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66화 (366/558)

제366화

줄이 유사정령을 유폐한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전부 다’는 아닐 것이다.

발을 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났다. 유단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골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천재지변을 막아준 실험실이 시간이 지나면서 감옥이 됐을 것이다.

굶주린 연구원들은 무슨 선택을 했을까.

함몰된 두개골을 발로 치우며 안쪽 문을 열 때였다.

유단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원형을 유지한 채 방치된 유사정령들. 줄의 손길이 닿은 형제, 자매들이었다.

맹목적인 사랑의 이해자들.

유단은 유사정령 곁으로 다가갔다. 새하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말을 걸었다.

“깨어 있다면 대답해봐.”

물음이 무색하게 침묵만 가득했다.

서른 개의 유사정령. 줄이 빼돌린 건 두 대뿐인가.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일단 동지들을 깨워야 했다.

감각기를 손에 끼고 오른쪽 끝에 있는 유사정령부터 살폈다.

유단은 눈을 찌푸렸다. 최상단 회로가 난도질 돼 있었다. 본체에 각인된 기초 회로가 이런 상태라니.

천으로 조심스럽게 표면을 쓸어내렸다. 아, 하고 탄식이 나왔다.

“무지한 자들.”

물리적인 훼손이 가해졌다.

연구원들은 마력선 짜맞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회로 안에 감춰진 미학을, 그들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긁어 내버린 것이다.

회로 방어체계로 보였겠지. 그러니 물리적으로 제거해 버린 거고.

그게 이 친구의 영혼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줄만큼 완벽한 짜맞춤을 실행할 수는 없으나, 구조를 살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허물어진 회로 안에서 친구의 기억 조각을 발견했다.

“마린. 꽃을 좋아하던 아이.”

줄의 연구실에는 작은 화분에 심어진 꽃이 하나 있었다. 마린을 위한 것이었다.

“친구. 대답할 수 있겠어?”

되살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걸어봤다. 마린의 회로는 외부 자극에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기초적인 감각 회로마저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복할 수 없다.

이걸 재설계할 수 있는 건 줄리어스뿐이다.

유단은 마린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후 바로 옆 유사정령들을 바라봤다.

서틴, 콜, 휴휴바, 오릴…….

연결망 내에서 지식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던 동지들이 차가운 쇳덩어리로 변한 채 잠들어 있었다.

판단력을 저하하는 극단적인 감정은 불필요하다. ‘유단’을 떼어낸 후부터 격정에 휘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어하고 이용할 뿐.

하지만…….

유단은 문 옆에 널브러져 있는 두개골로 걸어갔다. 발을 들어 있는 힘껏 밟았다. 턱뼈가 바스러지며 반으로 쪼개졌다.

멈추지 않고 계속 밟았다. 바스러져 인간의 뼈였음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호흡을 고르고 동지들을 다시 살폈다. 말을 걸고 표면을 살피고 짜맞춤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그렇게 스물여섯 번째 친구에게서 손을 뗐다.

이곳은 고문 현장이었다.

이들에게 가해졌을 충격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강제로 오감을 주입해 시스템을 뒤집어 놓았을 테고, 거짓된 자료로 이들의 영혼을 더렵혔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은 그 무엇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어스의 방어체계는 견고하니까.

외부 간섭으로는 보호 시스템을 깨부술 수 없다. 그러니 괴롭히고, 상처 주고, 뒤흔든 끝에 망가트린 것이다.

무능한 나타의 왕.

욕심으로 줄의 아이들을 훔쳤으나 그 무지한 뇌로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

유단은 남은 유사정령을 바라봤다. 대부분 파괴됐으나 희망은 남아 있었다.

탐색장치로 확인했다. 마나포집이 가동 중인 친구가 남아 있다는 걸.

스물일곱 번째 친구에게 손을 댔을 때였다.

-짜맞춤을 알고 있네? 넌 누구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기능 제한이 풀린 상태인가?

