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가하란은 몸을 날렸다. 마수의 가느다란 팔이 뾰족한 창처럼 방금 서 있던 자리를 관통했다.
촤악, 바닥에 놓아둔 배낭이 찢어졌다. 챙겨온 건식와 생활용품이 젖은 길에 나뒹굴었다.
뒷걸음질치며 마수의 다음 행동을 살폈다.
주둥이 위에 달린 팔들이 또다시 요란하게 움직였다. 춤추듯 흔들리던 팔이 정확히 가하란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온다.
이번엔 피할 수가 없었다.
곡도의 날을 붙잡고 가로로 들었다.
타앙!
생물의 거죽과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났다. 손아귀가 얼얼해졌다. 하마터면 곡도를 놓칠 뻔했다.
휘적거리는 팔을 피해 전력으로 뛰었다. 배터리를 사용해 유사 신체술을 쓰고 싶었지만, 마나 잔량이 아슬아슬했다.
마전기가 완전히 방전되면 의족은 짐덩이가 될 것이다. 관절 미세조정 회로가 멈춘 의족은 각목과 다름없으니까.
끼이익!
품 안에 있던 루루가 뛰쳐나갔다. 별안간 벌어진 일이라 손쓸 수도 없었다.
“루루!”
나무 위로 뛰어올라간 루루가 겁도 없이 마수를 향해 도약했다.
자그마한 원숭이가 마수 위에 올라탔다. 손톱으로 할퀴고 이로 물어뜯고 있는데, 마수는 별 반응이 없었다.
맞은편에 번개 맞은 고목이 있었다. 검게 탄 껍질을 지지대 삼아 뛰어올랐다. 나무 타는 거야 이골이 났기에 쉽게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나무 밑까지 따라온 마수가 팔을 축 늘어트렸다. 주둥이로 땅을 쓸면서 동시에 팔로도 주변을 더듬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려다 혹시 몰라 입만 꾹 다물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팔이 또다시 흔들거리더니 나무 위를 가리켰다.
“피에엑!”
마수가 기어 왔다. 여섯 개의 다리를 사용해 나무를 붙들었다.
가하란은 곡도로 마수의 팔을 쳐내며 생각했다.
계속 방전되는 마전기, 루루한테는 반응하지 않는 마수.
팅, 마수의 손이 의족을 스쳐 지나갔다.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가하란은 곡도를 크게 휘둘러 접근한 마수 팔을 떨쳐낸 후 곧바로 의족 접합부에 손을 댔다.
신경망을 차단하고 소켓을 풀어냈다. 손에 들린 의족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의족이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나무를 타던 마수가 몸을 돌렸다.
주둥이 위에서 흐느적대던 팔도 모두 의족이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카앙, 캉!
마수가 주둥이를 벌려 의족을 씹었다.
가하란은 나무 위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수의 등이 훤히 보였다.
주둥이에 연결된 세 개의 팔, 그 사이에 은은하게 점멸하는 노란 부위가 있었다.
마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숨을 한껏 입에 물고 곡도를 역으로 쥐었다. 거리를 가늠한 뒤 왼발로 나무를 찼다.
몸이 떠올랐다. 오른발의 부재로 무게 중심이 살짝 흔들렸지만, 방향은 틀어지지 않았다.
마수의 등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으아악!”
온 힘을 다해 점멸하는 부위를 찔렀다. 곡도 끝부분이 거죽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이건 생채기에 지나지 않다. 주요 장기를 꿰뚫으려면 더 깊게…….
마수가 온몸을 비틀었다.
주둥이에 달린 팔들도 경련하듯 떨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퍼억!
손 하나가 어깨를 강타했다. 구조상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마수의 관절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혐오스러운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잔털이 돋아난 팔이 다가온다.
타격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건 몸을 꿰뚫고도 남는다.
“제발 좀!”
몸을 숙이며 가슴팍으로 곡도 손잡이를 짓눌렀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느낌과 함께, 칼날이 부드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직선으로 뻗어오던 팔이 한순간 속력을 잃더니 힘없이 가하란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다른 두 팔도 지면에 안착했다.
