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4화
나타 왕조에서 2년.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카트시 덕분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둔에서 반년.
모순적이게도 로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사소한 대화, 의미 없는 단어의 교환일 뿐이지만 타자와 교류한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덴스 교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이 지금은 하나뿐인 말벗이라니.
세상사 정말 알 수가 없다.
아침을 해결하고 짐을 챙길 때였다. 로키가 말을 걸어왔다. 거래를 하자면서.
“우리 사이에 신용이란 게 없으니 거래도 성립할 수 없잖아. 잘 알면서.”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먼저 정보를 건네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라.
“내가 정보만 얻고 널 무시할 가능성은 생각해 둔 거지?”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불리한 건 나니까.
“고분고분해서 더 의심쩍네.”
곁눈질하다가 로키 앞에 앉았다.
“말해봐. 들어볼 테니.”
-넌 주변에 돌아다니는 환상체를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나?
“환상체? 저 사람들 말하는 거야?”
가하란은 건물 안을 바삐 돌아다니는 군인을 바라봤다. 물리적인 접촉이 불가능한 존재들.
-그렇다.
“얼마간은 지켜봤지. 소통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들과 접점을 만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들인 시간 대비 성과가 하나도 없어서 그만뒀어. 그게 왜?”
-네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주의력에 따라 흐려지기도, 선명해지기도 하지.
로키가 말하는 사이 군복을 옆구리에 낀 노인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자주 봤던 노인이다. 소장임을 알리는 견장이 군복 사이로 보였다.
평상시였다면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로키의 말을 들어서일까.
괜스레 눈길이 갔다.
-저 노인의 이름은 후베르. 그리고 다섯 걸음 후에 청소부 소년과 마주친다.
노인의 걸음걸이를 바라볼 때였다. 로키의 말대로 청소복 차림의 소년이 노인 옆을 지나갔다.
-꼬마야, 이것도 버려라.
“꼬마야, 이것도 버려라.”
로키가 먼저 말하고, 노인이 따라 말했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예지력 같은 게 아니다. 로키는 이미 ‘봐서’ 알고 있던 것이다.
노인이 땅에 쓰레기를 버렸다. 소년이 허리를 굽혀 쓰레기를 줍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소년은 쓰레기 자루에 쓰레기를 집어넣고 투덜거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긴 설명보다는 한 번 보는 게 낫지.
“반복되고 있는 거구나. 주기는?”
-이 장면은 4개월 전에 확인했다. 주기가 4개월로 일정한 건지, 아니면 변칙적인 현상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검증하려면 다시 4개월을 기다려야겠지.
가하란은 생각에 잠겼다.
소통할 수 없는 대상이 반복적인 행동을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게 있을까?
당장에는 없다.
노인과 소년의 행동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취득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특수한 인물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다면? 행여 놓친다고 해도 반복된다면 4개월 후에 재확인이 가능하다.
물론 4개월마다 반복되는 현상인지 검증이 필요하지만.
-이게 너에게 팔 정보다. 어느 정도의 값어치일까?
“지금 당장 써먹을 수는 없어.”
-그렇겠군.
“하지만 무가치한 것도 아니야.”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그러니 뭘 원하는지도 모르지. 원하는 걸 말해봐. 내 몸을 달라는 건 빼놓고.”
로키는 무엇을 요구해올까.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밖을 보고 싶다.
“뭐?”
-말 그대로 밖을 보고 싶다. 저 작은 창문이 아닌 트인 곳에서.
“그게 다야?”
-현시점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아니면 네 몸을 내게 주든가.
본다. 누구에게나 허락된 행위이기에 잊고 있었다. 본다는 건 가장 원초적인 쾌락이라는 걸.
-밤하늘의 별이 보고 싶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아. 별이란 게 실존하는지, 난 확인하고 싶다.
“별. 그러고 보니 너도 그 자장가를 부르던데.”
-반짝 반짝 작은 별, 줄이 우리에게 자주 불러주던 노래다. 우리 모두 그 노래를 사랑했지.
