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공동을 돌아다니며 기계를 수거하는 사람들. 안경 낀 남자가 바닥에 놓인 정체불명의 부품을 들었다.
땅에 남아 있는 부품과 남자 손에 들린 부품.
-실체가 없는 인간들. 저들은 이쪽에 간섭하지 못하는 건가?
“모르겠어. 저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지. 이 세계가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거든.”
가하란은 눈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바라봤다.
“이건 수거 목록에 있는 건가?”
“왼쪽 거는 두고 오른쪽 것만 가지고 나와.”
“내버려 둘 바에는 녹여서 뭐라도 만드는 게 낫지 않나?”
“녹이는 게 더 손해라고 하니 냅둬. 어차피 여긴 쓰레기장이야. 연구원들이 요구하는 것만 잘 챙겨서 가져다주면 돼.”
로키의 본체를 든 사람들이 공동 밖으로 나갔다.
-재미있네. 저기 인간 손에 들려 나가는 게 실체일지도 몰라. 여기 남아서 너와 떠드는 건 허상일 수도 있고.
“존재 여부만 따지자면 만질 수 있는 네가 실체 아닐까?”
가하란은 손으로 로키의 본체를 살짝 밀었다.
-줄이 봤으면 아주 좋아했을 거야. 겹침이 발생한 세계. 흥미로운 주제지.
로키 역시 줄리어스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증오 때문일까.
로키는 잔인한 기계다. 인간을 실험대에 올리는 걸 주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살육에 미친 비이성적인 지성체는 아니리라.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뿐.
로키가 원하는 것.
무엇을 바라고 유단을 움직여 교수를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그 원숭이는 뭐지?
품에서 얼굴을 내민 루루가 로키를 보며 이빨을 세웠다.
“이곳에 남은 내 유일한 친구.”
-원숭이가 친구라니. 딱하군.
“영리해서 말도 알아들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얘가 본체 위에서 오줌 싸는 걸 너도 바라진 않잖아?”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니 일단 사과하지. 미안하다, 이름 모를 원숭아.
기계 안구가 입구를 바라봤다.
-일단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기서 더 할 게 있나?
“아니. 슬슬 나가려던 차였어.”
가방을 챙겨 일어설 때였다.
-나도 데리고 가야지.
“널?”
-여기 내버려 둘 셈인가? 날 깨워놓고?
“난 저 유령 같은 사람들을 쫓아서 여기 왔을 뿐이야. 뭐가 있나 해서. 근데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으니 이만 나가야지.”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나는 우수하니까.
“자화자찬하는 사람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던데.”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난 기계다. 객관적인 데이터로 봤을 때 난 우수하다. 너에게 분명 도움이 될 테지.
바라던 말이었다.
도움. 그 달콤한 말로 유단을 속인 걸까?
대화에서 우위를 선점했으니 거래는 수월할 것이다.
가하란은 로키 앞에 섰다.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어?”
-지식. 내 안에 든 지식으로 네 노동력을 사겠다.
“여긴 나 혼자뿐인 세계야. 내일 먹을 끼니가 가장 큰 고민인 곳에서 네가 가진 지식이 쓸모가 있을까?”
-넌 어리석기에 알 수 없다. 내 안에 든 건 혁신 그 자체다. 혼돈뿐인 이 세계를 규명하고 빠져나갈 방법도 모색할 수 있다.
“그렇게 대단한 지식이 있다면 지금 당장 쓸 만한 걸 알려줘 봐.”
-그건 불가능하다.
“왜? 거짓말이라?”
-기계는 거짓을 모른다. 가장 기초적인 상식조차 모르다니. 정말 수준이 떨어지는군.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안한데, 난 집안 대대로 들기름 짜내는 일을 해왔어. 기계니 마법공학이니 내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다고. 그러니 네가 백날 대단하다고 떠든들 난 몰라. 오히려 내가 묻고 싶네. 너 들기름을 어떤 포에 넣고 쥐어짜야 잘 짜지는지 알고 있어?”
