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화
-감각장치 오류는 아닌 거 같은데, 밖에 사람이 있는 거야?
“그런 것 같네.”
유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은 아닌가 봐.
“혼자 가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따라왔네. 내가 걱정된 모양이야.”
-착하네.
“불필요한 친절이지.”
-표정을 잘 쓰는구나. 보니까 알겠어. 저 인간이 어떻게 될지.
외침이 점점 더 커졌다. 애타는 목소리였다. 당장은 혼자인 것 같지만, 내버려 두면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을 죄다 불러올 것이다.
연구실 밖으로 나가 위를 바라봤다. 절벽 끝자락에 몸을 반쯤 내민 딜런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위험하진 않습니다. 그보다 혼자 오신 겁니까?”
“예. 교수님 보내고 나서 잠자리가 뒤숭숭해 따라왔습니다. 마을을 구해주신 귀인이신데 혼자 보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선한 인간이었다.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선함이, 유단은 달갑지 않았다.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일단 계세요.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풀어놓은 밧줄을 허리에 감고 절벽을 올랐다. 건너편에 있는 딜런에게 다가갔다.
“텅빈 거병을 보고 철렁했습니다. 교수님께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살필 게 있어서 잠깐 내렸습니다. 그보다 이 위험한 곳을 혼자 오시다뇨. 독사한테 물리면 어쩌시려고.”
“사람마다 재주가 하나씩 있다고, 제가 밤눈이 아주 밝습니다. 그리고 밑창이 두꺼운 신에 질긴 가죽을 덧대면 뱀도 그다지 무섭지 않고요.”
신발을 들어 올리며 살짝 웃는 딜런이었다. 유단은 미소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없다. 정말 혼자 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 밑에 있는 건 뭡니까? 문이 달린 걸 보면 파묻힌 유적 같은 걸까요?”
“뭐, 그런 거죠.”
다 본 모양이다.
“교수님께서 찾으시는 게 저거였군요. 땅 밑에 유적이라. 신기하네요.”
딜런이 절벽 밑을 내려다봤다. 유단은 딜런 옆에 섰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온 겁니까?”
“낮에 그런 일도 있고, 뒤숭숭한 사람들 괜한 걱정 끼칠 거 같아 혼자 왔습니다. 말 꺼내면 너도나도 돕겠다고 난리였을 테니까요.”
“잘하셨습니다. 민폐 끼치는 건 싫거든요.”
“민폐는요. 교수님께서 우리 마을을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딜런이 연구실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 중에 산 타는 친구가 셋 있습니다. 절벽도 곧잘 오르고요. 그 친구들한테 부탁하면 저 아래 있는 것들도 쉽게 위로 올릴 수가 있을 겁니다.”
“수고를 끼칠 순 없죠.”
“그런 말씀 마세요. 은혜를 모른 척할 정도로 속 좁은 사람들이 아니니 다들 내 일처럼 도울 겁니다. 예, 그렇고말고요.”
마을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왔다. 거짓말할 이유는 없으니 사실이리라.
유단은 딜런 등에 손을 올렸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밤에 작업하는 건 힘드니까, 일단 돌아가시죠. 날이 밝으면…….”
가볍게 손을 밀었다. 딜런이 엉거주춤하며 절벽을 향해 쓰러졌다.
어, 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아악, 긴 비명이 균열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유단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딜런을 바라봤다.
살아 있을 확률은 없다. 깨끗한 정리였다. 밧줄을 타고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인간 하나가 떨어지는 걸 봤어.
“다행히 혼자 왔다고 하네.”
-자비가 없구나.
“효율을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게 마을 사람한테도 좋고. 입 하나 막는 것과 마을 하나를 지우는 거. 딜런도 전자를 바랐을걸?”
-방금 떨어진 게 딜런이구나. 인간이 죽는 걸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새롭네.
유단은 널려 있는 두개골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자비란 말을 쓰는 게 갑자기 우스워지네.”
-난 연구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어. 살려달라는 말에 살려줬지. 바깥은 불지옥이 됐지만, 이 안은 안전했어.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면…… 식량이 없었다는 것 정도?
