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57화 (357/558)

제357화

“단장님.”

“그 호칭도 간만이네요. 다들 절 총무라고 불러서요. 물론 데옹은 여전히 빌어먹을 단장, 몹쓸 단장, 그 새끼 등등으로 불러주고 있지만.”

밀레나는 두 남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술병 하나와 술잔 두 개, 그리고 커피잔 하나.

옆에는 카드 뭉치가 놓여 있었다.

“어쩐 일인가요?”

미스터 리가 물었다.

“방금 협회장님을 만났어요.”

“아, 그렇군요. 그래서요?”

“협회장님께서 윤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답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눈동자를 굴려 칼리고를 바라봤다. 짓궂은 웃음만 지은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난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얼른 얘기해요. 원한다면 귀도 닫죠. 아예 구석에 있을까요?”

의자에서 일어난 칼리고가 귀를 막고 방 모서리로 걸어갔다. 구석에 콕 박혀 눈을 꾹 감은 채 멀뚱히 서 있는다.

“……그냥 오시죠.”

“하, 이거 참. 눈치껏 빠져주려고 했는데 밀레나 양의 정식 초대를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겠네요. 윤, 자리 좀 만들어봐요. 아주 재미난 얘기가 나올 것 같으니까.”

숨 한번 들이켜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한 번 정도는 혀가 꼬여서 부정확한 발음이 나올 법도 한데.

그러고 보니 단장님이 말을 더듬거릴 때가 있었나?

“그 표정! 나에 대해 뭔가 궁금증이 생긴 표정이군요. 좋아요, 뭐든 말해봐요. 세상의 비밀까지 들춰내서 대답해 줄 테니.”

제국이 멸망하기 전이었다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바짝 됐을 테지만, 이것저것 경험한 게 많아져서 그런지 담담했다.

어쩌면 협회장의 검을 보고 난 뒤라 신경이 무뎌진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 검보다 대단한 건 없을 테니까.

“사소한 궁금증인데,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단장님도 말실수하실 때가 있나요? 더듬거리신다거나 잘못된 단어를 쓴다거나.”

잠깐의 침묵.

“그건 제가 막 감찰단장으로서 막 1등 귀족의 지위를 획득했을 때였죠. 아, 참으로 오래된 일이네요. 그날은 바람이…….”

칼리고가 주억이며 입을 열 때였다.

미스터 리가 커피잔을 들어 칼리고 입 앞으로 가져갔다.

크게 벌어졌던 칼리고의 입이 서서히 닫혔다.

“얘기들 나눠요. 전 커피나 마실 테니.”

오, 밀레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단장의 입을 닫게 하는 마법이라니.

새삼 윤 아저씨가 위대하게 보였다.

“떠벌대는 이 친구는 잠깐 무시하고, 왜 찾아온 거죠?”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요하다면 중요한 궁금증이 생겼거든요.”

밀레나는 랜더와 나눴던 대화를 미스터 리에게 전했다.

“왜 협회장님이 도시 밖 마수를 쓸어내지 않는가.”

“옆에서 보고 나니까 확신이 들었어요. 협회장님의 힘이라면 지금 도시 밖에서 날뛰고 있는 마수를 단번에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소극적인 방어가 아닌 선수를 치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니에요. 분명 가능하겠죠. 시간이 걸리겠지만, 될 거예요.”

미스터 리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향한 곳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밀레나 씨는 저 파리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파리요? 귀찮은 놈이죠. 병을 나르기도 하고, 음식에 꼬이면 금방 썩고.”

“싹 다 없애버리면 환경이 좋아지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죠? 파리 애호가들이야 마음이 아프겠지만.”

미스터 리가 손을 휘저었다. 근처를 날아다니던 파리가 창문 사이로 빠져나갔다.

“환경이란 건 알 수가 없어요.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긴밀하게 엮인 경우가 있죠.”

“그게 마수와 무슨 상관이죠?”

“마수 역시 환경의 일부일지도 몰라요.”

“마수가요?”

