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58화 (358/558)

제358화

“이건…… 못 먹겠네.”

가하란은 코를 틀어막았다. 부패한 고기 위로 파리가 날아다녔다.

손을 휘휘 저으며 안쪽 상자를 열었다.

누런 밀랍 덩어리가 보였다.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안쪽에 잘 말린 고기가 들어 있었다.

돼지 다리 살 같은데,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염지를 제대로 해놓았는지 썩은 내 대신 고릿한 풍미가 올라왔다.

상자째 들고 밖으로 나왔다.

쏟아붓던 장대비가 가늘게 변해 있었다. 방수포로 상자를 덮고 중앙군부로 향했다.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하나.

시간이 멈춘 회색빛 세계에서는 음식이 썩지 않았다. 사과 한 알만 먹어도 배가 불렀기에 식자재로 고민한 적도 없고.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음식이 썩는다.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허기가 져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기형적인 생태계에서 2년간 보내다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니 자잘한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화구에 불을 올리고 달군 팬에 물을 담았다. 싹이 난 감자를 손질하고 밖에서 챙겨온 다리 살을 찢어 같이 넣었다.

죽으로 배를 채우고 모포 위에 몸을 뉘었다.

밤이 밀려들고 있었다.

비가 그쳐야 내일 작업을 이어갈 텐데.

‘C’ 같은 거병이 있다면 단숨에 땅을 파고 내려갔겠지만, 이곳은 나타 왕국이 아닌 둔이었다.

거병이 없는 건 아니다.

거병관리국과 연구단지에 방치된 거병이 있었다.

문제는 연료. 전고 20m 이상의 거대한 거병을 움직이려면 막대한 마나 응축봉이 필요했다.

시설 내부를 찾아봤으나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물자 반입이 안 된 건지, 아니면 밀폐된 공간에 숨겨둔 건지.

편안한 차림의 군인들이 앞을 지나갔다. 소통이 불가능한 유령 같은 존재들.

“둘째 낳았다며?”

“쌍둥이야.”

“입 하나 더 늘었으니 고생해야겠네.”

“그나마 사내놈이라 다행이지. 밥벌이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군인들의 잡담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빗소리에 말소리가 뭉개지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변했다.

잠깐 잠든 것 같았는데 창으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낮이 바뀐다는 건 축복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중앙 건물을 나섰다. 도열한 군인들을 뚫고 제철소로 향했다.

작업복 차림의 사람을 지나 어제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섰다.

웅덩이에 고인 물을 삽으로 퍼냈다.

이쯤인 거 같은데.

팅, 소리와 함께 손아귀가 아릿해졌다. 나무로 된 덮개가 보였다.

따로 잠금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홈에 손가락을 넣고 덮개를 들어 올렸다.

어릴 때 봤던 사다리가 반겨주었다.

가방에서 유등을 꺼내 허리춤에 달고 내려갔다. 사다리 끝에서 시작된 좁은 길을 걸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쯤에서 사다리가 하나 더 나와야 하는데.

가하란은 미소를 지었다. 발밑에 사다리가 있었다. 천천히 내려가 유등을 치켜들었다.

“그대로네.”

카트시와 만났던 거대한 공동.

사방으로 뻗어나간 주황빛이 버려진 기계들을 비췄다.

감회에 젖어 잠시 서 있다가, 카트시가 기다리고 있을 공동 끝으로 향했다.

기억과 다른 부분이 몇몇 보였으나 대체로 변한 건 없었다.

가하란은 회색 천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유사정령이 보였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카트시만 놓여 있었는데.

왼쪽에 있는 건 카트시가 맞았다. 그렇다면 오른쪽에 있는 이건 뭐지?

일단 카트시 본체에 손을 올렸다.

첫 대면 때처럼 정보의 세계로 진입해 마력선 짜맞춤을 확인했다.

외부 자극에 반응한 카트시가 곧 눈을 뜨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카트시?”

