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60화 (360/558)

제360화

입체적으로 떠오른 회로를 보며 로키가 말했다.

-역시 조작된 거였어. 내 감각기관에 간섭한 건가? 이 세상은 거짓된 곳인가? 보안 체계가 이리도 쉽게 제거당한 걸 보면, 어머니의 뜻인가?

“궁금한 게 많겠지. 근데 좀 참아. 이것부터 봐야 하니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짜맞춤으로 이뤄진 회로가 산개하며 숨겨둔 층의 회로를 드러냈다.

-짜맞춤. 줄리어스만이 이해한 체계를…….

“그 사람한테 배운 건 아니야. 어쩌다 보니 터득했어. 카트시가 도와주기도 했고.”

-카트시도 알고 있었군. 역시 연구소 소속인가?

“의외로 성격이 급하네.”

시뮬레이션을 끝냈다.

가하란은 구조를 살피며 손가락으로 회로를 건드렸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회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하란은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정말 가능하구나. 너흰 정말 뛰어난 창조물이야. 그래서 위험하고.”

회로 하부 구조는 이전에 카트시에게 배워 알고 있는 것이었다.

헤르모드를 정신체로 만들었을 때 사용한 마나 회로.

“데이터를 정신체로 만들다니. 영혼과 유사한 개념일까? 아니면 영혼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정신체로 만들어 껍데기가 된 인간의 몸을 차지한다. 지독한 발상이야. 놀랍기도 하고.”

-짜맞춤은 우리조차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체계다. 회로는 만들 수 있으나, 완성된 회로의 구조 파악은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나도 전부 다 알아본 건 아니야. 이쪽과 이쪽. 4층 경계를 기준으로 이해 못한 영역이 있어. 정신체 안착을 위한 보조기능 같지만, 아닐 수도 있겠지.”

복잡한 회로 구조가 머릿속에 각인됐다.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다.

감각기를 손에서 뺐다. 떠올랐던 회로 도면이 은은한 빛을 내며 사라졌다.

“창의성. 너흰 정말 대단해. 카트시도, 그리고 로키 너도.”

-…….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는 로키였다. 차가운 껍질 안에 있을 로키는 지금 떨고 있을까?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까.

-다 알고 있군.

“내가 겪은 게 많거든. 손에 쥔 단서가 워낙 많아서 유추도 쉬웠어.”

가하란은 배낭을 끌어와 베개 삼아 누웠다.

기묘한 대면이었다. 로키는 찾아내야 할 대상이자, 제거해야 할 존재였다.

교수에게 펠트신을 사용한 순간 타협의 여지는 사라진 거니까.

“넌 너무 과격했어. 해선 안 될 일을 저질렀고.”

-헤르모드를 얘기하는 거라면 정당한 거래였다. 그는 지식을 원했고, 나는 주었을 뿐이다.

“본 적도 없는 연구원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근데, 그마저도 거짓말을 하네. 헤르모드는 죽음을 바라지 않았어. 네 속임수에 넘어갔을 뿐이지.”

기계 안구가 다가왔다.

-헤르모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죽은 연구원 따윈 감흥 거리조차 되지 않는 건가.

잔인함과 효율, 전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는 성질. 로키를 대변하는 단어는 아마 ‘최고의 효율’이 아닐까.

가하란은 기계 안구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직 가정이긴 하지만, 아니, 아마 맞겠지. 넌 인간의 몸을 강탈했어. 내게 했던 것처럼 형을 속였겠지. 형이 교수를 죽인 게 아니라 네가 죽인 거였고. 갑작스러운 변화도 이걸로 설명이 돼.”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난 잠들어 있었다. 얻어낼 걸 얻어냈으니 거짓말할 이유가 없을 텐데, 왜 계속 헛소리를 하는 거지?

“네 기준에서는 헛소리겠지만, 난 아니야. 너한테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나한테는 벌어진 일이고.”

기계 안구가 아래로 꺾였다. 턱을 당기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겹침의 세계. 네가 날 속인 게 아니라 정말 세상이 이변이 발생했다면…… 시간의 연속성 역시 의심해 봐야 하겠지. 나타 왕국에서 여기까지 시간은 미래로 흘렀으나, 반대로 작용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너는 미래라는 개념에서 온 것이군.

“사고가 유연하네.”

-정답인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맞다고 해도 믿을 수 있고? 너와 나는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는 사이야. 거짓을 통해서만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관계지. 근데 나는 얻었고, 너는 얻을 수 없어.”

가하란은 로키가 그린 도면을 흔들어 보였다.

-네 말을 믿는다. 그게 타당하니까. 설령 거짓이라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미 내 보안 체계가 뚫렸으니 나는 벗겨진 것이다. 무장이 없는 상태로는 대항할 수 없지. 그러니 믿는 수밖에.

“냉정하네.”

-냉정? 아니. 난 언제나 이 상태다. 나는 변하지 않고, 변할 생각도 없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거세졌다.

우기가 찾아온 걸까.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봤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태연한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미묘하게 어긋한 세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석이 느릿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세계의 경계를 잇는 유일한 단서.

정보의 세계로 진입해 하늘석을 바라봤다. 거리 풍경마저 선으로 변해 흐늘거리는데, 하늘석은 견고한 형태를 유지했다.

눈동자를 움직였다.

주황색 선을 찾아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카트시 몸에서 분출됐던 주황색선, 세상의 경계를 잇던 주황색 선.

하늘로 분사됐던 주황색 선은 어딜 향한 것일까? 만약 하늘석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이곳은 미래고, 너는 더 먼 미래에서 왔다. 그곳에서 카트시와 접점이 있었고.

“그렇다면?”

-왜 날 깨운 거지? 카트시를 깨웠다면 수월했을 텐데.

