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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72화 (372/558)

제372화

-2893.

모포를 덮고 눈을 감으려 할 때 로키가 한 말이었다.

“무슨 숫자야?”

-네가 죽인 마수의 수.

“아찔한 숫자네.”

지겹게 사냥하긴 했다. 어느 날은 사흘 밤을 지새우며 전투에 임했었다. 반쯤 눈을 감은 채 조종간을 붙잡고 있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도중에 둔으로 되돌아간 게 32번. 무모한 여정이라 생각했는데, 기어이 도착했군.

로키의 눈에도 하얀 성벽이 보일 것이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5km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는데 일주일이 걸린 적도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디고 전투, 정비를 위해 후퇴. 그걸 수없이 반복한 것이다.

“성벽이 멀쩡하니 그나마 상태가 괜찮겠지? 둔처럼 말이야.”

-알 수 없다. 성도까지 오는 길에 본 도시와 마을이 총 서른둘. 그중 안식처라 부를 수 있었던 곳은 열 곳뿐이었다. 나머진 마수 둥지였지.

“성도마저 그 꼴이라면 진이 빠질 것 같은데.”

-죽을힘을 다해서 청소해라. 응원 정도는 해줄 테니.

목표는 명확했다.

성도 안에 있을 멜멜 클랜을 찾는 것. 하늘석을 조사하다 사라진 연구원 발자취를 찾을 수만 있다면…….

-가하란.

“알고 있어.”

몰려든 잠기운을 떨쳐내며 모포를 옆으로 치웠다. 살짝 열어둔 체임버 밖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에 반응하는 놈 같지?”

-배터리는 잠가둔 상태니 마전기보단 마나에 민감한 놈이라고 봐야겠지.

가하란은 헐겁게 해둔 의족 소켓을 단단히 조였다. 신경망이 연결되며 찌릿한 자극이 왔다.

상단 보관함을 열어 소형 배터리를 꺼냈다.

-5m 후방. 개체수는 하나인 것 같지만 탐지되지 않은 적도 상정해야 한다.

“저 친구들은 잠도 안 자나 봐.”

의족 측면을 매만져 덮개를 열고 배터리를 박아 넣었다.

-권한을 이양하면 도움을 줄 수도 있는데.

“마수 잡은 다음에 나도 잡게?”

-네가 잡혀준다면야.

“그냥 마수의 한 끼 식사로 인생 끝낼게. 그게 속 편하겠어.”

-부디 신체를 보존한 상태로 죽길 바란다. 너덜너덜한 시체에는 정신체를 심을 수 없으니까.

가하란은 픽 웃으며 오토마타가 장착된 체임버 후면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체임버 밖으로 몸을 뺐다.

달빛조차 없는 캄캄한 숲.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도 주변 사물이 식별 불가능할 정도였다.

가하란은 손도끼를 뽑아 든 채 손목을 가볍게 꺾었다.

소리가 들린다. 어둠 저편에 녀석이 있다. 밤 사냥에 익숙한 모양인지 흥분하지 않고 기척을 죽은 채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노련한 사냥꾼이다.

여행 초기에 맞닥뜨렸다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가하란은 왼쪽 눈에 힘을 줬다. 빛과 어둠조차 정보로 변화했다. 가느다란 선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왼쪽 눈으로는 선으로 변한 세계를, 오른쪽 눈으로는 현실 세계를.

교차하는 시야 사이에서 변화하는 지점을 응시했다. 선이 출렁거린다. 정보가 바뀌고 있다.

녀석은 어둠을 무기 삼아 접근해보고 있지만, 정보로 변한 어둠은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손도끼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엄지를 살짝 들어 손잡이에 각인해둔 회로를 건드렸다. 삽입된 배터리가 마전기를 방출했다. 도끼날 끝에서 빛이 번뜩였다.

허공용로의 축소판.

마나를 마전기로 대체하고, 산발하는 마전기를 날 끝에 일시적으로 붙들어둬 열에너지를 확보했다.

사용하고 나면 날이 녹아 뭉툭해져 버리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베기 위한 용도로 제작한 게 아니니까.

으깨고, 짓누르고, 태우고.

두껍고 질긴 마수의 외피를 효율적으로 뚫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틱, 티틱.

도끼날 끝에 부딪힌 먼지들이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열은 빛을 방출하기에 녀석도 보고 있을 것이다.