대답이 없었다. 보안 형식을 변경하며 말을 건네와야 할 친구가 침묵한 채 멈춰 있었다.

감각기를 끼고 시그니처를 불러내 몇 번이고 접촉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

본체 앞에 주저앉았다.

시간이란 변수가 문제인 걸까.

가하란은 차가운 본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이 그렇게도 좋아?”

* * *

-좋아하지 않아요.

밀레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잠깐만 쉬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거병 안에서 밤을 보내버렸다.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루인, 뭐라고 한 거야? 뭐가 안 좋다고?”

잠결이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전 말하지 않았어요.

루인의 오토마타가 대꾸했다.

“그래? 내가 헛걸 들었나 보네. 지금 몇 시야?”

-8시요.

“푹 자긴 잤네.”

밀레나는 왼쪽에 걸려있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2년째 잠만 자는 까칠한 친구.

가죽끈에 매인 카트시를 매만지고 조정석에서 일어설 때였다.

-정지한 줄 알았는데 말도 하네요.

루인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제 안에 보관 중인 유사정령이요. 기능이 정지한 줄 알았는데 방금 제 감각장치에 간섭해서 말했어요.

“……간섭했다고?”

-네. 연결된 커넥터를 통해 신호가 전달됐어요. 제 보안 프로토콜을 무시한 채 감각장치를 이용했고요. 위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연결을 끊어주세요.

밀레나는 카트시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카트시. 너 깨어난 거야? 말할 수 있어?”

대답이 없었다.

“루인! 지금은 어때? 신호 잡히는 게 있어?”

-아니요. 조금 전 시행된 언어 발산을 끝으로 침묵 상태로 전환됐어요. 재기동할 가능성이 있으니 커넥터 연결을 해제해 주세요. 작전 중 간섭이 일어나면 연산에 오류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당장 움직일 일 없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보다 네 쪽에서 말을 걸어볼 수 있겠어?”

-시도해 볼게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가하란의 실종과 함께 카트시는 정지해 버렸다. 엔엔의 말에 따르면 보안책임자인 가하란만이 카트시를 깨울 수 있다.

혹시 돌아온 걸까?

가하란이?

-징후 없음. 처음 연결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 침묵 상태예요.

“하지만 조금 전까지 깨어 있었던 건 확실하지?”

-네. 간섭이 일어났으니까요.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희망의 편린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인, 계속 지켜봐 줘. 카트시가 말을 하면 전부 기억해 뒀다가 나한테 전해주고.”

-간섭으로 인한 위험이 발생할 수도 있어요. 보안 프로토콜이 제 기능을 못하면 오토마타의 운동지각 제어권을 빼앗길 수도 있고요.

“불안한 마음 이해해. 누가 네 몸을 빼앗는다고 하면 걱정되겠지.”

루인이 고저 없는 목소리를 냈다.

-불안은 제게 없는 요소예요. 전 사용자 매뉴얼에 따라 위험 요소를 알릴 뿐이죠. 밀레나가 원한다면 연결 상태를 유지할게요.

밀레나는 체임버 덮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줘. 그리고 이건 너랑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야. 정비공들한테도 말하지 말고.”

-A1 밀레나의 권한 설정으로 대화 내용을 기억 단자 말단에 숨겨둘게요.

“고마워.”

카트시를 잠시 바라본 후 거병에서 내려왔다.

기계적 결함일 수도 있다. 기대감에 부풀기보다는 냉철하게 지켜보는 게 맞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가슴은 달콤한 희망에 취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하란.”

격납고 밖 하늘을 바라봤다.

만약 돌아온 거라면 얼른 나타나. 뜸 들이는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근데 뭘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지?”

카트시가 했다는 말을 되새김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가하란은 오른쪽에 놓인 유사정령에 손을 올렸다.

과거에는 없었던 유사정령.

본체 형태가 카트시와 유사했다.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 중 하나일까?

마력선 회로에 신호를 주었다.

카트시와 마찬가지로 변화가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본체에 새겨진 마력선이 희미하게 빛을 냈다.