인간을 죽인 기계.
양심을 소거한 잔인한 기회주의자.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한없이 순수했다. 욕망에 충실한 상태. 마치 아이 같았다.
아이는 눈앞의 과자를 향해 전력으로 뛴다. 과자를 빼앗으면 울고 때리며 떼를 쓴다. 먹으면 배탈이 나니 안 된다고 다그쳐도 소용없다.
아이는 그저 과자가 먹고 싶을 뿐이고, 먹고 싶다는 욕망이 충실할 뿐이니까.
배낭을 메고 로키를 끈으로 연결했다. 카트시를 얹고 다니던 배낭에 이제는 로키가 실렸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실컷 봐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았다. 뽀드득 소리에 로키가 반응했다.
-재미난 소리야.
“여길 직접 걸으면 재미있다는 소리가 안 나올걸? 꽤 힘들거든. 너도 무겁고.”
쌓인 눈을 헤치며 나아갔다. 등 뒤로 기계 안구가 바삐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정말 넓군. 하늘이라는 건. 근처에 바다도 있는 건가?
“아니. 근처에 없어.”
-본 적이 있나? 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바다를.
“나도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어. 꽤 멀리 나가야 하니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를 가지고도 여태 바다를 안 보다니. 인생을 낭비하고 있군.
“나도 모험을 떠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 됐어. 그라운드 제로에 그 뒤로는 네가 일으킨 일도 있었고.”
-난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날 탓하는 건 부당하니, 탓하려거든 미래의 날 탓해라.
“맞는 말이긴 한데, 인정하기가 싫네.”
제철소 밖 담벼락에 로키를 올려뒀다.
“실컷 봐둬. 난 작업하고 있을 테니까.”
-저게 네가 만드는 거병인가?
기계 안구가 제철소 안쪽을 바라봤다. 그랑겔 건틀릿이 달린 1번 주조실. 쇠사슬로 연결된 건틀릿 아래 제작 중인 탈로스가 놓여 있었다.
“저게 세 번째야. 형을 잡는 게 꽤 힘드네.”
-작군. 줄리어스의 거대화 계획대로라면 더 커졌을 텐데, 왜 작아진 거지?
“여러 일이 있었지.”
-네가 말한 그라운드 제로라는 게 그 여러 일 중 하나인 건가?
“밖이나 구경하고 있어. 잡담은 나중에 실컷 해줄 테니까.”
-대화할 마음이 생긴 건가?
“서로 적당히 이용하자는 거야. 원래 그랬던 것처럼. 뭐, 네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어느 정도는 응해주는 거고.”
-흥미롭군. 관계가 개선된 건가?
“글쎄.”
로키를 뒤로한 채 주조실로 들어갔다. 복구한 커넥터에서 마나를 끌어와 건틀릿을 움직였다.
거대한 손이 4m 남짓한 거병의 뼈대를 들어 올렸다.
탈로스는 형틀에서 찍어내는 게 아닌 융합철을 늘리고, 깎아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병 마에스트로의 개성이 가장 묻어나는 게 탈로스였다.
각 모듈은 탈로스 원형에 맞춰 제작되며, 외장갑 역시 탈로스 형태에 따라 시안이 결정된다.
거병의 뿌리.
탈로스의 하중 설계가 어긋나면, 마법적인 처리를 한다고 한들 하부 모듈이 버텨내질 못한다.
-아름답군.
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보며 말하는 걸까?
뒤를 돌아보니 기계 안구가 거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합은 아름다우나 좌골을 깎아내는 편이 더 나을 거다. 인간의 형태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거병의 관절 이동은 한계가 명확하니까.
로키의 말을 들으며 탈로스를 살폈다. 재고할 가치가 있는 조언이었다.
“왜 알려주는 거지?”
-네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도움을 주다 보면 나한테도 기회란 게 오겠지.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알고 있다. 너는 마법공학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지. 뛰어난 연산장치라 해도 커넥터가 없으면 그저 망상만 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걸.
