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2화
코끝이 간지러웠다. 코를 씰룩거리며 상체를 세우려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흉부에서 일어났다.
가하란은 헛숨과 함께 눈을 떴다.
루루의 꼬리, 흐릿한 하늘.
몽롱하던 머리가 일을 시작했다. 긴박했던 장면이 순차적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마수의 사체가 아래 깔려 있었다. 살다 보니 마수를 침대 삼아 자게 되는구나.
어금니를 살짝 물며 몸을 세웠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살짝 눌러봤는데 별로 아프지 않았다.
괜찮은 걸까, 안도하며 숨을 쉴 때였다. 놀리듯 통증이 찾아왔다.
금이 간 게 확실했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허전한 오른쪽 무릎을 만지며 주변을 살폈다. 으적으적 씹혀 찌그러진 의족이 보였다.
몸을 질질 끌어 의족이 있는 곳까지 갔다. 다행히 소켓은 멀쩡했다. 뼈대가 구부러져 높낮이가 맞지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의족을 부착하고 신경망을 살폈다. 마나 회로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고치려면 엘리멘트 패널과 툴이 필요했다.
“아이구야.”
배낭이 토해낸 물건들을 살피다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건질 만한 게 없었다.
나름 철저히 준비한 건데.
삐거덕대는 의족으로 땅을 밟았다.
“루루, 다시 둔으로 돌아갈 거야.”
유일한 친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끽끽거리며 날뛰었다. 자세히 보니 챙겨온 식량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그래, 너라도 먹는 게 낫지.
가하란은 마수의 사체를 바라봤다.
기도하긴 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근데 기도의 방향이 엇나갔는지 엉뚱한 게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나은 건가.”
주변 지리를 기억해뒀다. 돌아오는 길에 마수 뼈를 챙길 것이다. 여분의 배터리를 만들어두면 유용할 테니.
다시 아웃라인으로 향했다.
둔의 성벽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살아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마수만 득실대면 골치 아프겠지만.
마수는 생명체보다는 마나에 반응했다. 배터리에서 흘러나오는 마전기가 마수를 유혹하는 건지, 아니면 해치운 마수만의 특성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여행에 나서기 전 필히 확인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마수들이 마나에 반응한다면…….
가하란은 의족을 내려다보았다.
신경망이 상시 가동되도록 회로를 설계해 놨는데 아무래도 수정이 필요해 보였다.
숨 쉴 때마다 미약하게 올라오는 흉통을 벗 삼아 걸음을 옮겼다.
다시 중앙군부 앞에 서니 맥없는 웃음이 나왔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거창하게 이별한 것치고는 금방 다시 보는군.
“그러게.”
가하란은 버려둔 모포에 몸을 뉘었다. 일단은 쉬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지?
“반가운 친구를 만났지.”
-친구?
“마수. 희소식이지? 살아 움직이는 게 나뿐만이 아니야. 질량을 지닌 생명체가 반가우면서 골치가 아프네.”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
“성도.”
-그렇군.
“돌아온 기념으로 질문에 답해줬으니까 잠깐 조용히 해줄래? 좀 자야겠어.”
모포를 덮고 눈을 감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이 따가웠다. 아침이었다. 하늘도 비구름이 전부 물러나 새파란 속살을 드러냈다.
하나씩 하자.
일단 식사를 해결했다. 쉰내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자르지 않아 치렁치렁한 머리도 다시 묶었다.
-어디 가는 거지?
“마수들이 돌아다닌다는 걸 알았으니 대비책을 마련해야지.”
-대비책?
가하란은 거병관리국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병.”
군부를 빠져나와 거병관리국으로 향했다. 격납고 앞에 놓인 해더 트럭과 트레일러를 눈으로 훑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반듯하게 누워 있는 거병이 눈앞에 있었다. 전고 24m. 식별코드 D323. 애칭 ‘둔의 기사’.
“이렇게 보니 반갑네.”
어릴 때 본 거병기동식의 주인공.
