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3화
“그래서 그 도박이란 게 정확히 뭡니까?”
참을성 없는 남자였다. 탄드라는 세잔에게 눈짓을 주며 복도 끝으로 향했다. 빈 병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특임교수가 영혼 세계를 연구 중이라는 건 알고 있죠?”
“알고 있죠. 유단 교수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까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보태자면, 연구자금 대는 것도 슬슬 버겁습니다. 눈먼 돈에도 한계가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면서도 감사해요.”
“우리 사이에 인사말은 필요 없죠. 결과, 그거 하나면 됩니다. 유단 교수가 뭔가 발견했나요?”
“도박. 아주 위험한 도박이지만 가능성을 엿봤죠.”
탄드라는 창가로 걸어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세잔이 곁으로 다가왔다.
“영혼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정의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모든 기억. 방대한 자료 모음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영혼 세계는 자료 덩어리죠. 그래서 뛰어난 네크로맨서는 영혼 세계와 현실에 다리를 놓아 죽은 자의 기억을 끌어오기도 하고요.”
“몇 번 보기도 했어요. 기괴한 강령술사들이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을. 하지만 들이는 수고에 비해 영양가가 너무 없었죠. 기억이랍시고 말하는데 망자의 기억이 맞는지, 또 정확한지 검증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세잔이 손가락 세 개를 서로 비비며 말했다.
“강령술사 놈들, 말하는 거 들어보면 사기꾼이나 다름없어요. ‘특정 시간, 특정 기억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운이 좋아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다.’ 이거 뭐 대충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돈을 받아 가겠다는 심보 아닙니까?”
돈 낭비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세잔다운 평가였다.
확실히 네크로맨서들은 입만 산 도둑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특정한 기억을 읽어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한 개인의 모든 인생을 담고 있는 자료의 세계. 비유하자면 수십만 권에 가까운 책 사이에서 원하는 문장 하나를 찾아내는 거니 효율을 기대할 수는 없죠. 강령술을 연이어 실행할 수도 없고.”
“그런 무가치한 영혼 세계에 막대한 연구비용을 들이고 있는 제 심정을 헤아리신다면, 이제 그 결과물을 말씀해 주시죠?”
“상인은 직접적인 결과를 좋아하고, 연구가들은 결과까지 이르는 과정을 중요시하죠. 어떤 부침을 겪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런 건 나중에 침대에서 진득하게 듣겠습니다.”
세잔의 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탄드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특정 시간, 특정 기억을 읽어낼 수 없다면…… 한 개인의 모든 기록을 전부 가져온다.”
등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간질이던 세잔의 손이 멈췄다. 그는 한걸음 물러서서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도박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실패 여부를 떠나 실행가능 여부를 묻는 겁니다. 시도해 본 겁니까?”
시도. 감미로운 단어. 탄드라는 유단의 연구 성과를 떠올렸다. 침대에서 나뒹구는 것보다 더 몸이 달아오른다.
“삶이 길어질수록 자료가 쌓이죠. 정보가 많아지면 변수도 늘어나고요. 그래서 적당한 실험체를 준비해봤죠.”
“어린애라면 제격이겠군요. 검증해봤나요?”
“인간 몸에 옮기는 건 시도하지 못했어요. 빈껍데기로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까요. 대신 다른 곳에 실험체의 기억을 이식했죠.”
“다른 곳이라면…….”
탄드라는 손가락을 들었다. 창문 너머, 좌판 앞에서 홍보문구를 들고 돌아다니는 기계인형을 가리켰다.
“기계. 저건 단순한 업무밖에 못 하니…… 아! 유사정령. 오토마타에 들어가는 그 연산장치라면!”
“이해가 빠르네요. 유사정령의 작동원리나 구조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해요. 하지만 이용할 수는 있죠.”
“유사정령을 인간의 뇌처럼 사용한 거군요. 실험은 성공했나요?”
“반쯤은요. 의식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로 전체가 망가졌어요.”
세잔이 턱을 쓰다듬었다.
“조금 애매하군요. 설령 성공한다고 한들 그걸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요?”
“그건 성공하고 나서 생각해 보죠. 단순한 정보집합체로 다룰 건지, 아니면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일지.”
“전 늙지 않는 매끈한 몸을 원하지, 차가운 쇳덩이 안에 사는 건 싫군요. 강철로는 이런 거 못 하니까요.”