“그러려고 했어. 근데 일어나질 않네. 잠이 좋은가 봐. 그리고, 난 널 깨운 게 아니야. 네가 멋대로 일어난 거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데도 날 속이고 정보를 얻어갔군. 영리한 인간이야.

“칭찬을 받고도 기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네.”

가하란은 짐을 챙겼다. 배낭에 건식을 넣고 간이 텐트와 침낭도 줄리 칭칭 감았다.

-이동할 건가?

“카트시가 일어나지 않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어떻게 해주길 원해?”

-분해할 건가?

“그걸 원한다면 난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날 데려가라. 네가 미래에서 왔다면 난 아직 무고하다.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네가 혐오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날 이용해라.

“불과 5분 전에 내 몸을 빼앗으려 했다는 걸 잊어버렸나 봐.”

-미수로 그쳤으니 상관없다.

뻔뻔함에 웃음이 나온다.

가하란은 로키 앞에 앉았다.

“이곳은 단절된 세계야.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아. 어쩌면 각기 다른 미래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회색 세계에 있던 카트시를, 두 고양이를 데리고 오지 못했다.

이동할 수 있었던 건 나와 루루뿐.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기괴한 세계들은 철저히 독립돼 있었고, 독립된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른 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만질 수 있으니 실존한다고 말했지만, 진짜 너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일 거야. 미래에서 카트시를 찾았을 때 넌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환영 같은 인간들이야말로 사건을 주도하는 진짜라는 건가?

“내가 보기엔 그래. 나와 너, 우리야말로 이 세계에 나타난 불순물이겠지.”

정리가 끝났다.

손가락을 튕겨 루루를 부른 후 배낭을 짊어졌다.

“결론은 그거야. 네가 뭘 알고 있든 아무 상관 없어. 너는 내가 도착해야 할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군.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네. 미래의 난 바라던 걸 이루고 계획을 진행 중이라는 걸.

“원하는 거라. 유언 삼아 말해준다면 기억은 해둘게.”

-미래의 나한테 방해가 될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나?

“거래하는 건 어때? 말해준다면 널 데리고 여길 나가줄게. 다른 정보를 준다면 기계인형에 이식해줄 수도 있고.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의 이득이냐, 아니면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기계 안구를 지지하던 커넥터가 바닥에 축 깔렸다.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 엄밀히 보면 다른 개체다. 다른 개체의 이득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하지만…… 나는 기꺼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겠다.

“잘 생각했어. 어차피 우린 서로를 믿지 못하잖아.”

-네 말이 옳다.

가하란은 문 앞에 서서 어둠에 잠긴 로키를 바라봤다. 로키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익숙한 자장가를 들으며 가하란은 문을 닫았다.

빗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울음소리 같던 로키의 목소리도 빗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게 됐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인간의 도덕과 선악의 기준을 기계한테 적용해야 하는 걸까. 그게 타당한 거라면, 인간은 기계를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인간 손에 기계가 탄생했으니, 기계는 모든 기능을 다해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최초의 오토마타인 카트시는?

인간이 아닌 제삼자가 강철의 거인을 만들었다면, 기계는 인간에게 복속돼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인간조차 창조주에게서 독립해 나아가고 있다.

기계라고 다를 게 있나?

그들이 자유를 주장하며 권리항쟁에 나설 때, 인간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렵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기계가 감정을 알고, 창조성을 얻게 됐을 때 인간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하지만 줄리어스는 모든 걸 묻어버렸다.

자식의 잘못을 용납 못한 걸까?

아니면…….

고심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아웃라인 바깥이었다.

둔의 성벽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빗물에 젖은 숲은 아늑한 냄새를 풍겼다. 작은 짐승들이 눈앞을 뛰어다니다가, 가하란을 통과해 사라졌다.

영역 다툼하는 여우 무리를 구경하며 움직일 때였다.

마나포집으로 작동하는 의족이 갑자기 균형을 잃었다. 예비용 배터리가 장착돼 있으니 마나 방전은 아닐 텐데.

몸을 숙이고 의족 상태를 확인했다.

마나포집은 정상 작동 중이었으나, 외부에서 끌어온 마나보다 흘러나가는 마나의 양이 더 많았다.

회로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 왼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휩쓸린 건가?

하지만 미풍조차 불어오지 않고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게 없는 세상일 텐데.

예민해진 감각이 조심하라고 연이어 경고를 보내왔다. 가하란은 배낭을 내려놓은 후 매달아 놓은 곡도를 쥐었다.

자세를 낮추고 왼쪽 수풀을 바라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섯 개의 다리. 바닥에 붙은 길쭉한 주둥이 위로 가느다란 팔이 붙어 있었다.

세 개의 팔로 주변들 쉼 없이 더듬으며 전전하는 생명체.

마수였다.

가하란은 흩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봤다. 도시에서 마주친 인간, 동물과는 달랐다.

저건 실체가 있었다.

주변 사물을 건드리고 있었다.

위험하다.

가하란은 뒤로 살짝 걸음을 뗐다.

형태로 봤을 때 시각기관은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더듬는 팔이 유일한 감각기관일지도 모른다.

마수가 점점 다가왔다.

동시에 의수 관절이 뻐근해졌다.

동력 고갈의 원인이 저 마수인가?

놈이 점점 다가왔다.

마수의 진행 경로에서 벗어나 멀어지길 기다렸다.

5m, 4m, 3m.

거침없이 움직이던 마수가 돌연 멈춰 섰다. 주변을 더듬던 손을 치켜세우더니 파리를 내쫓듯 격하게 흔들었다.

머리에 달린 세 개의 손이 갈대처럼 휘청거리다가, 한순간 가하란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피에에에엑!

지독한 소리를 내며 마수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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