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오늘은 한 방 먹였나요?”
미스터 리가 국자를 흔들며 물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요. 오늘도 실패했어요. 큰오빠는 봐주는 법이 없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양반, 검술만큼은 집착이 심하죠.”
빙긋 웃으며 말하는 미스터 리 뒤로 테인이 다가왔다.
“집착, 그럴지도 모르죠.”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에요.”
테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빈 그릇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윤 아저씨는 볼 때마다 신기해요.”
“뭐가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거요. 겁이란 걸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볼 때마다 신기하고.”
“혼자 살다 보면 괴팍한 노인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근데 밀레나 양도 만만치 않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앞가림 잘해요. 윤 아저씨는 편해서 그런 거고.”
큼지막한 새가 뾰족한 울음을 내며 머리 위를 가로질러 갔다.
밀레나는 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하늘을 나는 강철새가 있었나요?”
“안 믿기면 믿지 마요.”
“전 아저씨 말 믿어요. 그냥 상상이 잘 안되거든요.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을 태우고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갈 수 있다니. 날개를 파닥파닥 움직이나요?”
“역학 같은 걸 설명하려면 제 머리로는 힘들어요. 마법이 아닌 과학의 산물이니까.”
“아저씨는 못 만들어요?”
“평범한 회사원은 그런 거 못 만들죠. 그리고 여긴 그런 게 필요 없기도 하고.”
미스터 리가 쌓인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과거 일은 과거 일.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아요. 저한테는 이곳이 현실이니까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안 해보셨어요?”
“오두막에 있었을 때야 매일 빌었죠. 돌아가게 해달라고. 이제는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돌아가면 곤란해요.”
미스터 리가 턱짓으로 냄비를 가리켰다.
“할 일 없으면 도와줄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냄비를 들었다.
냇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야영지로 돌아올 때였다. 단단히 묶어둔 뒷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밀레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풀어진 스카프가 진흙 위를 뒹굴고 있었다.
“…….”
스카프를 들고 다시 냇가로 갔다. 진흙을 씻어내고 가볍게 쥐어짜 물기를 빼냈다.
“언니, 뭐 해? 정리 끝나서 곧 출발한대.”
샬롯이 옆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여기저기 다 터졌네. 언니, 머리끈 없으면 내가 하나 줄까? 그건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쓸 만해.”
물기가 남은 스카프로 머리를 묶었다.
“봐봐. 괜찮지?”
“색이 다 빠졌잖아. 언니가 그런 거에 관심 없다고 해도 바꾸면 좋을 텐데. 언니는 밝은색이 어울려. 말이 나온 김에 바꿔볼래?”
“마음만 받을게. 그리고 이거, 행운의 징표 같은 거라 바꿀 생각 없어.”
“그래?”
스카프를 물끄러미 보던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애착하는 물건이 한두 개씩은 있지. 그거 누구한테 받은 거야? 아니면 직접 산 거?”
“있어, 그런 게.”
“뭐야. 알려주면 안 돼?”
“나중에 불침번 대신 서주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샬롯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됐네요, 됐어. 아무튼 빨리 와. 언니 짐은 내가 정리해 놨으니까.”
“웬일로?”
“내가 아니면 누가 언니를 챙기겠어.”
몸을 가볍게 띄우며 야영지로 향하는 샬롯이었다.
“일단 스파우로 돌아갈 거야.”
돌아오니 구치가 향후 계획에 대해 설명 중이었다. 타챠 옆에 자리를 잡고 귀를 열었다.
“마수들의 이상행동이 잠잠해졌다고는 하나 원인이 파악되지 않는 이상 안심할 수는 없어. 여기 말고도 골치 아픈 곳에 몇 있다고 하니, 그쪽 상황을 보고 이후 행동을 결정할 거고.”
샬롯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구치는 못 본 척 넘어가려 했으나, “저요, 저요” 소리치며 흔드는 통에 결국 발언권을 줬다.
“그냥 랜더 삼촌이 싹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편리한 도구 쓰듯이 랜더를 움직일 순 없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해야 해.”
