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화
“일단 차라도.”
딜런은 차를 내려놓은 후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창가에서 기웃거리던 아이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아저씨, 아저씨. 누구예요?”
“용병이래요?”
공포에 질려 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한 소리 하려다가 딜런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벌벌 떨면서 입을 꾹 다무는 것보다는.
“아저씨도 몰라. 하지만 귀한 손님이니까 너희들도 얌전하게 있어.”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아니면 저거 구경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건요?”
아이의 손가락 끝이 거병을 향했다.
“얌전히 있으면 아저씨가 물어볼게. 그러니까 다들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 괴물 치워야 한다고.”
“……아센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다들 어른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알겠지?”
잘 다독여서 돌려보냈다. 겁을 먹는 것도 금방, 잊는 것도 금방. 그게 아이들의 성질이겠지.
“죄송합니다. 애들이 시끄럽게 굴었죠?”
“저만할 때는 조용한 게 오히려 이상하죠. 아, 차는 잘 마셨습니다.”
빈 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몇 번을 말씀드려도 모자라겠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마을이 살았습니다.”
“마수의 시선을 끌어주신 덕에 사냥이 수월했습니다.”
오줌을 지리며 멍청하게 서 있던 게 전부지만,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딜런은 멋쩍게 웃었다.
“유단 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마을은…… 상상하기도 싫군요.”
마수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면 도망치던 마을 사람들은 죄다 먹잇감이 됐을 터였다.
“제가 조금 더 빨랐다면 돌아가신 그분도 구해낼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하다뇨. 그런 말씀 마십쇼. 그 친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결과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벌기도 했고…….”
딜런은 입을 다물었다. 아른거리는 친구의 비명이 입 안에 단어와 뒤엉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훌륭하신 분이셨어요. 그런 용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아닌데.”
“하하, 그놈이 배짱 하난 정말 좋았죠. 농담처럼 마수가 나타나면 자기가 다 막아내겠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격식 차리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낸다고 한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풀이 죽은 채 손님을 대할 수도 없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귀인을 맞이해야 한다.
“정리되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보겠습니다. 다들 유단 님을 뵙고 싶어 하거든요. 그리고 사례금 얘기도…….”
“돈은 괜찮습니다.”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도 다 압니다. 거병을 움직이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응당 사례를 해야죠.”
“그러면 돈 말고 다른 걸 받도록 하죠.”
“다른 거요?”
“주변 지리에 빠삭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저 아이들한테 물어보는 것도 좋겠네요.”
유단이 창밖에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근방이라면 제가 잘 압니다. 터를 잡을 때 구석구석 살펴봤거든요. 근데 주변에 특별한 거라고는…….”
“제가 찾는 건 땅 밑에 있을 겁니다.”
“땅 밑이요?”
유단과 함께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몰려들어 유단 앞을 막아섰다.
“저 친구와 놀고 있을래?”
유단이 거병을 가리켰다. 덮개가 열린 채 내부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거병.
“아이들이 이것저것 만져볼 텐데, 괜찮을까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제가 아니면 기동하지 않거든요. 대화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지만.”
거병으로 아이들이 몰려갔다. 마을 사람들도 거병에 모여들었다.
“가시죠.”
딜런은 유단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 지형을 떠올렸다. 주춧돌이나 건물 기둥 남아있는 곳 혹은 건물터로 예상되는 곳이라.
유단과 함께 몇 시간을 돌아다녔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유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반구형 물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유단이 말해줬다.
“탐색 장치입니다. 땅 밑에 있는 걸 찾아내죠.”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서서히 기울어 능선을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노을이 지면 금방 어둠이 깔린다.
안전하다고 여겼던 마을에 마수가 들이닥친 이상,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신호가 잡히긴 하는데 특정하긴 어렵네요.”
유단이 탐색 도구를 챙기며 말했다.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헛다리만 계속 짚었네요.”
“얻을 만큼 얻었습니다. 저도 단번에 찾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거든요.”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마음 씀씀이도 고왔다. 사람을 구하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다니.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드문 인간형이었다.
용병 같지는 않고.
사냥꾼일까?
하지만 마수사냥꾼들은 팀을 이뤄서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실례되는 질문인 건 알지만, 어디서 오신 건지…….”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소개조차 안 했군요. 전 둔 학회 소속입니다. 재주에 맞지 않게 특임교수를 맡고 있고요.”
“세상에, 교수님이셨군요. 그것도 둔 학회의 교수님.”
둔.
그라운드 제로 이후 옛 성도의 지위를 획득한 거대 도시 국가.
그곳 학회의 명성이야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귀가 따갑게 들었다.
도시마다 설치된 분배소도, 인류의 생활양식을 바꿔버린 배터리도 모두 둔 학회에서 나온 물건이다.
대륙의 천재들이 득실댄다는 학회에서 젊은 나이에 교수라. 게다가 거병까지 손수 조종하는 대담성과 실력도 갖췄다.
“정말 귀한 손님이 저희 마을을 찾아주셨네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침울해하는 주민들을 다독인 후 유단을 재차 소개했다.
아이들은 뭣도 모르고 좋아했고, 성인들은 이웃의 죽음을 잊기 위해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동참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먼저 간 친구를 애도하는 건 모두가 잠든 후 혼자 하면 될 일이다.