움츠러드는 게 보인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지금껏 상대해온 마수들은 마나, 그리고 마전기에 광기 어린 집착을 보였다.

거병 발에 밟혀 온몸이 터져나가는 순간에도 주둥이를 길게 뽑아 배터리를 으적으적 씹을 정도였으니까.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기호식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마나와 마전기 앞에서 눈이 돌아간다.

도끼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전기가 소모되면서 뿜어내는 파장이 녀석을 자극할 것이다.

수천 번에 이르는 전투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였다. 여기서 발길을 돌리는 마수가 나타난다면 그게 더 위험했다.

새로운 종의 출현이니까.

가하란은 몸을 낮췄다. 왼쪽 눈이 감지한 정보의 변화. 대기를 찢고 뭔가가 날아왔다.

머리 위를 쓸고 사라진 게 뭔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첫수를 받았으니 대응에 나설 때다.

요격에 특화된 놈인지, 아니면 간을 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려면 역시 붙여야 한다.

달려 나갔다. 단련된 몸은 한 줌의 호흡만으로도 원하는 바를 이뤄졌다.

잔가지에 쓸린 피부가 따갑다.

녀석도 빠르게 이동했다. 거리를 두고 있었다.

촘촘했던 나무가 한순간 사라지며 좁은 공터가 나타났다. 무릎까지 자란 풀 위로 녀석의 눈이 보였다.

전체 길이는 2m 남짓해 보였다. 몸뚱이는 산돼지를 닮았는데, 네 개의 다리는 체구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얇았다.

부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녀석이 주둥이를 벌렸다. 동시에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쏘아졌다. 돌인지, 체내 분비물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이 어깨 위쪽으로 지나갔다.

가하란은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정체 모를 발사체와 수없이 다퉈왔다. 다리에 맞아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고, 어깨를 관통당해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눈의 사용법을 깨우쳤다. 선으로 변한 세계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지만, 현실 세계와 겹쳐보면 신속한 대체가 가능했다.

선이 꿈틀거린다는 건 정보의 변화가 있다는 뜻이고, 목격한 순간 몸을 틀면 되니까.

물론 처음에는 보기만 할 뿐 몸이 따라주지 못했다. 보고도 당하는 경우가 수십 번이나 있었다.

단련하고 적응하고 새롭게 자극을 줘 정체된 감각을 깨부수고 나서야 눈과 몸이 한 쌍을 이뤘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 옆을 지나갔다. 악취도 함께 전해져 왔다.

녀석이 몸을 뒤로 빼는 게 보였다.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냥 방식을 바꾸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오른발 뒤꿈치로 땅을 두 번 툭툭 친 다음, 상체를 숙이며 앞으로 뛰었다.

의족이 마전기를 방출했다. 생성된 파장이 발밑 공간을 채우며 한순간 몸을 밀어냈다.

눈꺼풀이 뒤로 까뒤집히는 듯했다. 속도에 적응하기까지 몇 번이나 자빠지고, 기절했는지 모른다.

15m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녀석도 이동을 시작했지만 이미 사정거리 안이었다.

녀석이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크게 벌어진 입 안쪽으로 징그럽게 꾸물대는 생체기관이 보였다.

훕, 입에 머금고 있던 숨을 안으로 삼키며 녀석의 주둥이를 찍어버렸다.

콰드득!

마수의 뼈가 으스러짐과 동시에 날에 닿은 살점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녀석이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도끼날에 살점이 엉겨 붙어 내빼지 못했다.

얄팍한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더니 그대로 꺾여나갔다.

쿵, 몸체가 주저앉으며 소리를 냈다.

가하란은 붉게 달아오른 도끼날로 마수의 정수리를 다시 한번 내려쳤다.

마수는 예단할 수 없는 생물이다.

인간은 뇌에 충격이 가해지면 쓰러진다. 내부 장기가 뚫리면 위치에 상관없이 곧 사망한다.

하지만 마수는 개체마다 장기의 형태가 달랐다. 몇몇 놈은 소화기관만 덩그러니 있고 중추신경계라 부를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심장이 없는 놈, 심장이 두 개인 놈, 체액 자체가 없는 기이한 놈.

몸이 두 동강 나도 한동안 활동하는 마수도 있었다. 목이 잘린 닭이 피 분수를 뽑아내며 뛰어다니는 것처럼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러니 마수를 사냥할 땐 철저하게 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뼈를 뽑아내는 것이다. 내부 장기가 제각각인 마수들이지만, 마나를 품은 뼈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게 녀석들의 뇌이자 심장이었다.

