코와 새하얀 의수.
브라인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른 바라라족이 앉아 있었다.
“커피를 가져다주시죠.”
그녀가 말했다. 문을 뚫고 들어온 환상체가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심상세계가 소멸한 기록보관서는 이런 느낌이구나.”
좁디좁은 공간. 브라인이 담당하던 기록보관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리라.
마법을 걷어내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뛰어다니는 캐비닛도, 저절로 바뀌는 지형 같은 것도 없다.
탁자로 다가갔다.
바라라족이 작성 중인 문서를 바라봤다. 아침과 점심 온도, 배급소에서 나온 음식, 커피의 맛 같은 자잘한 것들을 적고 있었다.
-저것도 환상체인가.
로키가 탁자에 쌓인 종이를 가리켰다. 가하란은 손을 뻗어봤다. 손가락이 종이를 뚫고 내려갔다.
보이나 실존하지 않는 물건.
바라라족이 손을 뻗어 종이를 잡았다. 겹침 세계의 주민들만이 종이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캐비닛은 이쪽에 남은 물건이야. 만질 수 있어.”
낡은 캐비닛을 열었다. 누렇게 뜬 종이들이 반겨주었다. 꺼내서 쓸 만한 정보가 있는지 살펴봤다.
바닥이 궁둥이를 붙이고 수십 개의 파일을 확인할 때였다.
“하나 건졌네.”
가하란은 종이 한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흔들었다.
-뭐지?
“성도 내 클랜 위치. 2년 주기로 확정신고 해야 하는데 이건 작년 문서야. 멜멜 클랜도 있고.”
-성도는 주소 관리가 체계적인가?
“둔이 성도의 방식을 따왔다고 했으니, 여기도 도로마다 이름이 있을 거야. 주소만 알면 찾아가기 쉬워.”
F8-D23.
주소를 확인한 후 종이를 챙겼다.
“커피를 가져다주시죠.”
바라라족이 말했다. 브라인도 수다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저 바라라족과 비교하면 말이 많은 편이었다.
과묵한 토끼 여사는 계속 커피만 주문할 뿐, 인간과는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네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바라라족은 있었겠지?”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처럼 도시 내부에 거주하는 게 아니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지.
“천 년을 넘게 산다고 하니, 저분도 나타 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봤을까?”
-바라라는 한 번 뿌리를 내린 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배웠다.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은 정착한 곳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기록만 하지. 아마 저 여자는 이곳이 제국이기 전부터 이 땅에 발붙여 살아왔을 거다.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를 지켜보면서.
제국이 제국이기 전, 인간이 땅에 발을 들이밀기도 전, 그 아득한 옛날부터 이곳을 지켜봐 온 자.
“그런 분들조차 하늘석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니.”
-바라라도 밝혀내지 못한 비밀을 인간이 알아냈을까? 이번 여행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낭비한 건 아니야.”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온갖 상처로 뒤덮인 손을.
“경험을 얻었으니까.”
-미련할 정도로 긍정적이군.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어. 난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가하란은 커피를 홀짝이는 이름 모를 바라라족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순간 바라라족과 눈이 마주쳤다.
봐도 본 게 아닌 환상체.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초록 눈을 이어받은 오래된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날, 이 시간에 정처 없이 떠도는 아가가 절 찾아올 거라고요.”
가하란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저는 드릴 게 없습니다. 그 친구 역시 줄 게 없다고 했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전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바라라족이 펜을 내려놓았다. 털만큼이나 금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가하란을 향했다.
“헤매더라도 주저앉지 마세요. 힘들 때 잠깐 쉬는 건 좋지만, 멈추지는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잖아요?”
보일 듯 말 듯한 가느다란 미소. 웃음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고, 바라라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종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부르셨나요?”
문틈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 사람이 바라라족을 향해 물었다.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어요.”
“예, 알겠습니다.”
가하란은 멀거니 바라라족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다가 벽에 기대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찡했다. 멋쩍게 코끝을 훔치고 뺨을 툭 때렸다.
-초록색 눈을 이어받은 친구. 바라라족이 친구라 칭하는 자들 중에 초록색 눈과 관련된 인물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오크족 주술사와 안면이 있는 건가?
“어느 정도.”
-신비로운 자들이군. 그들은 모든 걸 내다본 건가? 아니지. 모든 걸 봤다면 정확한 걸 말해줬겠지.
옛 황제는 말했다.
인간은 최근에서야 잃어버렸던 미래를 되찾았다고. 확정된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고.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하나 바라라족은 이 만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여전히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써 내려간 새로운 운명인 걸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서 받은 격려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답답함이 쓸려 내려가는 듯했다.
개운하고 홀가분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 더없이 힘이 됐다.
“서두르자. 해 떨어지기 전까지 뭐라도 찾아봐야지.”
-갑자기 기운이 넘쳐 보이는군.
“로키. 사람은 말이야, 역시 사람하고 부대끼면서 살아야 해.”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군.
로키가 누굴 떠올리고 있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유단의 몸을 강탈하고 덴스 교수를 죽인 끔찍한 기계이나, 이곳에서는 유일한 말벗이자 동료였다.
기묘한 관계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왜 그렇게 힐긋 보지?
“나쁘다는 게 뭔지, 그냥 그걸 생각했어.”
-선악은 그럴싸한 지표일 뿐이라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 설전을 벌이면 골치가 아플 테니까.
기록보관서에서 찾은 주소를 떠올리며 도로를 찾았다. 빈 마차가 줄지어 있는 거리를 지나 동쪽으로 향했다.
오밀조밀하게 건물이 올라간 다른 곳과 달리 듬성듬성 방책만 세워져 있는 장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옛 제국 성도에는 싱크탱크가 밀집한 구역이 있다고.
8구역.
제국의 온갖 비밀이 밀집된 지역.
“여긴가.”
가하란은 8구역 외각에 허름한 건물 앞에 섰다.
입구만 덩그러니 지상에 있고 주요 시설은 지하에 감춘 다른 싱크탱크와 달리, 이 건물은 지상에 드러나 있었다.
마치 쓸모없다는 듯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