세잔이 허리를 휘감으며 몸을 밀착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는 게 발정 난 원숭이 같네요.”
“인간이나 원숭이나 그게 그거죠. 바쁜가요? 아니면…….”
탄드라는 세잔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쳐냈다.
“욕정 풀려고 바짓단부터 풀기에는 우린 너무 늙었어요.”
“무드를 원한다면 학회장님 말대로 밤에 찾아뵙죠. 생각해 보니 저도 일정이 있네요.”
입맞춤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떤 일정이죠?”
“쿠스튼, 그러니까 둔에서 꽤 떨어진 도시에서 이상한 정보가 들어왔거든요.”
“이상한 정보라면?”
세잔이 눈을 가늘게 뜨며 창밖을 보았다.
“거래차 파견 나간 상단 쪽 인원이 돌아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요. 쿠스튼이 점령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했죠.”
“도시끼리 전쟁이라고 치른 건가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낫죠. 기왕 말 나온 김에 같이 가시죠.”
세잔을 따라 롱캣 연합회 건물로 이동했다. 회의실에는 소수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다들 안면이 있는 터라 눈인사만 나눈 후 이야기가 진행됐다.
“쿠스튼의 로텐 길드와 협정을 맺은 직후였습니다.”
중년의 남자. 자신을 케튼이라 소개한 남자는 잘린 왼팔을 오른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도시를 떠나려 할 때 공습경보가 내려졌죠. 랍파들의 매가 떠올랐고 외벽으로 군인들이 몰려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몇 차례 겪었거든요.”
마수들이 도시 주변을 배회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며, 케튼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북쪽 외벽을 건드리던 놈들이 진로를 바꿔 서쪽을 두드리기 시작했죠. 그 바람에 도시를 떠나기로 했던 저희는 발목이 붙잡혔습니다.”
“시의회는 뭐라고 하든가요?”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조속히 해결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죠. 쿠스튼의 자경단과 군인들은 훈련이 잘된 상태였어요. 그들은 능숙하게 마수들을 막아냈죠.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공습이 이틀, 사흘, 나흘 쉼 없이 이어지자 분위기가 바뀌었죠.”
케튼은 경직된 얼굴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쳐가는 방위군, 마르는 물자.
“어느 순간 깨달은 겁니다. 고립된 성이 갇혔다는 걸. 그때 목숨을 내건 랍파들의 탈출이 시행됐죠. 저는 봤습니다. 하늘로 오른 스무 마리의 매 중 절반 이상이 땅으로 꼬꾸라지는걸.”
파트너를 잃은 매는 자살을 택한다고 들었다.
탄드라는 눈을 찌푸린 채 말을 들었다.
“얼마 후 지원병이 왔습니다. 거병을 대동한 용병단이었죠. 도시를 빠져나간 랍파가 불러온 기적이었습니다.”
“도시군이 운용하는 거병은 없었나요?”
“방벽 너머로 숨어든 마수가 분배소를 공격했습니다. 전투, 아니, 전쟁 초기에 벌어진 일이었죠. 배터리 수급에 문제가 생기니 거병은 깡통으로 변했어요. 방벽 옆에 세워두는 게 전부였죠.”
“마수가 분배소를…….”
회의실 안에 소란이 일었다.
우연일까?
지금까지 핵심 구조물을 공격한 사례는 보고받은 적이 없었다.
마수들은 인간을 사냥하거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뿐, 건물에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공성전을 하듯 사방에서 공격하며 수비 병력의 빈틈을 생성하고, 별동대를 투입해 분배소를 타격한다?
이건 마치…….
“마침 학회장님이 계시니 묻고 싶습니다. 제 아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학회장님, 마수들의 연대와 전략. 현실성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재수가 없었던 겁니까?”
케튼의 질문에 탄드라는 짧은 침묵 후 말했다.
“제가 군사작전은 잘 모르나, 요충지를 습격해 전력을 감퇴시키는 방법은 요행이 아닌 것 같네요.”
케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다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더 끔찍한 걸 목격하고 말았죠.”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털며 말하는 케튼이었다.
용변단이 출진했으며 기세 좋게 작은 마수들을 처리하다가, 마수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전원 전사했다고.