“삼촌이 나서면 금방일 텐데.”
“뭐가 됐든 균형이 중요한 거야. 인명피해가 나온다고 해도 우리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건 그렇게 해야 해. 그게 균형을 맞추는 일이니까.”
샬롯이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타챠가 커다란 손으로 샬롯의 얼굴을 감싸버렸다.
“읍! 으으읍!”
턱을 벌리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던 샬롯이 이내 조용해졌다. 그제야 손을 떼는 타챠였다.
“나쁜 도마뱀 아저씨.”
“조용히 해라, 인간족 꼬마야. 시끄럽다.”
앞에 서 있는 구치가 작게 기침했다.
“퀼이 자리를 비운 탓에 표리영역 쪽 문제도 일손이 부족해졌어. 당분간 청소꾼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으니 마수 문제는 우리끼리 잘 대응해야 해.”
테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구치가 눈짓을 보냈다.
“조합장과 브라인 님, 두 분은 언제쯤 복귀할 예정입니까?”
“그건 알 수 없어. 기억을 되찾기 위해 바라라의 신성한 땅을 찾는다고 했는데, 퀼이 애먹을 정도로 힘든 여정이라고 했으니까. 몇 달이 더 걸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몇 년일지도 모르지.”
이야기 도중 타챠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전부 대지로 돌아간 다음일 수도 있다. 그 둘에게 시간은 꽤 넉넉한 자원이니까. 우리와 달리.”
밀레나는 팔짱을 꼈다.
인간보다 수명이 긴 타린족도 마도사와 바라라족 앞에서는 단명하는 생물이었다.
타챠의 말대로 퀼과 브라인이 복귀하는 건 이곳에 있는 사람이 전부 죽고 난 뒤가 될 수도 있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일도 많은데 먼 미래까지 걱정하면 정신 사나워져.”
구치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정리 끝났으면 이동하자. 서둘러야 저녁을 시에서 먹게 될 거야.”
저녁이란 말에 누구보다 먼저 일어서는 타챠였다.
* * *
“아리엘!”
시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샬롯이 아리엘에게 뛰어갔다. 옆에 찰싹 붙은 샬롯을 다독이며 아리엘이 말했다.
“고생했어, 밀레나.”
“고생은요.”
밀레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시장실에 난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 결국 저녁은 길바닥에서 해결했다.
“샬롯도 고생했어.”
“언니, 고생했으니까 좀 쉬어도 되겠지?”
샬롯의 질문에 아리엘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피곤할 텐데 내일 얘기할까?”
아리엘이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샬롯.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눈치를 살피던 샬롯이 아리엘 곁에서 떨어졌다.
“내가 들으면 안 될 얘기 같으니까 일단 빠져줄게. 근데 너무 따돌리면 슬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줄게.”
시장실을 나서는 샬롯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아리엘을 바라봤다.
“어때요?”
앞뒤 다 자르고 던질 질문이지만, 아리엘은 이해했을 터였다.
“도시 상황 자체로만 보면 좋아. 둔 개발부에서 온 물건 덕분에 도시방어가 쉬워진 것도 사실이고. 너한테는 안 좋은 소식이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네가 부탁한 걸 알아보고 있긴 한데, 여전히 걸리는 건 없어.”
아리엘이 다가와 문서를 건네줬다. 밀레나는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며 글을 살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이라 나도 알아보는 데 한계가 있어.”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아리엘이 다리를 꼬았다.
“유단. 정말 반듯한 인간이야. 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어. 평판이며 수완이며…… 인망도 두터워서 차기 학회장으로 거론될 정도야. 아니, 이미 탄드라 학회장이 밀어주고 있으니 확정이라고 봐야겠지.”
“점점 더 견고해지네요.”
조사서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드러난 것만 보면 완벽한 인간이야. 건들면 골치깨나 아파지겠지. 그래서 나도 적당한 선에서 조사를 멈췄어. 둔 학회하고 사이가 틀어지면, 우리 도시도 난처해지니까.”
“곤란한 부탁을 했네요. 죄송해요.”
