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밀레나는 체임버 덮개를 열며 말했다.
-심도 센서에 걸리는 건 없어요. 일단은 안전해요.
루인의 상황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훑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심도 몇으로 보여?”
-정확히 측정해야 알 수 있지만, 대부분 3 이하겠죠.
“어디서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저심도의 마수들이 계속 튀어나와. 너머에 그놈이 있겠지?”
밀레나는 노을에 잠식된 붉은 능선을 바라봤다.
“밀레나 양, 수고했어요. 오늘은 끝난 거 같으니 돌아가죠.”
칼리고가 마른 천으로 검을 닦아내고 있었다. 오늘은 저 검에 몇 마리의 마수가 쓰러졌을까.
“총무님도 거병 조종술을 배우는 게 어때요?”
“몇 번 노력해 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저나 랜더 씨나 쇳덩어리하고는 안 맞나 봐요. 그리고 거병 없이도 밥값은 할 수 있으니.”
밥값이란 말이 이토록 무서운 말이었나. 단순한 주제로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수다쟁이와 전선 한복판에서 맨몸으로 날뛰는 검사.
동일 인물이라는 게 종종 믿기지 않을 정도다.
“좀 유치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테인 씨와 겨루면 누가 우세하냐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눈빛만 봐도 알죠.”
칼리고가 검집에 검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테인 씨가 봐주지 않는 이상 전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저도 지지는 않아요.”
“예? 그게 무슨 뜻이죠?”
“승패라는 게 결국 삶과 죽음으로 결정되는 거잖아요? 전 도망치는 게 무척이나 빠르거든요. 테인 씨가 기를 쓰고 쫓아와도 제 다리는 못 좇아와요. 브라인 님도 혀를 내두를 정도니까요. 아! 튀는 게 최고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서는 칼리고였다. 밀레나는 으쓱거리며 대열을 맞춰 다가온 지원조를 바라봤다.
“해체 작업 서두릅시다! 심도 7 이상의 뼈는 반드시 보고 후 해체해 주세요. 잔류 마나에 다칠 수도 있으니까.”
“예!”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됐다.
3차 저지선.
위룰 도시를 전선 기지로 삼으며 시작된 대 마수토벌전도 어느덧 반년에 접어들었다.
전쟁 초기에는 인명피해도, 마수 쪽 피해도 컸다. 흘러내린 체액이 차올라 시내가 될 정도로.
밤낮이 없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보급부대에서도 인원을 차출해야 할 정도로 치열했던 전쟁이 두 달 전 격전을 끝으로 대치 국면에 들어섰다.
전진도, 후퇴도 없는 전황.
“거기! 그쪽으로 가지 마!”
“저쪽에 사람이 있는데요?”
“저거 사람 아니야. 괜히 가까이 갔다가 다치지 말고 여기 붙어 있어.”
밀레나는 소리 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수 사체를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창을 늘어트린 채 터벅터벅 걷는 여자가 보였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지, 사람이 아닐지도.
이름은 비비넬. 저 여자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유능한 전투원이에요. 하지만 연대를 바라진 마세요. 혼자서 노는 성격이라. 위험해 보여도 도와줄 필요는 없습니다. 보면 알아요. 왜 그런지는.”
비비넬이 전선에 처음 투입됐을 때 칼리고가 한 말이었다. 마수와의 전투가 시작되고 밀레나는 총무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배를 관통했는데, 비비넬은 괜찮았다. 송곳니에 허벅지가 뜯겨 나가 다리가 너덜너덜해졌는데, 비비넬은 괜찮았다.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은 상태로 그녀는 전선을 뛰어다녔다. 전투가 끝나고 복귀했을 때 그녀의 상처는 아물고 있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겨버렸다. 깊게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물론 찌꺼기 같은 호기심을 털어내기 위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총무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다.
비비넬이 무사한 건 마법의 힘이냐고.
총무는 답했다.
어설프게 계를 넘은 대가라고.
계.
협회의 존재 이유.
비비넬을 보며 다시금 경각심을 가졌다. 계 너머에 있는 괴물도 아니고, 그저 계에 살짝 발을 담갔을 뿐인데 재생되는 몸을 갖게 됐다.
