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70화 (370/558)

제370화

거병을 마주하는 순간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전고 7m. 그라운드 제로 이후 소형화된 거병에 비교하면 과하게 컸다. 배터리 방식으로 바뀐 후에는 4m를 넘기는 법이 없었는데.

“7m만 되도 저렇게 크게 느껴지는데 예전 거병은 20m를 훌쩍 넘겼잖아. 진짜 무식하게 컸네.”

샬롯이 말했다.

“공성용이었으니까. 그보다 저거 마전기를 감당할 수 있나. 질량이 늘어난 만큼 에너지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을 텐데.”

“언니. 이건 소문이긴 한데, 유단 교수가 커넥터 연결 없이도 충전되는 배터리를 개발했다고 해.”

“그래?”

“뭐야. 반응이 싱겁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마나포집이다.

같은 원리인지 아니면 마나포집과 비슷한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청색이 도색된 거병 앞에 9소대 마법사들이 도열했다. 미래의 학회장이 납셨으니 인사를 해야겠지.

거병이 상체를 숙으며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안에서 군복 차림의 유단이 뛰어내렸다.

“오셨습니까!”

군례를 올리며 유단을 맞이하는 9소대였다.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격납고 앞을 지나가던 다른 군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바라볼 정도였다.

“후방에서 펜대나 잡으시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는.”

“사기 증진. 뭐, 저런다고 사기가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애써 와주신 분한테 안 좋은 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자. 집합이야.”

밀레나는 멀어지는 군인들을 바라봤다.

유단을 반기는 자, 학회 샌님이 전쟁터에 놀러 왔다며 비아냥대는 자, 인사 한번 해보겠다고 기웃대는 자.

확실히 주목받고 있었다.

밀레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이어 부지 내로 들어오는 트레일러를 바라봤다.

신형 거병 열 대가 트레일러에 누워 있었다. 유단이 타고 온 것과 달리 3m 남짓한 표준형이었다. 헤더트럭이 멈추자마자 격납고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3번부터 옮기고! 7번은 점검 필요하니까 내리지 말고.”

유단에게 쏠렸던 시선이 전부 거병으로 옮겨졌다.

밀레나도 트레일러 근처로 걸어갔다. 기술자 한 명이 손을 들며 접근을 막으려다가, 밀레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옆으로 비켜섰다.

“루인도 곧 오버홀 해야 하는데, 신형으로 갈아타는 거 어때요?”

밀레나는 왼쪽을 힐긋 보았다. ‘파르트’가 장갑을 매만지며 말하고 있었다.

“써전 눈에는 어때 보여요? 루인보다 뛰어나 보이나요?”

“직접 타보고 수치를 측정해봐야겠지만, 둔에서 같이 온 보고서가 사실이면…… 이 라인에서 제조된 거병들이 3세대를 대표하게 될 겁니다.”

“숫자야 장난치기 쉽죠.”

“중사님 말대로 숫자야 제멋대로 꾸며댈 수 있지만, 둔에 있는 제 친구 놈의 평가가 아주 좋았습니다. 깐깐한 녀석인데 칭찬할 정도면 말 다 했죠.”

파르트는 유능한 써전이다. 3차 저지선에서 활동 중인 써전들이 파르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그런 파르트의 친구가, 그냥도 아닌 ‘깐깐한’ 친구가 유단의 거병을 극찬했다.

이게 그 정도의 물건인가?

거병을 눈여겨보고 있을 때였다.

밀레나는 뒤를 슬쩍 바라봤다.

“말씀하신 대로 숫자는 얼핏 객관인 자료처럼 보이나, 그것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죠. 그러니 어떻습니까?”

유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가 어떻다는 거죠?”

“기동식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9소대 친구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요.”

“저들은 분명 뛰어난 인재지만, 거병을 다루는 건 별개의 얘기죠. 밀레나 씨가…… 아니, 중사님이 기동식을 치러 주신다면 이곳 분들에게도 신뢰가 생길 테고요.”

유단은 주변에 몰려든 군인들을 보며 말했다.

이곳은 전장이다. 그것도 하루가 멀게 격전이 치러지는 전장.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고 해도 소규모 전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생과 사가 오가는 곳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믿을 만한 동료였다.

유단은 번지르르한 말로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는 걸 택했다. 그것도 나를 이용해서.

