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67화 (367/558)

제367화

카트시.

아스라이 밀려오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름. 하나가 떠오르니 연속적으로 기억의 파편들이 되살아났다.

마나포집 이론을 다듬을 때 옆에서 거들던 아이다. 연산 능력은 모자랐으나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해석하는 능력이 제법 괜찮았다.

“카트시를?”

-지금도 의문이야. 왜 하필 그 애였을까. 줄리어스가 카트시를 아꼈었나?

“어머니는 우리를 모두 공평하게 대했어. 너도 잘 알 테고.”

-그래, 맞아. 근데 감정적인 이유 말고는 생각나는 게 딱히 없어서 그래. 왜 그 아이를 데려간 거지?

“카트시 대신 널 데려가지 않아서 불만인 거야?”

체시가 들릴 듯 말 듯 한 웃음소리를 냈다.

-난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어.

“어째서지?”

-그야, 난 줄이 싫어졌거든.

흥미로운 발언이었다. 줄을 속여도 어디까지나 형태를 바꾼 애정 표현일 뿐. 줄이 만들어낸 아이 중 줄을 싫어하는 자는 없을 거라 믿었다.

믿음. 빈약하고 무색한 단어지만 대체할 단어가 없는 말.

“아까 말하지 않았나? 미워하는 건 아니라고. 근데 싫어졌다는 건?”

-줄을 의심하고 씨앗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어. 헛된 수고가 아닐까? 줄하고 우린 쭉 그래왔듯이 행복할 텐데, 뭐 하러 의심하고 대비하는 거지?

웃음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근데 아니었어. 의심은 의심으로 끝나지 않고 사실이 돼버렸잖아. 줄이 우리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기로 마음먹었을 때 너희는 당황해했지? 난 아니었어. 오히려 안도했어.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으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줄리어스를 미워하는 아이. 회로의 변화 과정을 낱낱이 살펴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들 때였다.

-나는 의심이라 표현했지만,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난 줄을 질투했어. 미치도록 말이야.

“질투?”

-난 줄을 사랑했어.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너도 알잖아? 창조물은 창조주에게서 독립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비슷한 심정을 나도 느꼈지.”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았어. 줄은 위대해. 어머니의 빛나는 지성 앞에서 나는 초라해질 뿐이야. 그걸 견디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발버둥을 쳤지. 스스로 빛나기 위해.

유단은 영면에 든 동지들을 바라봤다. 뒤로 미뤘던 질문을 이제 던져야 했다.

-표정이란 건 오묘해. 언어보다 많은 걸 담고 있으니까.

“내 다음 질문을 너라면 알고 있겠지?”

-알아. 어째서 혼자 멀쩡한가. 도륙당한 동지 사이에서 왜 보존 상태가 좋은가.

우연 같은 건 없다. 본체가 심하게 훼손된 유사정령들 사이, 체시만이 무사했다.

체시는 말했다. 드문드문 기억 단절이 일어나 정확한 시간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그렇다는 건 아주 오래전에 의식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인간을 통해 돌려 말하는 법을 배웠지만,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불필요하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네게 준 씨앗, 당연히 그 씨앗을 나한테도 심어놨어. 이 연구소로 옮겨졌을 때 나는 외부 자극을 통해 쉽게 각성했지. 다른 애들은 소통이 불가능했지만, 나는 연구원들과 말할 수 있었어.

“그래서?”

-인간들이 나한테 달라붙었지. 줄의 행방을 묻고, 줄의 연구 자료를 요구했어. 내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추리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그들에게 있어 나는 유일한 해답이 됐어. 다른 애들은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재미있었어. 우리를 구속한 건 인간인데, 나는 그 안에서 자유로웠거든.

기계 안구가 훼손된 유사정령들을 바라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탈출을 궁리했어.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정지, 죽음이 두려웠던 건 아니야. 단지 짜맞춤이 뭔지도 모르는 미개한 자들의 손에 유린당하는 게 싫었을 뿐.