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루인에게 인사를 건넨 후 체임버에서 내려왔다. 대기 중이던 기술공들이 다가와 거병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에 나서니 이곳저곳이 말썽이다. 하부 모듈을 몇 번이나 갈았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둔에서 지원이 끊기면 여기도 금방 무너지겠어.”
얀스가 드라이버로 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그럴 일은 없을걸요. 여기서 못 막으면 그다음은 채플, 그 뒤로는 마을 몇 개가 있고 바로 둔이니까요.”
밀레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트레일러에 실린 거병이 들어오고 있었다.
상태가 엉망이었다. 좌측 외장갑이 죄다 녹아 있었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체임버 덮개를 뜯자마자 지독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들 것 가져와! 아직 살아 있어.”
“이쪽 잘라내야 해. 조정석 전체를 들어내는 것보다 그게 빨라.”
체임버에서 실려 나온 용병은 오른팔이 녹아 조종석에 눌어붙은 상태였다.
“오늘은 서부가 난리였어.”
얀스가 눈을 찌푸렸다.
“우리 쪽은 평소와 다름없었어.”
“간을 보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쪽에 진지를 구축하는 건지. 너무 불리한 싸움이야.”
인간은 도시를 떠날 수 없다. 기반을 잃는 순간 대응력을 상실해버리니까.
반면 마수는 거점 이동이 자유로웠다. 온 들판이 녀석들의 식량창고였고, 어둠이 내려앉은 곳이 막사였다.
그게 문제였다.
3차 저지선에서 대치가 길어지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국면이 바뀔 수도 있었다.
녀석들이 둥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인간은 손가락만 빨며 대기해야 한다.
“힘들더라도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는 게 나아. 전장이 한정되면 우리도 화력을 집중할 수 있으니까.”
“반년 이상 한 자리에 머물고 있어. 놈들도 뭔가 있는 거야.”
“마수면 마수답게 그냥 돌격해오면 안 되나? 왜 머리를 쓰는 거야. 골치 아프게.”
밀레나는 머리를 털며 몸을 돌렸다.
“이따가 저녁에 봐.”
“알았어, 언니.”
격납고를 벗어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인 것 같았는데,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털어냈다. 먹고 쉬고 자야 한다. 내일 또 치고받으려면.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밀레나는 반가운 얼굴을 보며 손을 들었다.
“언제 돌아온 거야?”
“방금. 언니는 꼴이 말이 아니네.”
샬롯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질긴 가죽바지가 너저분했다. 상의는 모래를 뒤집어쓴 것처럼 누렇게 떴고.
“욕실 좀 빌려주라.”
“네 방은 어쩌고?”
“이제 막 왔다니까. 이쪽 막사에 자리가 없대. 배정받으려면 좀 기다려야 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나 언니 방에서 신세 질 거야.”
“부탁이 아니라 통보네.”
“그래서 안 들어줄 거야?”
샬롯이 살갑게 웃으며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밥은?”
“아직.”
“먼저 씻어. 네 몫까지 받아올 테니까.”
“정말 언니뿐이야.”
배급소에서 음식을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말끔해진 샬롯이 음식을 받아주었다.
밀레나는 샤워 후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쪽은 어때?”
3차 저지선 맞은편, 마수가 둥지를 튼 에톤 산맥 반대편 진지에 샬롯이 파견됐었다.
“그쪽은 조용해. 뒤쪽은 관심도 없는지 둔 쪽으로만 공격을 퍼붓고 있어.”
“탐색은?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탐색조가 몇 번 들어가 봤는데, 목표물을 발견하진 못했어. 마수와 조우하면 후퇴가 기본 지침이라 깊게 들어가지도 못 했고.”
샬롯이 가볍게 손짓했다.
병뚜껑이 열리며 안에 든 잼이 가느다랗게 뽑혀 나왔다. 공중에서 흐느적거리던 잼이 빵 위에 지그재그로 발렸다.
“산카 님 없이도 잘하네.”
“바람들하고 더 가까워졌어.”
“전투에는 도움 돼?”
“그게 여전히 힘들어. 서포트 형식이라면 바람들도 거부감이 없는데, 마수를 직접 타격하는 건 가끔 반대해.”