미스터 리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가 있던 곳은 집요한 기술이 많았어요. 그중에서는 번식능력을 제거해 종의 개체를 줄이는 기술 같은 것도 있었죠.”

“번식능력을 제거해요?”

“자세한 거야 저도 알 수 없어요. 그런 게 개발됐다, 라고 신문에서 봤으니까요. 아무튼 아주 징그러운 나방이 있었어요. 여름철만 되면 도심이 그 나방 사체로 가득했죠. 공원에 가면 누런 체액으로 뒤덮여 있는 거예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아까 말한 기술이 적용됐죠. 효과는 놀라웠어요. 개체수가 순식간에 줄었죠. 공원은 깨끗해지고 미화원들은 기뻐했어요. 주민들도 환영했고요.”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네요.”

“네. 당장에는 괜찮아 보였어요. 문제는 그 일이 있고 7년 정도 후에 나타났죠. 도심의 수목들이 갑자기 말라비틀어진 거예요.”

“나무들이 왜요?”

“연구 끝에 밝혀진 건데, 전멸시킨 나방들이 도심 가로수들을 보호하고 있었어요. 나무뿌리에 기생해 생육을 망치는 균들이 있는데, 나방 애벌레의 배설물이 그 균을 억제하고 있었던 거죠.”

이야기를 듣던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균이란 게…….”

“아주 작은 생명체라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 물론 다르긴 하지만.”

“윤 아저씨가 살던 곳은 정말 신기하네요. 그런 걸 다 찾아내고.”

“그쪽 사람들은 오히려 여길 더 신기해할 겁니다. 마법이란 말에 뒤로 나자빠지겠죠.”

친절한 설명 덕분에 이해가 단번에 됐다.

“급격한 변화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런 뜻이죠?”

미스터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장님의 힘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죠.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난 힘이에요. 그런 힘이 이런 불완전한 세계에 지속적으로 쓰인다?”

“나무가 말라비틀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뭐든 적당하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기에 협회장님도 주변을 지키는 데만 힘을 쓰시죠. 하지만, 그 주변이라는 게 참 애매하잖아요?”

“애매하죠.”

“그렇기에 협회장님은 ‘계’나 ‘틈’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시는 겁니다. 그쪽은 삐끗하면 현실 전체가 붕괴할 수 있으니 자중할 필요가 없죠.”

“거인에게는 그에 맞는 일거리가 있다, 이해했어요.”

밀레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위험한 마수들도 협회장님 시선에서는 품어야 할 존재일지도 모르겠네요.”

“차차 연구가 진행돼 어느 정도 정리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명되면, 그땐 힘을 빌려주실 겁니다. 물론 뒤로 물러나 계실 확률이 높긴 하죠. 어디까지나 우리 모두의 자립이 목표니까요.”

자립.

협회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신의 아이들이, 신이란 이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창조주도 계 바깥에서 왔다고 했죠?”

“네. 맞아요.”

“그렇다는 건 계 너머에는 협회장님 같은 무서운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입을 꾹 틀어막고 듣고만 있던 칼리고가 끼어들었다.

“괴물들이 득실득실하겠죠. 그러니 우리는 견고한 울타리를 세워 괴물들을 막아야 하고요. 자구책이 있어야 협상 테이블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솔직히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다.

인간관계조차 말끔히 정리하지 못하는데, 계 밖에서 올지도 모르는 괴물들이라니.

“전 제 주변이나 잘 지켜야겠네요.”

“그거면 충분해요.”

미스터 리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앉아 있었더니 피곤하네요. 잠깐 걷고 올 테니 얘기들 나눠요.”

방문이 닫혔다.

칼리고가 술잔을 내밀었다.

“어때요? 개성 강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생활은.”

밀레나는 술을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달큰한 주향이 기분 좋게 퍼져나갔다.

“그렇게 좋지도 그렇게 나쁘지도 않아요. 원해서 참여하긴 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고.”