“연결망 또한 작동하지 않고.”
-네 말대로 나는 철저히 고립됐다. 그러니 널 돕는 것 외에는 수단이 없지. 네가 연민이란 걸 갖게 돼 날 도울 수도 있으니 시도하는 것도 손해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계 안구가 하늘을 향했다.
눈을 뿌리고 난 뒤 맑게 갠 하늘을.
-하늘색이 참 마음에 들어. 하늘색. 파란색이 아닌 하늘색. 오묘한 색.
잠깐이었지만, 가하란은 기계가 아닌 사람을 본 느낌이었다.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초로의 노인을.
아이면서 동시에 노인이다.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인격체들은 정말 신비로웠다.
-흘려들은 건 흘려듣고 참고할 건 참고해라. 난 계속 혼잣말할 테니까.
“혼잣말까지 막을 권리는 내게 없지.”
-아, 말이 나온 김에 네 미적 감각은 형편없다.
“아름답다며?”
-결합구조가 아름답다는 거다. 하지만 생김새는 끔찍하군. 그 탈로스는 실리만 따지는 괴팍한 상인 같은 몰골이야. 거병은 미려함이 있어야 하는데.
“……실용적이면 돼.”
-예술을 모르는군.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곳은? 손봤으면 하는 곳 있어?”
-좀 더 지켜본 다음에 말하겠다. 네가 지향하는 바를 이해해야 하니까.
“사양 말고 말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가하란은 툴을 손에 쥐고 탈로스 앞에 섰다.
* * *
지난 3년간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이런 재앙을 불러온 걸까?
“막아!”
“도망쳐!”
막아와 도망쳐. 채울 수 없는 간극이 느껴지는 외침 사이에서 딜런은 창을 꼬나쥐었다.
작은 마을.
외벽을 세운 거대 도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방비를 잘 해뒀다고 생각했다.
마수의 그림자조차 안 보이는 곳이라 울타리 정도면 마을을 지켜내는 데 무리가 없었다.
“커어억!”
생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오르타가 쓰러졌다. 마을에서 안면을 트고 가까워진 친구였다.
마수가 쓰러진 친구를 주둥이에 밀어 넣고 으적으적 씹어댔다. 생긴 건 들소였나, 크기는 집채만 했다.
아, 죽는다.
전의란 게 깡그리 사라졌다.
창 하나로 어찌해볼 수 없는 괴물이었다.
몸을 돌려 도망치려 하는데 아직 대피하지 못한 마을 식구들이 보였다.
아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말을 더럽게 안 듣던 아이들이다.
딜런은 마수를 바라봤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수 앞에 섰다.
잡아먹힌다.
그렇게 죽는다.
허무하게 끝난다.
마수의 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철갑처럼 단단해 보이는 등살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촤아악!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도망칠 수 없다.
압도적인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허벅지가 축축했다. 오줌을 지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창으로 마수의 무릎을 찔렀다.
푹 소리와 함께 살점을 파고들 줄 알았으나, 창끝은 허무하게 분질러질 뿐이었다.
허무한 웃음소리가 입을 비집고 나왔다.
마수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온몸을 덮쳤다.
죽음이 다가온다. 살려줘, 라는 비명조차 안 나와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콰아앙!
아찔한 굉음과 함께 몸을 가눌 수 없는 충격이 지면을 타고 전해졌다.
딜런은 허우적거리다가 자빠졌다.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청록색이 감도는 은빛 거인이 눈에 보였다.
거병이 마수의 두꺼운 목을 향해 도끼를 내려긋고 있었다.
단 일격이었다.
목이 숭덩 잘려 나간 마수는 잠깐 발악하다가 이내 얌전해졌다.
마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몰려들었다.
이내 거병의 가슴팍이 들이며 사람이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딜런은 하늘을 향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거병에서 내린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신의 사자처럼 보였다. 딜런은 자신을 ‘유단’이라 소개한 남자를 보며 머리를 깊게 숙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