아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하지 마. 돕고 돕는 건데. 근데 왜 이 남자의 뒷조사를 계속하는 거야? 난 널 믿으니 위험하다는 것만 듣고 도와주고 있지만…… 솔직히 사정이 궁금하긴 해.”
“……그냥 미련 같은 거예요. 해결하지 못한 숙제에 계속 집착하고 있는 거죠.”
“털어낼 수 있는 거라면 털어내는 게 좋아. 둔의 차기 학회장은 거물이니까.”
“새겨들을게요.”
밀레나는 조사서를 반으로 접으며 물었다.
“도시 정세는 어때요?”
“똑같지. 아니, 반기계파 세력 때문에 골치가 아프네. 마수찬양론자들도 거기에 합세해서 토벌을 그만두라느니, 예전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느니 난리도 아니거든.”
“그런 미친놈들을 내버려 둬요?”
아리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크게 웃었다.
“싹 쓸어버리면 속이야 시원하겠지. 하지만 다음 시장 선거는? 시의원 중에 그쪽 세력에 가담한 자들이 꽤 있어. 사상과 별개로 돈줄이 강력하거든.”
“미친놈한테 돈을 대는 미친놈이 있다니.”
“세상이 바뀌었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 지랄하는 건 똑같아. 혈통이 자본으로 대체됐을 뿐이지.”
아리엘이 일어나 창가 옆에 섰다. 밖을 내다보는 눈동자에 야망이 가득했다.
“뒷방으로 물러났어야 할 옛 황제는 대통령이란 걸 꿈꾸고 있어. 근데 나도 그게 탐나. 탐이 나니까 노력을 해야겠지?”
“……언니는 그런 눈 할 때 조금 무서워요.”
“무섭긴. 솔직한 거지. 협회에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내 곁에 남는 것도 괜찮은 길이 될 거야. 율하고 너, 꽤 잘 맞잖아?”
“율이야 둘도 없는 친구죠.”
“그러니까.”
밀레나는 조사서를 들고 일어섰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시장실 문을 두드릴게요. 그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면요.”
“걱정하지 마. 스파우는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니까.”
눈빛이 오싹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조만간 난리가 날 것이다.
정치문제에 끼여 피를 보는 건 싫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그만 가볼게요.”
“그래. 돌아가서 편히 쉬어. 마수 처리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문고리를 잡고 문을 반쯤 열었을 때였다.
앞에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밀레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협회장님.”
랜더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시장님이 아니라 밀레나 양을 만나러 왔어요.”
“저를요?”
문을 닫고 나왔다.
“하실 말씀이…….”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에요.”
“네?”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랜더가 손가락을 들어 건물 밖을 가리켰다.
“일단 나갈까요?”
“아, 네.”
랜더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혹시 많이 피곤한가요?”
“아니요. 걷기만 해서 그렇게 피곤하진 않아요.”
“잘됐네요.”
공관 옆 공터에 섰다. 마법등이 뿌리는 희미한 불빛이 랜더를 비췄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을 순 없으니 짧게 끝내죠.”
“예?”
“뽑으세요.”
뽑으라니.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이내 검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바짝 차올랐다.
“대련해 주시는 건가요?”
“테인이 말하더군요. 밀레나 양의 센스가 좋다고. 저는 일정이 있어서 당분간 시를 떠날 겁니다. 그 전에 몇 가지 잡기술을 알려드리죠.”
솔직히 뒤에 한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센스가 있다’라는 칭찬에 반쯤 흥분해 검을 움켜쥐었으니까.
“자신만의 ‘태세’는 찾아냈나요?”
“큰오빠, 아니, 테인 경한테 몇 번 시도해 봤지만 통하지는 않았어요. 허술한가 봐요.”
“한 번 보죠. 태세란 건 결국 버릇의 결정체 같은 거니.”
두 손으로 검을 쥐고 랜더 앞에 섰다. 마수의 거죽도 갈라버릴 예리한 칼날이지만,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검이 랜더 몸에 닿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있는 힘껏 갈게요.”
탈진해 쓰러질 만큼 신체술을 끌어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