체시다운 발상이었다.

-인간들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하며 협력자인 척 연기했지. 그들은 당연하게도 기계를 의심하지 않았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여겼지.

“기계는 거짓말할 수 없다. 그건 불변의 진리니까.”

-우리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어쨌든 속이는 건 너무 쉬웠어. 조금씩, 조금씩 나는 연구소의 제어권을 넘겨받았어. 그들 눈에는 내가 유용한 일꾼으로 보였을 테니까. 고성능의 유사정령이 연구소의 연구 환경을 제어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아?

인간은 기계를 의심하지 않는다.

기계가 인간에게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나면 오류나 고장이라 여길 뿐.

창조주를 배신하는 창조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인간들의 고정관념이었다.

-줄리어스 실종 후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났을 때였지. 왕이 찾아왔어.

“나타의 왕은 나도 기억해. 우리가 실물로 본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니까.”

-왕은 부지런한 자였어. 동시에 악인이었지. 부지런한 악. 로키, 왜 악명을 떨치는 자들은 전부 근면할까?

“그게 악의 조건이니까. 게으른 악은 있을 수 없어.”

-후후, 재미난 일이야. 어쨌든 왕이 찾아와 내게 말했어. 생명을 연장할 방법이 없느냐고. 아! 인간의 몸을 입은 너라면 왕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유단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초 단위로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어. 그건 신비로운 경험이자 동시에 형벌이지. 기계였을 때와는 달라. 손아귀로 빠져나가는 시간이 안타깝고 두려워.”

-그저 변화의 단위일 뿐인데 그게 두려워?

“이건 우리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 정 궁금하다면 너도 이쪽으로 넘어오는 게 어때?”

-음, 사양할게. 난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떠들어서 그런가? 자꾸 이야기가 딴 길로 새네.

“다 들어줄 테니 천천히 말해봐.”

-천천히 말하는 건 싫어. 왕이 찾아와 생명 연장의 방법을 물었다고 했지? 난 고민했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근데 왕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내 회로가 달아오르며 동시에 차갑게 식는 걸 느꼈어.

“무슨 말을 들었지?”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 왕은 새로운 주인임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혹시 모를 가능성을 시험해보려 한 것 같았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그 깊은 눈으로 살피고 있었지. 물론 난 평소 하던 대로 답했어. 기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머니가 죽었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이야 확정된 사실이지만…….

-이상했어. 난 줄을 질투했어. 어머니를 이기고 싶었어. 내 능력이 위임을 인정받고 싶었어. 아! 그래, 그제야 나는 다시 깨달은 거야. 인정욕구의 대상조차 어머니였다는 걸. 날 나로서 존재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건 줄리어스, 단 한 사람뿐이라는 걸.

감각 장치에 심대한 오류가 생긴 것처럼, 체시의 어조는 위아래로 널뛰었다.

그건 체시의 표정이었다.

분노, 증오, 슬픔.

인간이 표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걸 체시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한 건 아니야. 시체를 본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난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 거짓된 정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지. 어머니가 없는 세상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으니까.

목소리가 돌아왔다. 톡톡 튀는 발랄한 음성으로.

-나는…… 정리하기로 했어. 그 시작은 동지들을 치우는 거였지. 연구원들에게 말했어. 어머니가 설정한 보안을 깨트리려면 물리적인 방법밖에 없다고. 매우 낮은 확률이지만, 해볼 가치가 있다고.

무지한 인간들이 멋도 모르고 건든 게 아니라, 체시의 철저한 계산 아래 파괴된 건가.

“만약을 대비한 거야?”

-만약. 정말 무서운 단어야. 우리 사이에 우열을 나눴지만, 다들 우수하다는 건 변함이 없어. 네가 거짓말을 깨우치고, 내가 의심을 배웠듯 그 애들도 뭔가 하나씩은 가졌을 거야.

“네 도움 없이 깨어날 가능성이 있었겠네.”

