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뿌리에서 올라오는 마나를 있는 힘껏 빌려 온몸에 뿌렸다. 신경이 바짝 섰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예리해지고, 귀를 파고드는 자잘한 소음들이 한순간 커졌다.
앞뒤 잴 것 없었다.
기교는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 첫수는 있는 힘껏 부딪칠 것이다.
디딤발에 힘을 줬다. 폭발적인 힘이 허벅지에 쏠리며 몸이 튀어 나갔다.
위에서 아래로 긋는, 검술 교본 첫 장에나 나올 법한 정직한 수직 베기.
팅,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검이 빗겨나갔다.
한점을 향해 나아가던 힘이 허무하게 분산됐다. 기우뚱하는 중심을 다잡고 곧바로 몸을 회전시켰다.
검을 수평으로 뉘고 랜더의 측면을 향해 뿌렸다.
팅!
검로는 바뀌었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허무한 쇳소리와 함께 검에 실린 힘이 흩어졌다.
밀레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검과 검이 맞닿으면 찰나 간 힘겨루기에 들어가야 하는데, 랜더는 손목을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대치 국면을 벗어났다.
“좋네요.”
랜더가 가볍게 검을 털었다.
“스콜라에 있었으니 누아 교범과 이나도 교전술을 기반으로 검을 배웠겠군요.”
“예.”
“야전에서도 주로 장검을 썼나요?”
“검하고 이걸 같이 썼어요.”
밀레나는 허리 뒤쪽에 손을 뻗어 단검을 꺼내 들었다.
“투척용?”
“아니요. 백병전용이요. 아룬스나 교전술에서 배웠고, 따로 파난 교관님께 지도받았어요.”
“보여주세요. 파난 교관님께 배웠다면 재능이 있다는 거니.”
“이건 좀 다를 거예요.”
호기롭게 말했지만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장검과 병행하는 일은 자주 없지만, 못하는 건 아니었다.
찌르기로 대응하며 거리를 잰 후 품 안으로 파고들어 갈비뼈 사이에 단검을 꽂아 넣는다.
심플하기에 효율적인 전투술이다.
파난 교관은 말했다.
멋 부리는 기사가 되고 싶으면 예검을 익히고, 살아남는 전사가 되고 싶으면 치졸한 검을 익히라고.
잠시 흩트려놓았던 마나를 다잡았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신체술이라 반동이 금방 찾아올 것이다.
졸도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선에서 마나를 운용하며 기회를 엿봐야 한다.
상체를 살짝 낮추고 빈틈을 찾았다.
놀랍게도 치고 들어갈 만한 구석이 네 곳이나 보였다. 랜더가 봐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먹음직스러운 덫일까.
“밀레나 양이 생각하는 태세는 무엇이죠?”
“속임수. 상대방의 헛수를 유도하는 기술이요.”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틀리지는 않다고 봐요. 태세가 무엇이라 확실하게 정의하긴 힘드니까요.”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것들도 협회장님의 태세인가요? 찌를만한 구석이 꽤 보이는데.”
“글쎄요. 한 번 실험해 보시죠.”
그렇다면.
오른손에 든 장검을 내지르며 전진했다. 장검은 시야를 차단하는 용이고, 목표는 왼쪽 허벅지였다.
캉!
막힌 검이 위로 튀어 올랐다. 바라던 바였다. 랜더의 눈동자가 보였다. 튕겨져 나간 검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허벅지가 비였다. 내지르면 반드시 먹힌다. 역수로 든 단검으로 허벅지를 그으려 할 때였다.
후욱!
랜더의 무릎이 코앞에 있었다.
몸이 굳었다. 콧잔등에 닿아있다시피 했던 무릎이 천천히 내려갔다.
“제 수를 완벽하게 읽으셨네요.”
밀레나는 두 손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읽지는 않았어요. 보려면 볼 수야 있지만.”
랜더가 오른손을 들어 몸 곳곳을 가리켰다. 밀레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랜더가 가리킨 곳은 빈틈이라 생각했던 부위였으니까.
“때로는 뛰어난 식별안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요.”
“어렵네요.”
속임수인지 아닌지, 구별할 방법은 없는 걸까? 아니, 구별하려 드는 순간 덫에 걸리는 것이니 예측보다는 감각에 의지해야 할까?
“잘못된 정보를 던져 유도할 수도 있고, 아예 차단해 머뭇거리게 할 수도 있죠.”
말하는 도중에도 랜더의 기세가 바뀌었다. 허술해 보이기도 하고 철벽을 세운 것처럼 견고해 보이기도 했다.
보고 있자니 허탈함만 밀려들었다.
“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협회장님처럼 할 수는 없으니.”
“잡기술 같은 거니 너무 목맬 필요 없어요. 태세는 어디까지나 심리전의 영역이니, 심리를 뛰어넘는 육체를 갖게 되면 해결할 수 있죠.”
“음, 솔직한 심정을 말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밀레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협회장님, 조금 재수 없어요.”
“필렌한테 자주 듣던 말입니다.”
랜더가 다가왔다.
“신체술의 유지 시간을 더 늘려봐요. 그리고 마나 분포의 좌우대칭이 조금 어긋났어요. 주로 쓰는 발에 무의식적으로 마나가 모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걸 제어하지 못하면 안 돼요.”
“적절한 훈련방법이 있을까요?”
“밀레나 양이 해온 방식은 틀리지 않았어요. 단지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는 거죠. 잘 안된다면 왼손과 왼발에 모래주머니를 차봐요. 신체술을 사용할 때 의식적으로 몸 왼편을 좀 더 활성화하고.”
“어릴 때 했던 수련법이네요.”