-대단한 기술이라 말이 안 나오는군.
“네 머릿속에 얼마나 대단한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써먹겠어. 난 아는 게 없는데.”
몸을 돌려 한 걸음 뗐다. 로키가 말을 걸어왔다.
-쉬운 방법이 있다.
“쉬운 방법?”
-기계의 언어체계를 네 안에 심어놓으면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심어? 뭐 몸에 씨앗이라도 박게?”
-일단 날 밖으로 데려가라. 나가서 얘기하지.
“그 정도야 뭐.”
카트시를 위해 준비해 온 밧줄로 로키를 묶었다. 공동을 벗어나기 직전, 가하란은 뒤를 슬쩍 돌아봤다.
홀로 남겨진 카트시를 눈에 담은 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깊군.
“꼭꼭 숨겨져 있어서 보물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잡동사니뿐이었어.”
밖으로 나왔다.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건축자재를 실은 짐마차가 가하란을 통과해 지나갔다.
-살아 움직이는 건 정말 너뿐인 것 같군.
“모르지. 도시 밖에는 있을지도.”
가하란은 천으로 로키의 본체와 안구를 덮어버렸다.
“혹시 고장 날지도 모르니까 덮어줄게. 안 보여도 좀 참아.”
-습기 따위에 고장 나지 않는다.
“그래도 모르잖아.”
시야를 차단하는 것으로 정보습득에 제한을 걸었다.
가하란은 별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으며 중앙 군부로 걸음을 옮겼다.
-대대로 들기름을 짰다고?
“그래. 기술이 꽤 필요한 일이야. 넌 무시했지만.”
-마법공학과도 인연이 없다고 했지. 근데 유사정령은 어떻게 알고 있지?
“그 정도 상식은 알아.”
-감각장치는 어떻게 연결했지?
“기계인형을 몇 번 손봐준 적 있으니까. 짐을 나르는 기계인형이 우리 가게도 한 대 있거든. 물론 부품을 뽑아서 갈아 끼우는 단순한 적업이었지만.”
-모듈화가 제법 발달했나 보군. 나타에서 몇백 년이 지났다고 하니 많은 게 달라졌겠어.
건물 안으로 들어와 로키를 내려놓았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말했다.
“말해봐.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어? 어려운 말로 하면 못 알아먹으니까 최대한 쉽게 해봐.”
-그 전에 어쩌다 세상이 이런 꼴이 됐는지, 그것부터 말해 봐. 상황을 이해해야 적합한 방법을 내놓을 수 있으니까.
“그거야 쉽지.”
가하란은 반듯하게 개어놓은 모포를 가리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근데 자고 일어나니까 이 꼴이 된 거야.”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세상이 바뀌었다?
“그렇다니까.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헤매고 다녔어. 사람들을 붙잡을 수도 없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눈에는 보이는데 잡히지 않는 유령, 미칠 노릇이었지.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하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했어.”
-그렇게 날 찾아낸 거군.
“이제 이 상황이 이해됐어?”
-놀라울 정도로 엉성해.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왜? 거짓말 같아?”
가하란은 뚱한 표정으로 로키를 바라봤다. 정보는 통제돼 있었다. 로키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추로는 진실에 다가설 수 없으니, 로키는 제공된 정보로만 현실을 가늠해야 한다.
뛰어난 두뇌를 지녔다고 한들 이런 환경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로키가 말을 꺼냈다.
-감각은 헛된 것이지. 내가 감각하는 이 모든 게 날 속이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줄은 여전히 감금당한 상태고, 연구소 놈들이 날 해부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걸지도 모르지.
“알아듣게 말해줘. 아까부터 줄, 줄 거리는데 난 그 사람 몰라. 연구소는 또 뭐고?”
로키가 소리 내 웃었다.
-모르는 것인가 모른 척하는 것인가. 사실 그건 중요치 않지. 만약 이 환경이 조성된 것이고, 내 감각기관이 그걸 간파해내지 못한 상황에서 끝난 거니까.
