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4화
“인부들 구하기가 어렵다며?”
“말도 마. 도시 바깥쪽, 그 뭐더라? 아웃라인? 거기도 집터 잡는다고 사람을 어찌나 끌어가는지. 손재주 좀 있는 놈들은 죄다 그쪽으로 갔어. 거기가 짭짤하다고.”
손가락을 비비며 말하는 남자였다.
시장 한복판.
가하란은 오가는 사람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마주 오는 남자가 가하란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장바구니를 든 노인도, 두리번거리는 아이도 모두 가하란을 통과해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물건은 만질 수 있어.”
모든 게 허상인 건 아니었다.
가하란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좌판에 놓인 브로치를 들었을 때처럼 이질감 없이 줍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거리를 오가는 이 사람들은 대체 무엇인가?
꼬리가 긴 쥐가 사람들 발을 피해 움직였다. 가하란은 발치에 온 쥐를 툭 건드렸다.
발등은 허무하게 공중만 찼다. 쥐마저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람은 있지만 소통은 불가능한 것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봤으나 그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정령 같았다.
눈에는 보이나 간섭할 수 없는 존재.
먼 곳에 있는 중앙 군부와 시계 첨탑을 바라봤다.
틀림없다. 이곳은 둔이다.
주변 건물 외형과 시장 위치, 도로 구성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둔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가하란은 걸음을 뗐다.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균열로 엉망이 됐어야 할 거리가 말끔한 걸 보면 그라운드 제로 이전일 것이다.
먼 미래라고 하기에는 분배소도 없고 기계인형도 안 보이니까.
“여기다.”
가하란은 자신 모르게 소리를 냈다. 길게 뻗은 좁은 길 양쪽으로 임시가옥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살던 골목.
B150.
안쪽으로 진입했을 때 왼쪽 집 문을 뚫고 남자가 나왔다. 후줄근한 차림에 녹슨 곡괭이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졸린 듯한 눈과 뾰족한 콧볼.
처음 보는 이십 대 초반의 남자이나, 어딘가 낯익었다.
“여보! 이것도 가져가야지.”
뒤이어 젊은 여자가 물통을 가지고 나왔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닫힌 문을 뚫고 나왔다.
“고마워, 일레.”
여자의 이름을 말하며 가볍게 입맞춤한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일레 할머니?”
기억 속 일레는 게슴츠레한 눈과 괴팍한 입담으로 골목을 항상 시끄럽게 만드는 할머니였다.
그렇다는 건?
가하란은 멀어져가는 젊은 남자를 바라봤다.
“헤르슨 할아버지.”
일레가 집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조용해졌고, 가하란은 침묵은 내려앉은 거리에서 생각에 잠겼다.
정확한 연도는 확인해야겠지만, 아무래도 40에서 50년 전쯤인 것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둔의 골목.
가하란은 고개를 홱 돌렸다.
골목 끝.
핀들론이 살던 집을 향해 뛰었다.
어쩌면 계시지 않을까?
젊은 날의 할아버지가.
닫힌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다행히 문은 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가하란은 짧은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모르는 가족이 있었다.
젊은 남녀 사이에서 까르르 웃고 있는 아이. 뜯겨 나가듯 열린 문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단란한 가족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메마른 웃음이 나왔다.
바닥에 앉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당연한 일이다. 핀들론 할아버지는 랍파로서 대륙을 종횡했다. 둔에 정착하는 건 인생 말년의 일.
이곳이 과거가 확실하다면, 할아버지는 지금쯤 미개척지를 탐험하고 계실 테지.
방긋 웃는 아이를 잠시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은 아직 지어지지도 않았다. 다른 곳처럼 임시가옥이 올라간 것도 아니라 집터만 덩그러니 있었다.
있는 거라고는 야트막한 돌담뿐.
가하란은 돌담에 기댔다.
추억의 장소였다.
아버지와 술래잡기를 했던 곳도, 툴을 껴안고 장대비를 구경한 곳도, 밀레나와 온갖 얘기를 나눈 곳도 이 돌담이었다.
왼손으로 땅을 쓸었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와 흙들이 괜히 정겨웠다.
품 안에 얌전히 있던 루루가 폴짝 뛰어올랐다. 골목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작은 고양이가 루루 곁을 지나갔는데, 루루에게도 고양이가 보이는지 손을 뻗으며 잡으려 했다.
물론 헛손질로 끝났지만.
루루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고양이를 쫓아다녔다.
실체 없는 허상을 좇는 원숭이.
처지가 비슷한 것 같아 실웃음이 나왔다.
허탈한 기분에 젖어있는 것도 잠시. 가하란은 귀 뒤쪽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느슨해졌던 정신을 다잡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각오도 했다.
사건이 들이닥쳤으니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상황은 변했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물건은 만질 수 있으니까.
“우선 강철의 무덤.”
세 번째 카트시를 찾아야 한다.
과거에 카트시를 만났던 그곳으로 돌아가 잠들어 있는 오랜 친구를 깨워야 했다.
시간의 연속성이 유지된다면 나를 기억할 테고, 아니라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낯선 인사를 건네올 것이다.
각 세계마다 시간의 접점이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단절된 세계인지 확인할 기회였다.
“그러고 나서…….”
다음 목적지를 떠올릴 때였다.
루루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여전히 고양이를 쫓고 있었다.
잡히지도 않는 허상의 고양이.
고양이가 돌담 위에 멈춰 몸을 웅크렸다. 루루를 몇 번이고 헛손질하다가 성이 났는지 끽끽거리며 다른 곳으로 갔다.
고양이가 돌담을 내려왔다. 두리번거리던 고양이가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너, 베베라고 아니?”
웰턴이 키우던 고양이와 닮아 있었다. 어쩌면 베베의 할아버지가 아닐까.