모노클을 눈에 얹고 갈라진 마수 사체를 바라봤다. 마나의 농도 별로 색이 변화하는 가운데 유독 짙은 보랏빛을 내는 부위가 있었다.

왼쪽 뒷다리.

도끼로 갈라 보랏빛을 품은 뼈를 갈무리했다.

“적당하네.”

심도 4 정도. 소형 배터리용으로 제격이었다.

붉게 달아오르던 도끼날이 거멓게 변했다. 앞뒤로 살펴본 후 벨트에 매달았다.

-아쉽게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군.

체임버로 들어오자마자 로키가 한 말이었다.

“주변에 뭐 없지?”

-없다.

가져온 마수 뼈를 보관함에 넣은 후 눈을 감았다.

“좀 잘게.”

마수들이 기웃거리는 숲 한복판에서 자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일어나라.

로키 목소리에 힘겹게 오른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침침하던 체임버 안이 햇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죽겠네, 정말.”

눈만 살짝 감은 것 같은데 아침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목뒤를 주무르며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습기 가득한 숲의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헛웃음을 짓고 수통에 손을 뻗었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잠은 대체 뭘까?”

-정기 점검이다. 유사정령 역시 오랫동안 깨어 있으면 꼬임이 발생한다. 정기적으로 의식을 차단하고 기억 단자의 주소를 정리해야 오류를 줄일 수 있지.

고개를 털고 조종간을 잡았다.

해가 떴으니 움직여야 한다. 낮에 활동하는 마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밤보다는 적었다.

마나포집을 잠시 멈추고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예상 활동 가능 시간 6시간. 여유가 있었다.

-나타 수도와 제국 성도. 비교하는 재미가 있겠어.

“연구실 밖으로 나온 적 없잖아.”

-수도 전경은 자료로 접했다.

“한정적인 정보잖아. 골목 구석구석에 뭐가 있는지, 그런 건 정리되지 않았을걸?”

-부정할 수 없군.

새하얀 성벽이 진로를 가로막았다. 가하란은 성벽을 따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성문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 안팎으로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일렬로 늘어선 마차와 마차 사이를 바삐 움직이는 검사관들.

대도시인 둔의 입구도 이렇게 번잡하지는 않았다. 성도의 압도적인 물류를 눈앞에서 보니 둔이 작은 도시처럼 느껴졌다.

거병을 움직였다.

환상체들을 지나 성문을 통과했다.

“넓네.”

중앙광장을 향해 뻗은 길 끝에 다시 성벽이 보였다.

몇 번의 증축공사를 했을까.

세운 성벽을 허물고 영토를 넓히고 다시 성벽을 세우고.

수없이 반복한 끝에 제국의 성도가 됐을 것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성도에 거주할 수 있는 건 그만한 능력이 된다는 뜻이다. 자본이든 기술이든 남부럽지 않은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

“다분에서 어제 막 들여온 싱싱한 생선 보고 가세요! 냉장 처리를 해놔서 살이 무르지 않았어요!”

“머무실 숙소를 찾고 계신다면 이쪽으로 오세요! 훌륭한 식사와 아늑한 침대, 서빛 여관에서 여독을 푸세요!”

호객행위가 허락된 거리인지 아주 시끄러웠다.

번잡함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고요한 숲에서 홀로 지내는 것보다 이런 시끌벅적한 도심에 있는 게 안정감이 든다.

일직선으로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활기찬 사람들과 달리 건물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람이 떠난 집은 금방 삭는다.

이 법칙은 성도 건물에도 작용 중이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나타 왕국과 달리 이곳은 미래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곳이니까.

거병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썩은 내가 반겨주었다.

싱싱한 생선을 판다며 신나게 외치는 남자 뒤로 뼈만 남은 생선들이 보였다.

“파리도 있네.”

둔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벌레들이 눈에 띈다. 환상체인 줄 알았으나 손으로 건드니 날아갔다.

마수와 벌레만 사는 세계인가.

체임버 안에 있던 루루가 잠깐 밖으로 나왔다가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갔다.

역한 냄새가 싫은 모양이다.

가하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상가를 둘러봤다.

일단 먹을 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먹을 만한 게 없으면, 다시 밖으로 나가서 가져와야 하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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