굳건하게 마수의 몸체를 떠받치던 여섯 개의 다리도 부식된 쇠처럼 으적 소리를 내더니 부러져 버렸다.
쿵.
내려앉은 마수 몸체 위에서, 가하란은 격하게 숨을 토해냈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개었던 하늘이 우중충해지는 게 보였다.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기력이 다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끼익.
루루가 곁으로 다가왔다. 일어나라는 듯이 뺨을 손으로 툭툭 쳤다.
“잠깐만, 잠깐만 좀 누워 있을게.”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뻐근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면 곤란한데.
걱정이 머릿속에 차올랐지만, 그보다 빠르게 어둠이 밀려왔다.
비도 피해야 하고, 의족도 봐야…….
흐릿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날뛰는 루루가 보였다.
* * *
“그냥 박아! 우린 남아도는 게 물량이거든!”
유단은 충실한 개처럼 뛰어드는 작은 마수를 바라봤다.
자그마한 도시의 방벽이 마수의 체액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인간은 잠을 자야 한다. 쌓인 피로를 풀지 못하면 정신이 오염되고 이내 미치기 마련이니까.
“문을 계속 두드려! 어딜 편하게 자려고.”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웃음을 연이어 터트리며 날뛰는 마수를 바라볼 때였다.
-같은 걸 계속 보고 있으면 질릴 만도 한데.
앞에 솟아난 마수의 눈이 말했다.
“게웰, 저걸 보고도 질린다는 말이 나와? 저놈들 얼굴 봐봐. 툭 치면 쓰러질 표정으로 성벽을 지키고 있어. 안쓰러워서 재미있지 않아?”
-취향 차이라고 생각해 두지.
“네가 나고, 내가 너야. 취향 정도는 맞춰 달라고. 어?”
눈, 게웰을 거세게 치며 말했다.
-수비에 가담하는 숫자가 점점 줄고 있다. 작은 친구들이 말하길, 도시를 떠나는 인구도 늘어나고 있고.
“얼마 남지 않았어. 분배소에 직접 타격을 가하면 모든 게 끝이야. 도시 하나가 또 날아가는 거지.”
-쉽군.
“쉽지. 작은 도시들은 방비책이 허술하니까. 저놈들을 상대하며 하나씩 하나씩 전술을 늘려나가야 해.”
방벽을 지키던 자경단 하나가 무기를 쥔 채 뒤돌아서는 게 보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망루를 지키던 인간도, 석궁을 들고 방벽 밖을 서성이던 레인저도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무너지는군.
“아직이야. 거병이 도시로 들어오는 걸 봤잖아. 용병단을 소집했으니 그놈들이 나올 차례야.”
때마침 방벽이 내려가며 거병 네 대가 밖으로 나왔다. 긴 창을 옆구리에 낀 거병들이 대열을 유지하며 마수들을 상대했다.
들개만 한 마수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거병에게 달려들었지만, 허무하게 죽을 뿐이었다.
허술한 이빨로는 거병의 장갑을 뚫을 수 없다.
-유도해 볼까?
“해야지. 기세를 탄 지금이야말로 저놈들을 아작 낼 기회야.”
게웰이 마수의 지휘권을 넘겨줬다.
지면에 붙어 있던 시야가 공중으로 옮겨졌다. 전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장점이었다.
“이놈들을 이쪽을 빼고.”
왼손 손목을 가볍게 튕겼다.
서른 마리의 작은 마수들이 일시에 고개를 홱 꺾으며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거병들이 추격을 시작했다.
도주하는 적의 등에 창을 꽂아 넣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으니 쫓아오는 게 당연했다.
작은 마수의 수가 줄어든다.
약간의 동정심이 생기지만, 괜찮았다.
금방 보충 가능하니까.
캬아아악!
쓰러진 마수들의 비명이 대지를 적셨다. 거병 발에 밟혀 피떡이 된 마수들을 보며 유단은 말했다.
“곧 보내줄게. 그러니 섭섭해하지 마.”
남은 마수는 열 마리.