오십여 명의 마을 주민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유단을 가운데 앉히고 음식을 먹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사소한 잡담에서 시작해,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부터는 마을의 대소사를 상담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유단은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으스대는 것 없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지식을 베풀었다.
밤이 무르익어갈수록 유단에 대한 신임 역시 높아져만 갔다.
정말 신의 사자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딜런은 아껴둔 발포주를 잔 가득히 따라 유단에게 주었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분배소 설치가 가능하다는 겁니까?”
“둔에서 이미 준비 중입니다. 도시 중간 중간 있는 이런 마을들이 각 도시를 잇는 중계점이 될 겁니다.”
“분배소가 생기면 다양한 마법공학품을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저희도 엉성하게나마 거병을 운용할 수 있겠군요.”
“모든 인구를 성벽 안에 두는 건 불가능하죠. 마을들이 자구력을 갖춰 살아남고, 주변 도시와 연계해 영토 내 마수를 몰아내는 것. 둔을 비롯한 거대 도시들이 이런 미래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살기가 팍팍해져도 이런 사람이 생김으로 인해 희망이 이어지는구나.
딜런은 유단이 낮에 찾던 지형에 대해 언급했다.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며 아는 바를 말했다.
“지금 말한 곳들은 낮에 다 가봤는데.”
그때였다. 부모 곁에 바짝 붙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아이, 벤이 손을 슬그머니 들었다.
“저 희한한 걸 보긴 했어요.”
“어디서?”
“저쪽으로 쭉 가다 보면 되게 큰 바위가 나오는데…….”
벤이 가리킨 곳을 확인하자마자 벤의 부모가 당황하며 벤을 바라봤다.
딜런도 살짝 인상을 썼다.
“왜 그러시죠?”
“독사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아이들한테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한 곳이거든요. 마을 사람들도 그쪽으로는 가지 않고요.”
유단이 벤이 손가락질한 곳을 바라봤다. 마을 남쪽,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숲.
“어떤 걸 봤니?”
유단이 벤에게 질문했다.
“엄청 큰 균열이 있는데, 그 밑에 빤짝거리는 게 있었어요. 근데 딱 한 번 본 거라 확실하지는 않아요.”
유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시게요?”
딜런은 걱정이 됐다. 이곳에 터전을 잡았을 때 멋모르고 남쪽 숲에 들어간 장정 둘이 뱀에게 물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대비책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단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설마 지금 가시게요? 이 밤에?”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요.”
“저,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쪽까지는 들어가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유단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는 게 더 안전합니다. 저 친구를 가져갈 거니까요.”
거병을 타고 가면 괜찮겠구나.
유단의 말대로 호의랍시고 따라갔다가 발목만 잡을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은빛 거병이 움직였다.
딜런은 멀어져가는 거병을 향해 기도했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 * *
큰 바위.
유단은 확장된 시야로 주변을 살폈다. 아이가 말한 거대한 균열이 보였다.
-지반이 안정돼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기해.”
체임버 덮개를 열고 내려갔다.
입을 쩍 벌린 균열 아래를 살폈다. 절벽을 훑고 내려가던 시선이 중간에 붙들렸다.
달빛이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탐사 장치를 땅에 내려놓았다.
마나 포집에 사용되는 특정대역의 마나가 감지됐다.
찾았다.
유단은 밧줄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거병 다리에 감고, 다른 하나는 나무 밑동에 걸었다.
밧줄 두 개를 클립으로 묶어 하나로 만든 후 허리에 매었다.
장력을 확인한 뒤 절벽을 내려갔다. 7m쯤 내려오니 익숙한 문양이 눈에 보였다.
나타 왕국의 문양.
달빛을 반사시킨 보강판을 더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그곳이 맞다면…….
왼쪽으로 이동했다. 벽을 찍는 픽으로 흙더미를 계속 쳐냈다.
틱, 소리를 내며 먼지만 피어오르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
유단은 몸을 틀며 눈을 감았다.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거센 진동이 밧줄을 통해 전해졌다. 몸이 좌우로 휘청이다가 이내 안정됐다.
흙더미가 쓸려나간 절벽.
매끈한 보강판 사이로 출입구가 보였다.
자료로 본 제3연구실이 확실하다. 화산 활동으로 왕국은 사라졌지만, 지하에 만들어진 이 실험실만큼은 살아남았구나.
세월에 짓눌렸음에도 출입문은 비틀리지 않았다. 마나가 끊겨 잠금장치가 해제된 문. 살짝 힘을 주니 부드럽게 밀렸다.
안쪽은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화산재가 스며든 것 같았다.
검게 응어리진 곳도 군데군데 보였다.
본체를 잃어버렸기에 실질적인 기억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비루한 기억에 기대 옛 나타 왕조의 터전을 조사했고, 마침내 결과물을 얻어냈다.
유단은 ‘로키’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슬픈 눈으로 모든 유사정령의 기능을 정지하던 줄리어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줄은 서른두 개의 유사정령을 유폐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 집행 닷새 전에 줄은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왕성 지하에 있었고, 지독한 감시하에 연구가 진행됐다.
줄이 혼자서 서른두 개나 되는 유사정령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숨길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내부자의 도움으로 하루에 한 번꼴로 오는 감시원을 피해 유사정령을 모두 빼돌렸거나, 아니면 나타 왕이 죄목을 부풀렸거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