거대한 기사를 일으켜 세워 성도로 향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연료 문제로 불가능하다.
미완성의 마나포집으로 운용할 수 있는 건 4m 남짓의 거병뿐.
가하란은 사다리를 가져와 거병 몸체에 올라섰다.
제철소 안에는 그랑겔 툴과 허공용로가 있다. 커넥터 마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시간을 들인다면 보안을 해제하고 가동시킬 수 있다.
도구가 갖춰졌으니 필요한 건 자재뿐.
엘리멘트 패널을 제작하는 건 어렵다. 특수한 용매가 필요한데 지식이 부족했다.
그러니 있는 걸 끌어다 써야 한다.
외장갑을 밟으며 각 모듈 구성을 살폈다.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을 구분해 기록해뒀다.
해체 작업을 끝내고 모듈 별로 패널을 떼어낸 다음 외장갑에 쓸 철을 제련한 후…….
“문제는 탈로스인가.”
누워 있는 거병을 보며 혼잣말했다.
거병의 뼈대.
액상근육이야 추출해서 쓰면 어느 정도 해결되지만, 탈로스는 기초 작업부터 마무리 조형까지 혼자서 해내야 한다.
각 파츠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탈로스의 밸런스가 엉망이면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2년 전이었다면 실행할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가하란은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팔뚝 곳곳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나타 왕국에서 허공용로를 다루며 입은 상처들. 불꽃 세례를 받으며 얻은 경험치가 있으니 탈로스 제작도 해볼 만했다.
물론 엉성할 것이다.
밤나비 클랜에서 제작한 거병의 기준출력은 80엘론. 홀로 제작한 거병의 출력은 몇이나 될까.
기동에 문제만 없으면 좋겠는데.
고심하던 차에 왼쪽 가슴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의술사가 없는 세계인 만큼 상처가 악화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숨을 얕게 쉬며 군부로 걸음을 옮겼다. 뼈가 아물 때까지 몸 쓰는 건 뒤로 미루고 머리를 굴려야 할 것이다.
* * *
탄드라는 방이 비었다는 걸 알면서도 방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모든 것이 반듯하게 놓인 개인실.
“언제쯤 돌아올 거니.”
방문을 닫고 재정실로 올라갈 때였다.
“학회장님!”
“무슨 일이죠?”
“군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령관님께서…….”
“알겠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요.”
탄드라는 겉옷을 챙겨 연구동을 벗어났다. 생각을 정리하며 중앙군부로 이동할 때였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세잔이 보였다.
“같이 가시죠.”
말에서 내린 세잔이 곁에 섰다.
“축하가 늦었네요. 세잔 연합회장님. 롱캣의 주인이 되실 걸 축하드려요.”
세잔이 가느다란 입술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이게 다 학회장님께서 힘을 써주신 덕입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 크슌 파벌 쪽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공들인 성과가 있으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둔의 돈줄을 쥐게 된 걸.”
“하하하, 돈줄.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단어네요.”
서장이었던 세잔이 둔의 거대상회, 롱캣의 대표가 됐다.
세잔의 계획표대로 모든 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친구들, 조용히 보냈습니다.”
친구들.
탄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덴스가 죽고 나서 임시 학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정식으로 임명되기까지 많은 부침이 있었다.
동백독서회라는 알량한 자들이 파벌 놀음을 한 탓에 한때는 학회장 자리가 위태로워졌지만…….
“돕고 사는 세상은 참 좋네요. 그, 동백에 심어둔 애는 계속 활동하도록 내버려 뒀습니다. 대가리를 쳤다고 해도 싹이 남아 있으니 꾸준히 관심을 줘야겠죠.”
“회장님 덕을 톡톡히 보네요.”
“우린 운명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근데 남겨두는 것보다는 싹 다 처리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이제 동백 놈들은 힘도 없는데.”
“소속 연구원들 중 실력 있는 자들이 꽤 있어요. 눈치가 없어서 줄을 잘못 탓을 뿐이니 시간을 줘야겠죠. 수장이 땅 밑으로 사라졌다는 걸 깨달으면 노선을 변경할 테죠. 그때 잘 다독여서 이끌어 가면 돼요. 아시잖아요? 사람은 귀하다는 걸.”