훌륭하게 작전을 이끈 작은 전사들 앞으로 거병이 다가왔다.
-뭣도 아닌 것들이 나대기는.
거병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테랑의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지능 없는 마수들 따윈 사냥감조차 안 된다는 듯, 무심하게 창을 뿌려댔다.
아홉, 여덟, 일곱.
유단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은 마수를 도륙하기 위해 거병 네 기가 걸음을 떼는 순간, 유단은 오른 손목을 꺾었다.
남은 마수들이 방향을 꺾었다.
거병들도 자연스럽게 진로를 바꿨다.
그리고.
“웰컴이다, 씹새들아.”
쿠구구궁, 불안정한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함정 끝자락에 서 있던 거병 한 기만 바깥으로 탈출했고, 나머진 허우적거리며 땅 밑으로 푹 꺼졌다.
“아무리 경량화했다고 해도 쇳덩이는 쇳덩이야. 접지압을 못 버티고 바닥이 꺼지면 다 뒤지는 거야.”
-중병기는 저렇게 처리하면 되겠어.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5m 지하로 추락한 거병은 서로 엉켜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낙하 충격이야 마나 씰과 웨이브 겔로 막는다고 해도, 각 관절에 가해진 부담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하부 모듈 중 발목 부위는 기능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을 것이다.
-이봐! 괜찮아?
살아남은 한 기의 거병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재수 없게 지면이 꺼졌다고 생각하는지, 다급함이 없었다.
당연하지.
나라도 입장이 바뀌었다면 운을 탓했을 것이다.
마수에게 유도당해 함정에 빠졌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지.
인식의 차.
강력한 육체를 지녔지만, 지능은 들짐승에 불과하다는 고정 관념.
“그게 너희들 목을 조를 거야.”
통제권을 게웰에게 넘겨줬다. 공중에 머물던 시야가 마수 안쪽으로 돌아왔다.
“네 차례야.”
기운이 쭉 빠졌다. 다수의 마수를 조종하는 건 역시 진이 빠진다.
-몸을 움직이는 법도 연습해 둬야 한다.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를 대비해서.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균열 사이에 숨어 있던 본체가 지상으로 솟구쳤다.
비루하게 연명하던 1년 전과는 다르다. 영양분을 섭취하고 자생하며 크기를 키웠다.
예전만큼의 힘을 회복하는 것도 머지않았다.
-뭐야!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웰의 본체에서 수십 가닥의 촉수가 뿜어져 나왔다.
시간을 줄 필요는 없다. 날카로운 촉수가 체임버 덮개를 꿰뚫었다.
안에 탄 조종사가 어찌 됐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촉수를 타고 인간의 피 맛이 전해졌다.
유단은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의 피에는 힘이 담겨 있다. 붙들어둔 여분의 마나가 게웰의 살을 단단하게 만들고, 심상세계를 굳건하게 다져준다.
-코렐! 무슨 일이야! 이봐!
구덩이에 빠진 거병 쪽에서 소리가 났다. 게웰이 천천히 움직여 모습을 드러냈다.
절망에 찬 소리가 그제야 구덩이 안을 가득 채웠다.
저들은 이제야 파악한 것이다.
작은 친구들을 학살한 대가가 무엇인지.
구덩이를 뒤덮을 정도의 촉수가 생성됐다. 유단은 간질간질한 감각을 집중해서 기억했다.
몸의 사용법을 익혀야 하니까.
가늘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촉수의 비가 구덩이 안쪽으로 떨어졌다.
콰드득, 콰득!
강도 높은 외장갑도 좁은 면적에 연이어 가해지는 공격을 버텨낼 수는 없다.
체임버 덮개가 뚫렸다.
유단은 벌어진 강판 안쪽을 바라봤다. 새하얗게 질린 용병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턱, 축소된 동공, 얼굴 전체를 뒤덮은 땀.
“전략병기는 말이야, 멍청하게 다루면 안 돼. 잘 배웠어? 그러면 그만 꺼져.”
검은 촉수가 용병의 얼굴을 관통했다.
비명은 없었다.
조용한 식사만이 뒤를 이을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