유단은 체시에게 연결된 커넥터를 뽑아냈다.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는 건 뿌리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이미 명백한 증거가 있잖아. 사라진 나타. 이보다 더 확실한 결과가 필요해?
“방대한 에너지원을 뜻대로 다룰 수 있는 건가?”
-미묘해. 난 자극을 줘서 분출시켰을 뿐이야. 힘의 방향 따윈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연구한다면 힘을 조종할 수 있고?”
-내 가중연산으로도 결괏값을 도출할 수 없어. 사고실험으론 한계가 있지. 하지만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고, 실질 세계의 현상 변화를 목도할 수 있다면…….
“원하던 대답이야. 연구 환경을 제공해줄게. 협력해줘.”
-협력? 뭐, 나야 너와 노는 게 즐거우니 상관없지만.
배낭 클립에 줄을 연결한 후 체시의 본체를 칭칭 감았다.
-목적. 널 존재케 하는 목적이 뭔지 말해줘.
“줄리어스를 만날 거야.”
-줄은 죽었어. 이미 수백 년이 지났으니까.
“알아. 죽었지. 하지만 그녀의 자료는 남아 있어.”
-자료?
“모든 곳에,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자료.”
-영혼세계. 그래, 넌 거기에 집착하고 있구나.
절벽을 타며 말했다.
“현세계는 한차례 대격변을 거쳤어.”
-대격변?
유단은 체시에게 주변 풍경을 보여줬다. 거대 균열 주변으로 자잘한 균열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표면 상태가 이상한데? 화산 활동과 별개로 생긴 흔적 같아.
“그라운드 제로. 네가 말했지? 뿌리를 자극하면 이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나 말고도 누군가가 뿌리에 손을 댔구나. 그것도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실험을 펼쳤어.
“‘한 인간이 뿌리에 간섭해 참극을 빚어냈다’, 이런 소문만 돌고 있지. 하지만 난 확신했어. 대재앙이 일어나던 날, 난 봤거든. 인간의 의지가 깃든 뿌리를, 그리고 그걸 막아내던 거대한 검을.”
-거대한 검? 거병용 무장을 말하는 거야?
“아니. 하늘을 가리던 검. 그것이야말로 이치를 벗어난 힘이었어.”
-상상이 잘 안되네.
“봐도 이해가 안 될 거야. 넌 감각장치의 오류라고 판단할지도 모르지.”
체임버 안으로 들어가 체시와 거병을 연결했다. 권한설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체시는 당연하다는 듯 거병의 보안체계를 허물고 오토마타의 기능을 넘겨받았다.
-잠깐만. 마나분포도가 이상한데?
“그라운드 제로 이후 변했어. 지각을 뚫고 나온 뿌리 영향인지 마나의 농도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지. 이조차도 안정화된 거야. 당시에는 역류라고 표현할 정도로 심각했으니까.”
-농밀한 마나가 대기 중에 분사됐다면…… 인간들은 버티지 못했을 텐데.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보면 돼.”
-노령인구가 죽었겠네. 인류는 젊은 인간을 중심으로 재편성됐겠고.
“정확해. 하지만 틀렸어.”
-틀렸어?
“신인류라 불리는 자들이 나오긴 했어. 그들은 색다른 방법으로 마법을 쓰지. 마법만큼은 나타 시절보다 발달했어. 하지만, 그런 신인류를 다스리는 건 여전히 늙은 인간들이야.”
-어째서? 힘의 균형이 깨졌는데.
“문화는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닌 것 같아. 인간은 효율보다 중시하는 게 있거든. 무엇보다, 어린 인간은 의존성이 심해. 연약한 동물이지.”
-하긴. 지상의 모든 동물 중 인간만큼 유약한 종은 없지. 특히 유아기는 말이 안 될 정도로 허약해. 몇 개월이면 어미 품을 떠나 사냥에 나서는 게 동물인데, 인간은 몇 년이 지나도 그러질 못하니.
유단은 체임버 덮개를 닫았다.
“물론 그마저도 시간이 더 지나면 바뀌겠지. 자신들이 어떤 힘을 손에 쥐고 있는지, 명확하게 파악한 순간 체제는 뒤집힐 거야.”