“정령들 눈에는 마수나 인간이나 그게 그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잼 발린 빵을 입에 물었다.
“오는 길에 9소대 봤어. 느낌이 이상하더라. 다른 사람들이 날 보면 그런 기분이겠지?”
9소대.
군부 산하로 편제됐으나 소대 실권은 학회가 쥐고 있는 중립 소대였다.
인원 구성은 전부 마법사. 신식 마법을 익힌 젊은 병사들이었다.
특히 두 개의 책을 들고 다니는 마법사가 있는데, 그가 뿜어내는 불덩어리는 마수들의 외피도 단번에 녹여버렸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도 얘기가 오지 않았어? 9소대로 오라고.”
“들었는데 거절했어. 난 타챠 아저씨랑 움직이는 게 더 편해. 무엇보다, 거긴 분위기가 이상해. 대놓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얕잡아보고 으스대는 경향이 있어.”
“신인류라고도 하잖아. 으스댈만한 힘을 지닌 것도 맞고.”
“난 그런 거 싫어. 지닌 힘에 휘둘리면 안 좋은 결말을 보게 되니까.”
샬롯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의 배경을 알고 있기에 밀레나는 입을 살짝 다물어야 했다.
“뭐야. 나 신경 써주는 거야?”
“나도 매너라는 걸 아니까.”
“눈물 나게 고맙네. 근데 괜찮아. 과거 일에 허우적거릴 정도로 애가 아니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였는데. 내 기억에는 말이야.”
웃음을 담아 말했다.
“언니는 몰라. 내가 얼마나 일찍 철들었는지.”
“그랬어?”
“그랬다니까. 근데 말이야…….”
샬롯이 방안을 눈으로 훑었다.
“난 정말 상상도 못 했어. 이런 생활을 하게 될 줄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언니는 나보다 더하겠네. 1등 귀족이었으니까. 평범하게 살았다면 지금쯤 약혼식 끝내고 결혼했을까? 귀족은 좀 일찍 하잖아.”
“스무 살이면 딱 좋을 시기지. 근데 난 세상이 이 꼴이 되지 않았어도 결혼 같은 건 안 했을 거야. 물론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었다면 했겠지만, 정략결혼 같은 건 발로 걷어찼지.”
“엔첸세니까. 그럴 만하겠네.”
“넌?”
샬롯이 잔을 들어 올렸다.
“나? 난 이네빌 언니랑 노는 게 너무 좋았어. 말 타는 것도 좋고, 책 읽는 것도 좋고, 소꿉놀이하는 것도 좋고. 어릴 때잖아? 커서도 그렇게 놀고 싶었어. 뭐, 이렇게 돼버렸지만.”
폭음과 비명.
시체와 사체.
켜켜이 쌓이는 피로를 이겨내며 내일 또 전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생활.
“언니. 베틸 기억해? 2번 격납고 기술자 중 한 명인데.”
“기억나는 것 같긴 한데, 왜?”
“그 오빠가 언니 좋아하는 거 같아.”
“그래? 티 안 내던데.”
“지금은 먼발치서 바라보는 중이지. 2소대 에이스 기사님을.”
“그렇다면 계속 먼발치서 보라고 해. 연애에 낭비할 기력 따윈 없으니까.”
샬롯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소파에 누웠다. 샬롯이 쪼르르 다가와 소파 밑에 앉았다.
“이 전쟁, 끝나기는 하는 걸까?”
“모르지.”
“새로운 타입의 거병이 내일 온다던데, 그게 도움이 되려나?”
“뭐가 됐든 실용적이었으면 좋겠네. 저번처럼 도중에 망가지면 곤란해.”
“유단 교수의 작품이라니까 다르겠지.”
“그래?”
유단.
이제는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다섯 개의 거대 도시가 모여 창립한 ‘타리움’의 두뇌이자, 둔 학회의 부학회장이니까.
그가 사라진다면 도시 방위에 큰 구멍이 생길 것이다.
지금 당장 유단이 저지른 추악한 살인을 들춰낸다고 해도, 수뇌부들은 모른 척할 것이다.
“치우자니 강둑이 무너지고, 냅두자니 찝찝하고.”
“뭐가?”
“그런 게 있어.”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