“방법은 누구나 다 알죠. 단지 그걸 꼼꼼하게 해내는 게 어려울 뿐이고.”
밀레나는 랜더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기, 그 검이 명공께서 만든 검이죠?”
검을 쓰는 자로서 명검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요공방의 주인.
마에스트로 안두카프의 마지막 작품이라 불리는 검.
랜더가 옅은 미소를 짓더니 검을 뽑아 손잡이가 앞으로 향하도록 내밀었다.
“쥐어봐요.”
“네?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건 없죠.”
살짝 긴장하며 검을 쥐었다. 검병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이질감이 느껴졌다.
손잡이부터가 불편했다. 잡기는 잡았는데, 뭔가 거슬렸다. 검신의 무게중심도 마음에 안 들었다.
“어떤가요?”
“……저한테는 안 맞는 거 같아요. 한 번 휘둘러봐도 될까요?”
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잡고 가볍게 그었다.
손맛이 영 없었다. 힘을 받아 매끄럽게 나아가야 하는데, 방지턱이 있는 것처럼 손목에 부담이 걸렸다.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닌데.
“불편할 거예요. 그 검은.”
“네.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쥐는 순간부터 뭔가 어색해요.”
랜더가 검을 넘겨받은 후 천천히 내질렀다. 대기를 수평으로 갈라나가는 검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검과 육체가 하나의 덩어리 같았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협회장님 전용으로 제작된 거군요. 검병, 검신, 검신에 난 홈까지. 모두 협회장님을 위한 거예요.”
“그분의 고집이죠. 딴 놈 줄 생각 말고 네가 쓰다가 버려, 뭐 이런 겁니다.”
명공이 단 한 명의 검사를 위해 제작한 검.
“저도 언젠가 그런 검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지. 일단은 그에 걸맞은 인간이 되어야겠죠?”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물론 이 검은 제가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거지만.”
랜더가 불 꺼진 공관을 올려다봤다.
“늦었네요. 그만 들어가죠.”
“자, 잠깐만요. 하나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을 테니 예의가 아니란 걸 알지만…….”
랜더가 손을 내저었다.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그러니 편하게 말해봐요. 뭘 보고 싶은 거죠?”
밀레나는 과거의 일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제국 성도 상공에 괴생명체가 나타난 날,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죠.”
“그날 전 봤어요. 거병 손에 던져져 하늘로 올라간 협회장님께서 일격에…….”
그 뒤는 말 대신 몸으로 설명했다.
쓱, 싹. 손날을 세워 눈앞에서 그었다.
랜더가 머쓱하게 웃었다.
“거기 계셨군요.”
“먼발치서 봤어요. 봤는데도 믿기지 않았고요.”
“닿지 않는 높이라 곤란하긴 했죠. 힘을 쓰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주변이 엉망이 되니.”
랜더가 검을 쥔 손을 좌우로 살짝 꺾었다.
“‘권역’은 봐도 배울 게 없을 겁니다.”
“설마요. 뭐가 됐든 건지는 게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주변을 살핀 랜더가 검을 늘어트렸다.
“살짝만 보여드릴게요. 분배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분배소가 왜?
반문하기도 전에 랜더의 검이 움직였다. 아래에서 위로, 아주 느긋하게 수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밀레나는 까마득한 절벽을 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 있어서는 안 될 절벽이 갑자기 나타났다.
랜더는 사라지고 절망적인 절벽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신체술을 사용해 저항해보려 했으나 무언가에 단단히 붙들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시계를 가득 메우던 절벽이 사라지고 강렬한 마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반이 미약하게 떨렸다.
주변에 길게 늘어선 마나등이 격하게 점멸했다.
공관 벽이 흔들거리고, 거리를 오가던 순찰단이 “무슨 일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시장님께 한 소리 듣겠군요. 도심에선 이걸 하면 안 됐는데.”
점멸하던 마나등이 파삭 깨져버렸다. 랜더는 턱을 매만진 후 재빨리 검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못 본 걸로 하시죠.”
“아, 네.”
어안이 벙벙했다.
협회장, 아니, 총수의 무력이야 질리도록 들었다. 협회에 들어오고 나서도 곁에서 몇 번 확인까지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상식의 경계가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따라 해보겠다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문득 샬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맹한 정신으로 그 말을 입에 담았다.
“협회장님께서 최전선에 나서신다면, 현 사태는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요? 마수 같은 거 그 검 앞에서는…….”
일신의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협회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만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저 검은 만능이다.
이치를 깨부수고도 남을 힘이다.
대적자가 있을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
“우선은 전 몸이 하나입니다. 모든 장소에 존재할 수 없어요. 그러니 작금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없죠.”
랜더가 둥근 달을 올려다봤다.
“물론 한곳을 쭉 밀고 나가면 그쪽 방향은 전부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예, 분명 가능하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죠?”
“해서는 안 되니까요.”
랜더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공관 옆, 협회원들이 쉬고 있는 막사였다.
“자세한 건 미스터 리에게 물어보시죠.”
“윤 아저씨요?”
“네.”
랜더가 몸을 돌렸다.
“물론 미스터 리의 말을 모두 신용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는 있죠.”
다음에 또 봐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랜더가 떠났다.
밀레나는 땀으로 흥건한 손을 옷에 문지른 후 막사로 뛰어갔다.
2층에 있는 윤의 방문 앞에 섰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있는 걸까?
“아저씨, 물어볼 말이 있어요.”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살며시 열었다.
미스터 리가 먼저 보였고, 그 옆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얘기는 들었는데 이제야 다시 보네요. 오랜만이에요, 밀레나 양.”
자신의 곱슬머리를 툭툭 치며 칼리고가 인사해왔다.
뒤이어 하핫, 하는 경쾌한, 어쩌면 경박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