-로키 너는 어때? 인간의 몸을 얻었잖아. 기계일 때보다 자유롭게 마나를 쓸 수 있지 않아? 아! 마법은? 심상세계는?
“그걸 지금부터 보여줄게.”
유단은 거병 왼발 적재함을 열어 준비해 온 장치를 꺼냈다.
-그건 뭐야?
“나만의 마법.”
거병 전체에 뻗어 있는 회로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액상근육이 맹렬히 회전하며 거병 전신을 휘감았다. 모듈 연결부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포집.
체시의 감탄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든 장치로 마나가 스며들었다.
금적철을 섞어 만든 단순한 장치. 마나응축봉의 간소화 버전이었다.
“마법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하지만 마음이라 정의할 수 있는 내 안의 무엇이, 마나를 불러 모아.”
기구에 마나가 응집됐다.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연료로도 활용할 수 없고, 내버려 두면 몇 분 안에 마나가 흩어질 것이다.
유단은 장치 하단에 있는 엘리멘트 패널을 작동시켰다. 패널에 새겨진 회로가 일을 시작했다.
“회로가 난반사되는 마나를 잡아둘 거야. 내구성이 좋아서 한동안 별문제 없겠지.”
유단은 절벽 밑 활짝 열린 연구실 문 사이로 장치를 집어 던졌다. 날아간 장치가 바닥 툭 튕긴 후 연구실 안으로 사라졌다.
-대기 중에 놓인 서로 다른 대역의 마나는 상충하는 순간 흩어지며 사라지지만…….
“가시화될 정도로 농밀한 마나는 다르지.”
-저걸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거야?
“애매하면 마법공학이라 할까?”
거병을 움직였다. 거대한 균열에서 1km 정도 떨어졌다. 시간을 확인했다. 15분이 경과했다.
“반발하고 팽창하며 생긴 열 사이로 다시 마나가 침투해. 그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마나가 스스로 형태를 잡아가지. 잠깐이지만 안정화에 들어가는 거야.”
-응축로의 개념이잖아. 하지만 거기서 과부하를 주면…….
체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우우우웅, 묵직한 진동이 발밑을 때렸다. 숲이 흔들리며 짙은 어둠 사이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콰아앙!
한 박자 느리게 폭음이 들려왔다.
금수들의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야심한 숲을 일깨운 굉음은 수초 간 대기를 뒤흔들다가 점점 흩어졌다.
유단은 거병의 눈으로 현장을 확인했다. 주변 일대가 전부 내려앉았다. 거대한 균열로 인해 불안했던 지반에 충격을 가한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리라.
-화려한 무덤이 됐네. 근데 로키, 날 믿어? 난 동지들을 전부 제거했어.
“넌 내게 필요해. 믿음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좋아. 줄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흥밋거리를 찾았으니 협력할게. 근데 영혼세계에 존재하는 자료를 어떻게 이쪽으로 끌어올 건데?
“네크로맨서에게 줄의 위치를 확정해 달라고 할 거야. 길 여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만 해결하면, 나머진 쉬울 수도 있어.”
-쉽지 않을 텐데. 영혼세계는 방대해. 특정 인간의 정보를 찾아내려면 시체 혹은 유품이 있어야 하는데…… 아!
“말했지. 네가 필요하다고.”
-줄과 접점이 있는 물건. 나였구나. 흥미로워. 내가 유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가 줄에게 닿을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실험해 봐야지.”
-정보를 찾는다면, 그 정보를 담아낼 그릇이 필요해. 기계 안에 줄을 넣을 거야?
“아니. 그것도 생각해둔 게 있어. 하지만 어머니를 찾는 게 먼저야. 다른 건 그다음에 준비하면 돼.”
밑 작업은 끝났다.
층에 간섭할 방대한 에너지, 뿌리를 이용할 방법도 손에 들어왔다.
-잠깐. 멈출 수 있어?
유단은 거병을 정지시킨 다음 팔짱을 꼈다. 왜 멈추라고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별. 예쁘네.
“아름답지.”
-저게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진짜 밤하늘이구나. 줄이 사랑할 만해.
체임버 덮개를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짝반짝 작은 별, 체시가 노래를 불렀다.
유단은 떠들썩했던 연구실을 떠올렸다.
그리움.
간질간질한 감정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