갑자기 하악질을 시작한 고양이가 저 멀리 도망쳤다. 뒤이어 어디선가 튀어나온 작은 개가 고양이를 쫓아갔다.
멀어져가던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나 웰턴의 집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웰턴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나는 드디어 하늘석에 갈 방법을 찾아냈다. 반짝이는 문으로 뛰어들어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내 모든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하늘을 향해 위태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예정이다”
하늘석.
그리고 성도에 있다는 ‘멜멜 클랜’.
실종됐다가 시체로 발견된 연구원.
당시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반짝이는 문으로 뛰어들어 그곳에 갈 것이다.
“설마.”
단정할 수는 없으나 현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세계와 세계를 잇는 경계면은 분명 반짝거리고 있었다.
웰턴은 말했다.
실종된 연구원이 살아서 활동하던 시기는 40년 전이었다고. 어릴 때였으니 지금의 나이로 따지면 대략 50년 전.
성도에 가면 생존한 연구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대화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하늘석의 비밀을 알게 되지 않을까?
연구가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얻는 게 있을 것이다.
강철의 무덤과 제국의 성도.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루루!”
입가에 손을 대고 외쳤다. 지붕 사이를 넘나들던 루루가 재빨리 뛰어와 품 안으로 숨어들었다.
가하란은 돌담을 잠시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목표가 생겼으니 다시 움직여야 한다.
* * *
스카프로 머리를 묶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고소한 냄새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밀레나는 하품을 살짝 하고 바글바글 끓는 솥 앞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맞은편에 앉은 미스터 리가 그릇 가득 죽을 떠서 넘겨줬다.
“뭘 넣은 거예요?”
“음, 이틀 전 먹은 죽에 어제 만들었던 죽을 섞고, 아침에 손질한…….”
“아. 안 듣고 먹을래요.”
미스터 리가 싱긋 웃었다.
한술 떠 입에 넣었다. 고소한 냄새와 달리 맛은 빈약했다. 아삭아삭한 야채와 흐물거리는 고기의 절망적인 콜라보.
“……저번에는 엄청 맛있었는데.”
“조리법을 바꿔봤어요. 한결같으면 재미없잖아요.”
“아저씨, 요리는 재미없어도 돼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변화를 사랑하세요, 밀레나 양.”
“으엑.”
오만상을 찌푸리며 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언니, 잘 잤어?”
눈을 비비며 나오는 샬롯이었다. 비틀거리며 곁에 다가와 앉는다.
밀레나는 싱긋 웃으며 재빨리 죽을 그릇에 담았다.
“자. 먹어.”
“누가 만든 거야? 밀리언 아저씨?”
“어, 맞아. 그러니까 먹어봐.”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죽을 먹는 샬롯이었다. 슬슬 반응이 올 텐데.
“맛있네.”
“뭐?”
“맛있다고.”
멀겋게 웃으며 깨끗하게 죽을 비운 샬롯이었다.
“난 좀 더 잘게.”
비틀거리며 텐트로 들어간다. 밀레나는 빈 그릇을 보며 말했다.
“쟤 혀가 고장 났나 봐요.”
“사람은 누구나 취향이란 게 있어요. 음, 이번 조리법도 성과가 있네요.”
“마니아를 위한 요리는 없는 게 나아요.”
기지개를 켠 후 야영지를 벗어났다. 개울에 얼굴을 씻고 얼굴을 찰싹 때려 물기를 털어내는데, 멀리서 폭음 같은 게 들려왔다.
또 하는구나.
밀레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대단들 하셔.”
쾅!
거대한 창이 지면을 때렸다. 지면이 갈라지며 돌멩이가 비산했다.
날렵한 칼을 든 테인이 날아도는 돌을 쳐내며 타챠의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빈곳을 노린 날카로운 한 수.
하지만 묵직한 창대가 검로를 막아냈다.
검과 창이 맞닿을 때마다 쩡쩡 거리는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밀레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멩이 하나를 들어 타챠 등 뒤로 던졌다.
검을 쳐낸 타챠가 꼬리를 휘둘러 돌멩이도 튕겨냈다.
“참전하고 싶으면 들어와라.”
타챠가 말했다.
“아침부터 아저씨랑 놀긴 싫어요.”
“인간의 암컷이란.”
“또또 그런 말투 쓰신다. 저번에 한 방 먹은 걸로 아직도 삐진 거예요?”
“산의 전사는 삐지지…….”
타챠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테인의 검이 목을 향해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타챠가 훌쩍 물러서며 다시 창을 겨눴다.
밀레나는 가볍게 뛰어올라 둘 사이에 떨어졌다.
“아침 운동은 이 정도로 하시고, 식사하세요. 끝내주게 맛있는 아침이 준비돼 있으니까.”
테인이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밀리언 형님이 준비했나요?”
“음, 아니요. 윤 아저씨요.”
“……제대로 만들었나요?”
“아마도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타챠는 먼저 가겠다며 창을 챙겼다. 좌우로 신나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 있으니 조금은 귀여웠다.
“식사 안 하실 거면 저랑도 잠깐 놀아주시겠어요?”
“요즘 밀레나 양의 실력은 논다는 개념을 살짝 넘었는데요.”
테인이 쓰던 검을 던지며 말했다.
“아침부터 큰오빠의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네요. 제가 먼저 갈게요.”
“그래요.”
밀레나는 테인이 준 검을 꽉 잡으며 앞을 보았다. 테인은 검집을 손에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예리하게 벼려낸 검과 거죽과 징, 나무를 덧대 만든 검집.
“오늘은 한 방 먹일 거예요.”
“그러세요.”
신체술을 한껏 끌어올린 후 테인을 향해 돌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