“거병이 터져나가는 걸 확인한 순간 저흰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위험하니 도시 안에서 대기하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인원을 꾸려 도시를 떠났죠. 그 과정에서 저도 이 꼴이 됐고요.”
케튼이 잘린 왼팔을 들어 보였다.
“저는 쿠스튼의 사람들이 무사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린 케튼이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참석해 있던 군부 인사들도 황급히 일어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구리군요.”
세잔이 인상을 썼다.
“저녁 식사는 다음에 하죠. 그리고 총회의를 준비해 주세요.”
“그러죠. 시의회에 제가 연락해 두겠습니다.”
탄드라는 회의실을 벗어났다.
먼 도시에서 일어난 참사는 경고장일 수도 있다. 너희에게도 곧 닥칠 일이라는 메시지.
“조사대를 꾸릴 겁니다.”
탄드라는 눈앞에 있는 젊은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신인류, 신식 마법을 익힌 정예들.
탄드라는 확신했다. 거병보다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야말로 대마수전에 특화된 무기라고.
“특수개체 확인 및 포획. 군부의 협조하에 진행될 테지만, 가능하다면 우리가 먼저 생포해 샘플로 삼아야 합니다.”
* * *
일과가 변함이 없다.
이 정도면 기계라 칭해도 손색이 없었다.
로키는 멀건 죽을 먹는 가하란을 보았다.
-인간은 쉽게 질린다고 학습했는데.
“나도 좋아서 먹는 건 아니야. 내 능력으로 기를 만한 작물이 이것뿐이라 그렇지.”
그릇을 비운 가하란이 장비를 챙겨 일어섰다.
-1분도 어긋남이 없군.
“시간이 아까우니까.”
-이 엇나간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헛된 노력으로 끝날 수 있는데.
“말했잖아. 이미 한 번 건너왔다고. 가능성을 엿봤으니 계속 반복하면 돼. 하고, 하고, 또 해서 기어이 이뤄내는 거야.”
-무식한 방법이다.
“그게 내 몇 안 되는 장점이지.”
가하란이 떠났다.
오늘도 제철소에 갔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멍청한 원숭이는 오늘도 내 위에서 날뛰고 있다. 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 기계 팔로는 목을 조를 수도 없다.
흐느적거리는 팔은 원숭이의 장난감이 된 지 오래였다.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겹침 세계의 주민들이 눈앞을 바쁘게 오갔다.
군인들의 쓸모없는 농담을 들으며 시간을 보낼 때였다.
오후 9시. 가하란이 돌아왔다.
오늘도 거지 같은 몰골로 돌아왔다. 쇳가루가 가득 묻은 옷을 빨래하고 널고 드러눕는다.
어제도, 그저께도, 엊그저께도.
아니.
몇 달간 같은 일과를 소화하고 있었다.
무너짐 없이, 견고한 쇠를 두드리는 장인의 손길처럼 흐트러짐 없이.
인간 관찰이 꽤 흥미로운 일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줄리어스 외에는 열등한 생물처럼 보였는데, 눈앞의 꼬마는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카트시 말고 나와 먼저 만났다면 좀 더 재미있었을지도.
“어차피 내 몸을 뺏으려고 온갖 수작을 다 부렸을 거잖아.”
-그랬겠지. 하지만 넌 걸려들지 않았을 거다.
“그야 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다면 속아 넘어갔겠지.”
-아니, 넌 내 제안을 거절했을 거다. 나는 쉽게 가는 법으로 너희를 유혹했으니까. 하지만 넌, 쉽게 가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여.
“누가 그래. 나도 편하게 지내고 싶어.”
-그렇다면…….
말하는 사이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키는 안구를 옮겨 창을 바라봤다.
눈이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저게 눈이군.
줄리어스가 보여준 사진집을 통해서만 봤던 눈. 실제로 보니 사진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얀 눈을 하염없이 지켜볼 때였다.
군인들이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우리 애가 말이야…….”
의미 없는 대화라 기록에도 남기지 않고 흘려보낼 때였다.
어느 순간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로키는 몇 달 전 기록을 검색했다.
눈앞의 군인들이 나누는 대화와 몇 달 전 기록을 대조했다. 허상뿐인 군인들의 동작, 어투, 대화 진행 형식.
모든 게 일치했다.
-정말 미친 세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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