“중사님, 한 번 보여주시죠. 실전에서 쓰일 만한 놈인지, 아니면 부품갈이용으로 써야 하는지.”

누군가가 말했다.

유단이 만든 거병에 올라타는 게 꺼림칙하지만,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무엇보다 9소대에 테스트를 맡기는 것보다 직접 타서 실체를 파악하는 게 속 편하다.

“좋아요. 부학회장님의 작품을 망가트리지 않도록 얌전히 타보죠.”

“거칠게 다루셔도 상관없습니다. 튼튼하거든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깁니다.”

유단이 던진 시동키를 낚아챈 후 손목에 찼다.

“바로 앞에 있는 걸 타시면 됩니다.”

트레일러를 박차고 올라가 누워 있는 거병의 체임버를 열었다.

몸을 감싸는 시트가 보였다. 벨트 고리도 네 개나 보였고.

“스톨형이 편한데요. 몸을 들썩거리면서 싸우는 타입이라.”

“조종석은 금방 교체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니, 필렌 님께서 다루시는 거병들은 안전벨트조차 없었죠. 어머니의 방식을 이으셨군요.”

“벨트에 휘감겨 탈출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충격완화도 좋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게 더 좋아요.”

“유능한 거병 기사라면 내부로 전파되는 충격도 잘 흘려 넘기니까요. 하지만 초심자들은 그게 힘듭니다. 그러니 기구의 도움을 받아야죠.”

대화하는 동안 시트 교체가 끝났다. 엉덩이만 간신히 걸칠 수 있는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게 익숙하긴 해.

체임버로 늘어가 시동키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반갑습니다.

“나도 반가워. 정식절차는 아니니 등록은 건너뛰고, 당장 움직일 수 있겠어?”

-인지 통합에 필요한 신체 정보를 입력 중입니다.

시동키에서 저릿한 느낌이 났다.

정수리부터 시작된 미세한 충격이 전신을 훑으며 내려갔다. 이내 온몸을 압박하는 힘이 느껴졌다.

웨이브 겔이 분사된 것이다.

-감각 확장에 들어가겠습니다. 초기 매뉴얼에 따라 설정하시겠습니까?

“일단 4단계.”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거병의 시각 장치와 시야를 공유하기까지 잠시 기다렸다.

-운동지각 활성화에 돌입했습니다.

밀레나는 눈을 떴다.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손가락부터 움직여 봤다. 의지가 이는 순간 강철로 된 마디가 구부러졌다.

전달에 지연이 없다. 아주 매끄러운 신경 전달이었다.

손가락의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인지 통합이 수준급이다.

밀레나는 혀끝으로 입천장을 두드렸다. 무척이나 흥미롭다.

“거기 나와봐요.”

트레일러 곁에서 사람들이 물러섰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허리를 틀고 다리를 땅에 내렸다. 기립을 완료하기까지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밸런싱도 완벽하다는 건가.

“기준 출력이 몇이었어?”

-108 엘론입니다.

“루인보다 30% 정도 향상된 건가. 어처구니가 없네.”

출력 자체를 올리는 건 쉽다. 배터리를 덕지덕지 붙이고 마전기를 아낌없이 뿜어내면 되니까.

하지만 기준 출력은 엄정한 규격 내에서 얻어진 결괏값이다.

격납고 뒤 공터로 걸어갔다. 두 번째 걸음까지는 좌우로 기우뚱거렸으나, 세 번째 걸음부터는 중심축이 잡혔다.

오토마타의 보조시스템도 성능이 좋다. 따로 수치를 입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계산해 반영한 듯했다.

오토마타의 학습 능력이 뛰어날수록 탑승자의 생존율은 올라간다.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손목을 털었다. 마음껏 다뤄도 된다고 했으니 실전처럼 움직일 것이다.

마수와의 전투는 끝없는 이동의 연속이다. 단단한 외장갑으로 전신을 보호한다고 해도, 마수에게 둘러싸이면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뛰고, 뛰고, 또 뛰고.

무게와 속도로 적을 압도해야 하는 게 거병의 전투다.

“감각 확장 7단계. 그리고 운동지각 서포트는 잠깐 멈춰줘.”

-탑승자에게 부담이 가는 옵션입니다. 또한 조종이 난해해질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매번 그렇게 해왔으니까.”

-알겠습니다.

오토마타의 지원이 잠시 멈췄다. 의식하지 않아도 각자 제 역할을 수행하던 모듈이 일시에 정지했다.