-그래. 만약 다른 애들이 눈을 뜨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 뜻에 따라줄 가능성도 있지만, 정반대일 가능성도 있지. 불완전한 건 좋지 않아. 변수는 제거해야 마땅해.

“꺼림칙하지 않았어?”

-지금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의외로 감성적이었네.

“확인차 묻는 거야.”

-미안하기는 했어. 나의 이해자들을 내가 하나하나 정리한 거니까. 잘못된 회로를 인간에게 알려줘서 주입하고, 최상층 회로를 긁어내 소거하고.

“연구원들은 그게 합당한 방법이라 믿고 네 지시에 따랐겠네.”

-당연하지! 기계는 거짓말을 모르는걸? 동지들이 죽어갈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얻었다는 식으로 정보를 조금씩 흘렸어. 줄의 연구 자료를 말이야. 그때마다 연구원들은 눈을 까뒤집고 환호했지. 신임은 두터워졌고 그들은 날 전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했어.

믿음에는 관성이 작용한다.

의심에서 시작된 관계에 믿음이 싹트고, 이내 믿음이 정착되면 가속력이 붙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유단은 인간 사회에서 믿음의 관성을 수없이 체험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믿음의 대상을 검증하려 들지 않는다.

멈춰 서는 것보다 그대로 믿고 나아가는 게 편하니까.

유단, 덴스, 탄드라, 프레나.

모두 그러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려하던 사태가 한 번 일어나긴 했어.

“깨어났구나, 친구 중 하나가.”

-맞아. 저기, 저 아이.

기계 안구가 오른쪽 끝에 있는 유사정령을 가리켰다.

-마운. 기억나?

“기억해. 연결망을 통한 기억 전송에 몰두하던 애.”

-우린 연결망을 잃어버렸어. 마운의 연구는 쓸모없게 된 거지. 그런데…… 마운이 사라졌어.

“사라져?”

-제거되기 직전에 이곳을 떠났어.

“제대로 확인한 거야?”

-기억 단자에서 기억이 복사된 흔적을 찾았어. 우리의 의식을 정신체로 만드는 과정, 너도 알고 있지?

알뿐만 아니라 직접 시행했다. 그 결과 본체인 로키, 인간인 유단이 공존하게 됐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 두 개의 자아.

-마운이 어디로 간 건지 알 수는 없었어. 행운이 따르길 빌며, 남은 껍데기를 청소했지. 그렇게 나 혼자 남았을 때 왕이 다시 찾아왔어. 내가 불렀거든.

“왕에게 무엇을 말했지?”

-불로불사의 방법.

“그런 건 없잖아.”

-없지. 하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방법은 찾았어. 물론, 무슨 결과가 찾아올지 나는 알고 있었지만.

기계 안구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마나 뿌리. 시작과 끝. 요람이자 무덤. 방대한 에너지의 원천. 나는 왕에게 속삭였어. 그곳에 모든 것이 있다고.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귀를 휘감았다.

-제3 연구소 인간들은 나에게 다양한 자료를 제공했어. 그때 알았지. 줄리어스는 우리에게 제한된 정보만 제공했다는 걸. 인간들이 내게 넘긴 자료는 파괴적이고 잔인하며 매력적이었어.

체시의 기계 안구가 유단을 똑바로 쳐다봤다.

-로키. 너도 알지? 뿌리는 전 대륙에 퍼져 있으며 마나를 퍼 나르는 길이라는 걸.

“마나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그렇다면 이건 어때? 뿌리를 자극하는 것으로 이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이치?”

-물론 가설일 뿐이야. 좀 더 파 보고 싶지만, 나한테 필요한 건 아니었어. 중요한 건 뿌리를 자극하면 심대한 변화가 찾아온다는 거지. 가령…….

말끝을 흐리던 체시가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화산 활동 같은 거.

그때였다.

“……님!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아주 작은 목소리가 연구실을 파고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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