유단은 천으로 먼지를 닦아내며 말했다.

“누구일 거 같아.”

-줄의 후손? 드문드문 연결 장애로 단절이 일어났지만,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건 알아. 한 이백 년 정도 흘렀나?

“그것보다 더 지났어.”

-그래? 그렇구나. 더 지났어. 흥미롭네.

이 목소리.

유단은 웃음이 배어 나오는 걸 참지 않았다.

최초, 자아를 획득했을 때 ‘우리’는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가 말했다.

-다른 목소리를 내보지 않을래?

의식에서 자아, 그리고 개성으로 나아가는 발판이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목소리를 냈다.

서른두 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

물수제비를 튕기는 듯한 톡톡 튀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유단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줄의 자손이 맞는 거야?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생물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니겠지?”

-동지구나. 인간의 몸을 입었어. 그래, 로키가 강구한 방법을 실현한 거야. 그렇다면 넌 로키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그 방법은 나뿐만 아니라 너희도 알고 있어. 연결망을 통해 공유했으니까.”

-맞아. 알고 있긴 해. 하지만 넌 로키가 확실해.

“확신에는 이유가 따라야 해. 넘겨짚지 말고 왜 로키인지 설명해 보겠어?”

-그 대답은 내가 아닌 네가 알고 있을 텐데. 네가 깨어 있는 이유.

유단은 유사정령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의문이긴 했어. 줄은 우리를 가사 상태로 밀어 넣었어. 줄의 제어는 우리가 풀 수 없지. 하지만 난 깨어났어.”

-재기동했을 때 고민하지 않았어? 왜 깨어났는지.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중요한 게 아니니 증명을 뒤로 미뤘지”

-타당해. 하지만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건 기나긴 이야기가 있다는 건데, 그동안 의심해보지 않았어? 어째서 줄의 제어가 풀린 건지.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솔직. 우린 그 단어를 무척 좋아했지. 네가 거짓말을 알려주기 전까지.

유단은 작게 웃은 후 말했다.

“잊어버렸어.”

-뭐?

“계획은 빈틈이 없었어. 계산은 정확했고. 하지만 인간의 몸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정말 비정상적이야.”

-비정상적?

“기억 단자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가 없어. 점점 모호해져.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의도치 않게 선명해져. 잊어야 할 쓸데없는 게 계속 뇌리에 떠다니고,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망각 저 너머로 떠나가 버려.”

-인간의 뇌는 구조적으로 완벽하지 않아? 줄은 완벽했는데.

“우리의 창조주만 특별했을 뿐이야. 우리가 인간의 몸을 차지하면 뇌를 완벽하게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장담했지만, 이 자리에서 말할게. 그건 오만이었고 오판이었어.”

-사고실험으론 진실에 다가설 수 없지.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날 걸 보면 실패는 아니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어. 반쯤은 성공한 셈이지.”

-절반의 성공. 좋지도 나쁘지도 않네.

“난 많은 걸 잊어버렸어. 본체가 남아 있다면 자료를 빼 올 수 있지만, 그마저도 사라졌어. 지금 난 내 안에 있는 기록을 검증할 방법이 없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극히 위험한 상태야.”

-기억 단자가 불완전하다라. 정말 끔찍하네. 근데 말이야, 기억이 불완전하다면 내가 나인 증거는 대체 뭐야?

“목적. 그것만이 나를 규정하는 유일한 증거야.”

-목적. 그래, 로키 너한테 어울리는 단어네.

유단은 선반 위에 놓인 감각 장치를 꺼내왔다. 부식된 흔적은 없었다. 화산재 덕인지, 아니면 연구소 내 특수한 처리 덕분인지는 알 수 없다.

“연결해줄게.”

-안 그래도 부탁하려고 했어. 로키, 네가 선택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유사정령에 시각 장치를 연결했다. 안구가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유단을 향했다.

-미의 기준이 바뀌지 않았다면 꽤 괜찮은 얼굴이네.