“그럼요, 그럼요. 귀하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중앙군부 앞이었다.
세잔이 삐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노인네, 가망 없는 거겠죠?”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노환은 어쩔 수 없어요. 신의 뜻이니까.”
“그때 그 마수를 잡았어야 했는데. 우리의 꿈도 저 멀리 떠나겠네요.”
“우리한테 아직 시간이 있어요. 특수한 마수가 있다는 걸 파악했으니, 계속 조사하면 돼요. 신식 마법 쪽도 변화 중에 있으니 또 다른 방법이 나올 테고요.”
“불로불사. 아니, 불사는 됐고 불로만 해결됐으면 좋겠군요. 살다가 지겨우면 죽어야 하니.”
“지겨운 날이 오겠어요?”
“한 500년쯤 살다 보면 이 지긋지긋한 소유욕도 사라지겠죠. 아, 성욕 때문에 계속 살아가려나요?”
그렇게 말하며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뻗는 세잔이었다. 탄드라는 세잔의 손등을 가볍게 꼬집었다.
“젊은 애들한테 가서 푸세요.”
“난 학회장님이 마음에 드는데.”
“그러면 나중에 찾아오든가요.”
복도를 걸었다.
둔에서 이름난 의술사들이 맞은편에서 무리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지나갔다.
“표정을 보아 하니 저쪽도 손을 뗐나 보네요.”
세잔이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우리도 방법을 찾지 못하면 노인네처럼 병상에서 앓다가 가겠죠.”
“정해진 거니까요. 그걸 피하려면 발버둥 쳐야 하고.”
병실 문을 두 번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좀 어떠세요?”
탄드라는 디온의 몸을 보며 말했다. 의술사들이 붙여놓은 스크롤에서 희미한 마나 파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연 치유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누워서 손님을 받아야 할 정도로 좋지 않습니다.”
사령관이 마른기침을 연신 해댔다.
노쇠한 둔의 늑대에게서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자는 곧 죽는다. 모든 지표가 사망을 가리키고 있었다.
“학회장님께 부탁이 있어 이리 불렀습니다.”
“말씀하세요. 뭐든 들어드릴 테니.”
“……듣자 하니 유단 특임교수가 재미난 연구를 진행 중이더군요.”
“역시, 그것 때문에 절 부르셨군요.”
“실험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무척이나 위험한 실험이에요. 영혼이란 게 아직 완벽하게 규명된 건 아니지만, 실재한다는 건 알고 있죠. 그 영혼이 사라질지도 몰라요.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르겠지만 실험에 실패하면 그곳에 갈 가능성조차 없어지고요.”
쿨럭, 사령관이 거칠게 기침했다. 가슴이 들썩이고 입가에 하얀 거품이 맺혔다.
“죽음 이후에 찾아올 세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는 여기서 살고 싶으니까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 아이가 연구 중인 영혼세계는 정말 위험해요.”
“위험하기에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거 아닐까요? 난 내 모든 걸 특임교수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게 내 마지막 도박이에요.”
탄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유단이 돌아오는 대로 준비해 드리죠.”
“특임교수는 아직도 부재중인가 보군요.”
“네. 어딜 갔는지, 걱정이에요.”
사령관이 세잔을 바라봤다.
“들었습니다. 롱캣을 손에 넣었더군요.”
“사령관님께서 힘써주신 덕이죠. 얼른 기운 차리시고 정의를 위해 또 한 번 일을 하셔야죠.”
“기운 차리게 되면 군수품에 관한 얘기를 나누죠. 축하 선물로는 제격일 겁니다.”
“얼른 나으십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병실을 벗어났다.
“노인네를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요. 노인네가 말한 방법이란 거,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전 아는 게 없어서.”
“글쎄요. 도박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부터 그른 것 같지만, 우리한테 방법이 없으니.”
탄드라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