“다들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그러니 고심할 필요 없어요. 뭐든 어떻게 되겠죠. 어쩔 수 없는 일이 터지면…… 랜더 씨를 던져버리면 수습될 테고.”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친구 좋다는 게 뭡니까? 다 그런 거지.”

하하 웃던 칼리고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2년 정도 된 건가요.”

무엇을 기점으로 한 2년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단장과 공유한 것들 중 2년과 연관인 건 한 사람뿐이니까.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지금도 믿기는 해요. 근데…… 믿음과 별개로 걔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밀레나는 손을 뒤로 뻗어 스카프를 매만졌다.

“지금도 때때로 생각해요. 거기서 내가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밀레나 양 대신 가하란이 제 앞에 앉아 푸념하고 있겠죠.”

“그럴까요?”

“그럴 겁니다.”

밀레나는 술잔을 밀었다.

“돌아가야겠네요. 내일도 일정이 있으니.”

“쉴 땐 제대로 쉬는 게 좋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몸 하난 튼튼하니까. 근데 단장님.”

“네?”

“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는데…… 협회장님, 구치 아저씨, 그리고 단장님. 왜 안 늙는 느낌이죠?”

“신의 장난인가 보죠. 아니면 저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시련?”

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하다. 깊게 질문하지는 않았다. 분명 상상을 뛰어넘는 문제와 엮여 있을 테니까.

골치 아픈 건 사양이다.

“단장님도 합류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전 이네빌 씨와 따로 조사할 게 있어서 금방 떠날 겁니다.”

“협회장님도 자리를 비우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가시나요?”

“그 양반은 따로 놀 거예요. 혹시 궁금한가요? 제가 뭘 조사 중인지.”

“알면 머리 아플 거 같으니 호기심은 접어둘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리고가 일어나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마수가 날뛰고 있는데, 좀 특이한 그룹이 확인됐어요. 저들끼리 난투질 하다가 도시로 돌진하는 게 아니라 전략을 쓰듯 수를 나눠 문을 두드리고 있죠.”

“……정말 끔찍한 소리네요. 마수가 전략을 펼쳐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자세한 건 가서 확인해 봐야겠죠.”

“제발 아니길 빌게요. 개인으로 대항하기 힘든 괴물들이 짝을 이뤄 공격해 온다면, 그땐 정말 지옥이 펼쳐질 테니.”

도리질을 치며 방을 나섰다.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마수만으로도 위험한데, 전략을 구사한다?

방어가 허술한 도시는 단숨에 함락당할 것이다.

숙소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격납고로 향했다. 띄엄띄엄 놓인 거병들을 지나 ‘루인’ 앞에 섰다.

체임버 덮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면시간은 되도록 지켜야 해요.

“알아. 하지만 오늘은 잠이 안 올 거 같아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

오토마타와 이야기를 나누며 시선을 왼쪽으로 옮겼다. 가죽끈으로 칭칭 감아놓은 카트시가 보였다.

“2년. 벌써 그렇게 됐네.”

밀레나는 카트시를 쓰다듬은 다음 구석에 박아둔 모포로 몸을 덮었다.

“눈 좀 붙일게.”

-자장가를 불러드릴까요?

“아니.”

-……반짝.

“너 못 부르잖아.”

-조용히 있을게요.

밀레나는 작게 웃은 후 눈을 감았다.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금방 꿈을 꿨다.

꿈에서 가하란을 만났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햇볕도 따스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편하게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이 어디가 됐든.

* * *

“내가! 진짜!”

가하란은 씩씩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땅을 파고 쇠를 뜯어내느라 손아귀가 얼얼하지만, 그래도 성과가 있으니 마음은 놓였다.

“조금만 더 파면 될 것 같긴 한데.”

가하란은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았다.

어릴 땐 투발을 따라 편하게 들어갔던 강철의 무덤이었으나, 지금은 두꺼운 지표면과 이 갈리도록 단단한 철판을 뚫고 들어가야 했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시 후.

쏴아아아아, 먹구름이 비를 잔뜩 쏟아내기 시작했다.

“……좋네.”

가하란은 이마를 때리는 비를 맞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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