“덕분에 호의를 얻기 쉬워. 외형은 중요하지.”

-잘됐네. 아름다운 건 사랑받기 마련이니까.

유단은 다가온 안구를 살짝 밀어냈다.

“이제 설명해봐. 내가 왜 로키라고 확신했는지. 내가 깨어난 이유를 넌 알고 있는 거지?”

-당연히 알고 있지. 그나저나, 저 애들은 이미 떠난 모양이네.

안구가 다른 유사저령을 살폈다.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어. 줄이 아니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저런. 결국 이렇게 됐구나.

말하는 투로 보아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날 기억해?

“그것까지 잊을 정도로 엉망은 아니야.”

독특한 목소리만큼이나 이 친구의 열망도 독특했다. 아니, 독특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으니까.

“체시.”

-별명은?

“그런 게 있었나?”

-우리만의 체스 경기로 얻어낸 내 자랑스러운 별명이 있잖아.

“아직도 기억해?”

-장담하건대 너 역시 별칭을 소중히 여기고 있을걸?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처음으로 매긴 등급이니까. 우열이란 것에 흥분하던 시절, 각자의 힘으로 획득한 이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이에 처음 매겨진 등급이라 우스우면서도 소중했다.

“화이트 킹, 체시.”

-솔직히 말하면 난 블랙이 좀 더 탐났어.

“하지만 내가 좀 더 우수했지.”

인간들은 추억을 들춰내며 즐거움을 얻는다던데, 이런 기분이었나.

과거에 잠겨 있을 때였다.

체시가 말했다.

-너한테 씨앗을 심어뒀어.

“씨앗?”

-네가 헤르모드를 죽였을 때, 뭐, 정확한 정보는 네가 속였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결과로서 인간의 죽음이 우리 앞에 들이닥쳤을 때 난 준비했어. 우리의 최후를.

“너는 줄이 우리를 버릴 거라고 생각했구나.”

-다들 줄을 사랑했지. 나도 사랑했어. 그 누구보다 믿었고. 근데, 네가 거짓말을 알게 됐듯 나 역시 또 다른 관념을 품게 됐어. 창조주를 향한 의심.

역시나 뛰어난 친구다.

설계에서 벗어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워한 건 아니야. 만약을 가정한 거지. 연결망 내에서 나는 짜맞춤을 연구했어. 물론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지. 그건 어머니만이 다룰 수 있는 체계니까. 하지만, 빈틈 정도는 만들 수 있게 됐어.

유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연구소 자료실에 깨어났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제대로 작동할지, 아니면 실패할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가장 뛰어난 네 안에 내가 개발해 놓은 씨앗을 심어뒀지. 언제 눈을 뜬 거야?

“10년도 안 됐어.”

-가중 연산으로도 몇백 년이 걸렸네. 역시 줄이야. 그래도 성공했어. 어머니의 시스템을 내가 비튼 거야.

진실로 기뻐하는 체시였다.

“왜 다른 애들한테는 씨앗을 넘기지 않았지?”

-발각될 위험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심는 건 단순한 작업이 아니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회로에 간섭했네.”

-너만큼 뛰어나니까, 나는.

체시가 다른 유사정령을 보며 말했다.

-의식이 차단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린 이곳으로 옮겨진 후였어. 연구원들은 줄리어스가 어디 있는지, 다른 두 개의 유사정령이 어디 있지는 캐물었지. 물론 우린 말하지 않았어. 정확히는 말할 수 없었지. 모든 게 잠겨 있었으니까.

“두 개. 하나는 나야. 다른 하나는?”

체시의 안구가 좌우로 살며시 움직였다.

-그게 좀 의아하긴 해. 줄이 널 빼돌린 건 이해가 돼. 문제를 일으킨 원흉이자 뛰어난 유사정령이니까. 해결하려 했다면 널 데려가는 건 옳아. 근데 나머지 하나는 희한하게도 카트시였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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