-누구지?

굵은 목소리였다.

단순해 보이는 회로 층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마력선. 짜맞춤을 기반으로 제작된 회로였다.

그렇다는 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까. 일단 내 이름은 가하란이야.”

-가하란?

“어.”

-……줄은 어디 있지?

“줄?”

줄리어스의 애칭인 걸 알지만 모른 척했다.

무시해선 안 될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

유사정령이 침묵했다. 본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마치 호흡하듯 진해졌다가 옅어지길 반복했다.

-정황상 줄이 우리를 버렸겠군. 기억 단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뿐이니까. 줄은 죽은 건가?

“줄이 사람인 거야?”

-그래. 설마 모르는 건가?

“모르겠어. 흔한 이름이라 찾아보면 많이 나오겠지만.”

-줄리어스. 이 이름을 모른다고?

“난 처음 들어.”

-연구실 소속이 아닌 건가? 아니, 나타에 발붙이고 살고 있으면 한 번쯤은…….

“나타?”

-나타 왕국. 설마 이것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나타 왕국은 알아. 몇백 년 전에 멸망한 왕조잖아. 책에서 본 것 같아.”

대화의 공백이 길어졌다. 한참 뒤 유사정령이 다시 말했다.

-몇백 년. 나에겐 찰나에 지나지 않았는데.

가하란은 곁눈질로 카트시를 살피며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이름이 어떻게 돼?”

-이름? 호칭이 중요한가?

“계속 너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

-그렇군. 그래, 이름.

유사정령이 뿌연 빛을 흩뿌리며 말했다.

-헤르모드. 그게 내 이름이다.

가하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은 연구원의 이름.

기만과 거짓말이 섞인 호칭.

유단에게 펠트신 제조법을 넘겨 교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기계.

로키.

“헤르모드. 그게 네 이름이구나.”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날 선 목소리가 안 나오도록 최대한 자중하며 담백하게 음성을 냈다.

-넌 어떻게 날 깨운 거지? 줄이 회로를 완전히 잠가버렸을 텐데.

“나도 모르겠어. 골동품이 있다는 말에 물건들을 치우고 있었는데, 네가 갑자기 깨어났어.”

-골동품? 난 어디에 있는 거지?

“여긴 지하 창고 같은 곳이야. 버려진 기계들의 무덤.”

-그렇군. 정리된 채 버려진 건가.

“근데 나타 왕국이라니, 설마 그때 만들어진 거야?”

-말하기 전에, 감각장치를 달아줄 수 있나? 아무것도 안 보이니 답답한데.

“그거야 어렵지 않지.”

널려 있는 기계들 사이에서 오래된 감각장치를 하나 떼어내 연결했다.

-고맙군.

기계 안구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다 카트시 본체 앞에서 멈춰 섰다.

“왜 그래?”

얼굴 표정을 다잡으며 말했다.

-이것도 깨워봤나?

“얜 아무런 반응이 없어. 내가 만져봐도 소용없고.”

-망가져 버린 건가.

“이 유사정령에 대해 잘 알아?”

-제법 괜찮은 놈이었지. 나보다 먼저 만들어져 성능은 약간 떨어졌지만.

“그래?”

기계 안구가 입구를 바라봤다.

-너 혼자인가?

“상황이 조금 복잡해.”

-복잡하다니?

“여긴 이상한 곳이거든.”

마침 공동 안쪽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 반가운 얼굴이 끼어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엔엔이 청색 재킷을 입은 인간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들췄다.

-사람이군. 칼랑도 하나 껴 있고.

“사람이긴 한데,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야.”

-무슨 소리지?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게 빠르겠네.”

가하란은 무리 지어 다가오는 사람들 앞에 섰다. 몇 명의 남자들이 몸을 통과해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엔엔이 스쳐 지나갔다.

“봤지?”

가하란은 기계 안구에 대고 말했다.

-기이하군.

유사정령, 로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