“이 모든 게 거짓 같아?”
-거짓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기계 안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네게 지식을 주마. 기계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지.
“기계어? 그런 걸 배워서 뭐 하게. 어차피 쓸 수도 없는데.”
-혼자 남아 있다고 해도 넌 물건을 만질 수 있다. 기계인형이 보급화된 상황이라면 마법공학 역시 일정 수준을 넘었을 테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하나하나 조사하다 보면 네가 이렇게 된 원인도 알 수 있을 거다.
“미안한데, 난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아. 기름틀 다루는 법을 배우는 데도 한참 걸렸고.”
기계 안구가 한층 더 가까이 왔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반들거리는 반사체가 움직였다.
-내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 내가 제안할 방법은 평범한 학습이 아니다. 기계어의 원천을 네 머릿속에 심어주겠다.
“공부와는 다른 거야?”
-인간의 학습 능력은 아쉬운 부분이 많지. 우린 그걸 보강해서 장기기억 속에 모든 정보를 이식할 수 있다.
“쉽게 좀 말해줘.”
-……하루 만에 기름틀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해주겠단 소리다.
“그게 가능해? 난 머리가 안 좋다니까.”
-정말 머저리 같군.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 모자란 머릿속에 방대한 지식을 새겨 넣어 줄 테니까.
“까칠한 친구네. 알겠어. 나도 방법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발동에 필요한 단순한 회로만 작성하면 된다. 나머지 추가 연산은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로키가 말한 준비물을 구해왔다.
종이와 자, 잉크, 그리고 펜.
-시뮬레이션해서 옮기는 게 구조적으로 안정되겠지만, 너한테 바랄 수는 없으니 마법사들의 방식을 끌어와야겠지.
“마법? 내가 마법을 쓰게 되는 거야?”
-그래. 우리가 고안해낸 아주 편리한 마법이지.
로키가 시키는 대로 선을 그었다.
“이거면 돼?”
-기본 틀만 그려놓고 나머진 내가 해야 한다. 기계 팔을 구해올 수 있나?
“연구단지에 있을 거야. 근데 아무거나 가져와도 돼?”
-상관없다. 내가 회로 조정하면 되니까.
로키의 설명을 들은 후 연구단지로 가 기계 팔을 가져왔다. 하나만 챙기려다가 비슷한 것으로 하나 더 가져왔다.
“맞는지 몰라서 일단 두 개 가져왔어.”
-그거면 됐다. 커넥터로 연결해라.
선을 붙잡아 당기며 물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알고 있기로 기계인형을 움직이려면 마나가 필요해. 우리 집 기계인형도 커넥터로 연결해 마나를 공급받았고. 근데 넌…… 그냥 움직이네?”
-마나포집. 내 지식을 이어받으면 너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말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
-평면상에 존재하는 정보체계를 가눕타 이형식에 의거해 누카 유도식 제2 법칙을 접합. 이 중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나?
“아니.”
-그러면 그 입 닫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기계 팔이 움직였다.
종이 위에 회로가 새겨졌다.
가하란은 따분하다는 듯이 그어지는 선을 바라봤다.
마나 회로로 작동하는 마법.
‘32번’ 인형에 적용한 방식.
늘어지는 표정을 지었으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회전 중이었다.
정보의 세계로 들어가 로키가 작성 중인 회로를 살폈다.
카트시가 알려준 회로 도면 중 저것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 낙서로 뭘 할 수 있는 건데?”
-이건 낙서가 아니다. 우리가 개발한 마법이지.
“그래? 마법은 사람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몇백 년이 지났지만 고루한 관념은 부서지지 않았군. 설명하려면 복잡하니 이렇게 외워라. 위대한 어머니께서 길을 찾아냈다고.
가하란은 완성된 도안을 넘겨받았다.
-본다고 해서 알 수 없으니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로키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안주머니에 넣어둔 감각기를 끼고 완성된 도면을 시물레이션했다.
-너.
“왜?”
가하란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