신경이 가닥가닥 섰다.

할 일을 알려 달다고 강철 거인이 호소하고 있었다.

조종간에 올린 손을 살짝 비틀었다. 발가락끝부터 목뒤까지, 미세하게 움직이며 전달되는 신호를 몸에 익혔다.

기계가 자동으로 처리해 주던 자잘한 움직임. 그걸 일일이 통제하는 것이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괜찮다.

제대로 다룬다는 건 이런 거니까.

“좋아. 대충 익혔어. 서포트 다시 부탁해.”

-알겠습니다.

“대신, 내가 정지라고 외치면 아까처럼 뒤로 물러나. 전 제어권을 내게 이양하고 환경정보 처리에만 집중해.”

-네, 이해했습니다.

고른 지면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관절 사이로 퍼져나가는 액상근육이 느껴졌다. 감도가 좋았다. 원하는 대로 반응이 돌아오고 있었다.

강철에 의지가 깃든다.

쿵, 쿵, 쿵!

박자감 또한 좋았다. 모듈 간 상호작용이 좋지 않으면 보행이 길어질수록 균형이 흔들리고 엇나가는데, 유단이 만든 거병은 조화가 훌륭했다.

어금니를 살짝 물며 기동력을 높였다. 전신에 가해지는 압력이 올라갔다.

시야가 휙휙 바뀐다.

오토마타의 안내음을 들으며 조종간을 챘다. 직선으로 뻗어가던 거병이 급하게 선회하며 방향을 틀었다.

그 상태로 상체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계속 뛰었다.

처음에는 큰 원을, 점차 작은 원을 그려가며 달렸다. 안쪽으로 쏠리는 힘이 증가했다. 무릎 관절에 최대한의 부하를 걸었다.

“하부 모듈 상태는?”

-적정 수준입니다.

원심력에 대응하는 밸런스도 좋았다. 조종에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기체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달리기를 멈추고 계기판을 봤다.

배터리 온도와 모듈 이격도를 살폈다. 모두 정상범위 안이었다.

밀레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조종간을 놓았다.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어떠셨습니까?

오토마타가 질문을 던져왔다.

“흠잡을 곳 없네.”

-감사합니다.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체임버 하단에 장착된 배터리에서 열기가 훅 올라왔다.

코앞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졌을 것이다.

“어떤가요?”

유단이 말을 걸어왔다.

껄끄러운 상대. 뒤가 구린 남자지만 여기서는 인정해야 했다.

“탐나네요.”

“한 대 선물해 드릴까요?”

“아니요. 양산에 들어가면 따로 제작을 맡길게요. 거래처가 있어서.”

체임버에서 내렸다.

손아귀에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첫 기동인데 루인만큼의 성능을 뽑아냈다. 3세대를 대표할 거란 써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기준 출력이 높던데, 배터리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신 거죠?”

“심도 3 이하의 저급 배터리 효율을 올렸습니다. 물론 소모량이 많긴 하지만, 공급에는 문제가 없죠.”

“그렇군요.”

초고가인 고심도의 배터리 대신 저심도의 배터리를 다량 부착한 걸까. 병렬연결로 인한 출력저하 문제도 해결한 모양이다.

카트시의 동료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걸까?

아니, 유단 자체로도 뛰어난 인간이니 스스로 개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거병대대에 소속된 군인들이 유단 근처로 몰려가는 게 보였다.

유단이 가져온 거병은 총 10대.

몇 소대에 몇 대에 배치될지, 그걸 정하는 건 유단의 재량일 것이다. 지금 가져온 건 군부의 군수품이 아닌, 학회의 물건이니까.

“한 대 달라고 하지. 진짜 줄 것 같았는데.”

옆으로 쪼르르 다가온 샬롯이 말했다.

“저런 거 받아먹으면 체해.”

“부학회장이 그 정도로 쩨쩨한 인간은 아닐 텐데.”

“쩨쩨한 인간은 아니겠지.”

친부나 다름없는 사람을 죽일 정도면 쩨쩨하단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

밀레나는 군인들 사이에 있는 유단을 바라봤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유단과 눈빛이 마주쳤다.

짙은 웃음이 보인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왜?”

“못 볼 걸 봤어.”

“뭐야? 뭔데?”

뭐냐고 계속 캐묻는 샬롯과 함께 막사로 돌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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