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53화 (353/558)

제353화

-뭐 좀 찾았나요?

가하란은 파일철을 내려놓으며 카트시를 바라봤다.

“찾긴 찾았는데, 원하던 정보는 아니야.”

‘괴정령’이 출몰했을 때 상황은 자세히 기록돼 있으나, 정령을 현신시킨 정령술사에 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오크족 주술사지만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하나 건진 게 있어.”

가하란은 오른쪽에 밀어둔 기록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건 뭐죠?

“서벽 보초병들의 근무일지.”

-망루일지네요. 거기서 뭘 찾았죠?

“정령술사가 괴정령을 현신시킨 날이 17일이야. 그리고 같은 날 망루일지를 보면…….”

가하란은 손가락으로 17일 옆에 적힌 글귀를 가리켰다.

“그날 하늘석이 도심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어.”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없죠.

기록지를 덮고 일어섰다.

“준비해보자. 그날 했던 일을 되풀이하고 하늘석을 기다려 보는 거야.”

-만약 실험에 성공한다면 가하란은 또다시 이상한 곳에서 눈을 뜨겠네요.

“그렇겠지.”

카트시를 등에 메고 지하 자료실을 벗어났다. 왕성 정원으로 나왔을 때 침묵하던 카트시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죠?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여기에 계속 머물 수는 없어.”

-미리 작별 인사를 해둬야 할까요?

“섭섭하게 그러지 마. 아직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러우니까요. 줄이 저를 떠났을 때처럼.

카트시의 안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하란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내가 없어진다고 달라질 게 있어?”

-이런 생각을 해요. 시간이 고정된 세계. 이곳을 발견한 사람이 없다면 영원히 멈춰 있었겠죠. 하지만 가하란이 봤고, 봤기 때문에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저도 깨어났고요.

“내가 없어도 카트시는 존재할 거야.”

-존재를 관측해줄 관측자가 더 중요할지도 몰라요. 가하란은 특별하잖아요. 멈춘 세계에서 유일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죠. 아, 그 원숭이도요.

쓸쓸한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갈 땐 다 같이 가면 돼. 카트시도, 고양이들도.”

-그렇게 되면 미래의 저와 지금의 제가 공존하게 되는 건데, 아무 문제 없을까요?

“조금 시끄러워지는 게 문제겠지.”

각기 다른 세계에 있던 내가 동일한 시간 선상에 존재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잠깐 고민해봤지만, 변수가 워낙 많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타인처럼 멀쩡하게 살아갈 것 같기도 하고, 치명적인 오류를 발생시키는 회로 겹침처럼 예상 못 한 문제가 일어날 것 같기도 했다.

-고민해봤자 소용없긴 하네요.

“실험이 성공한 다음에 생각해볼 일이니까.”

가하란은 시선을 먼 하늘로 던졌다. 손톱보다 작았던 하늘석이 어느덧 엄지만 한 크기로 변해 있었다.

-조금 서둘러야겠네요.

* * *

모든 준비를 끝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책상 위에서 뛰어오는 루루와 두 고양이를 바라봤다.

-시작할까요?

가하란은 시간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에 관한 대화를 되풀이한 후 침대에 누웠다.

지금쯤이면 하늘석이 왕성 위를 지나가고 있을 터였다.

정말로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걸까? 순백의 세계 말고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되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잠에 빠져야 한다는 걸 알지만, 생각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잠들지 않아서 실패한 걸까?

그때였다.

안구 안쪽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카트시 본체에서 뻗어져 나온 주황색 선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고목의 뿌리처럼 촘촘하게 천장을 뒤덮는다.

-가하란?

“뭔가 일어나고 있어.”

-제 감각기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야.”

-마나 파장도 없어요. 물리적인 수치 변화도 없고요.

카트시가 말할 때였다. 잘게 찢어진 주황색 선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가하란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침대가 부서지고 있었다. 아니, 침대가 점유한 공간이 갈라지고 있었다.

경계면이 빛을 난반사하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가하란!

몸이 밑으로 떨어진다.

걱정과 함께 환희가 찾아들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방법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가하란은 왼편을 바라봤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주황색 선이 보였다.

두 손으로 선을 붙잡았다. 추락하던 몸이 어둠뿐인 공간 사이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면 휴게실이 보였다. 루루와 두 고양이가 날뛰고 있었다.

밑을 바라봤다. 건물 지붕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의복 양식이 익숙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도로, 본적이 있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다.

“둔.”

기억에 남아 있는 둔의 모습이었다. 시야각이 좁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기억 속 건물과 일치했다.

“카트시!”

선을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에서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지만 괜찮았다.

깨져나간 공간 밖으로 손을 뻗었다.

-가하란! 어떻게 된 거죠? 지금 손만 침대를 뚫고 나와 있어요!

바깥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건가.

“내 목소리 들려?”

-네, 목소리는 들려요.

“성공한 거 같아. 지금 다른 곳과 이어졌어.”

대화 도중에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손바닥을 칼로 저미는 것 같았다.

-가하란?

“일단 이쪽으로 와! 다 같이 가자. 엉뚱한 곳일 수도 있지만, 함께 가면 괜찮을 거야.”

C도 데려가고 싶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휴게실 안으로 데려올 수도 없고.

휘적거리는 손에 먼저 반응한 건 루루였다. 루루가 폴짝 뛰면서 손을 붙잡았다.

가하란은 공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가하란, 지금 루루가 침대를 뚫고 사라졌어요.

“됐어. 같이 이동할 수 있어. 카트시, 기계 팔로 내 손을 감아. 내가 끌어당겨 줄게!”

줄을 붙잡고 있는 왼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통이 온몸을 때렸다.

-알겠어요.

카트시의 팔이 움직일 때였다. 크랜베리가 먼저 날아올랐다. 가하란은 오른손을 휘감은 크랜베리를 붙잡고 안으로 잡아당겼다.

“……안 돼.”

공간의 경계면을 넘는 순간, 크랜베리의 몸이 가느다란 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실체를 잃고 정보로 변화한다.

가하란은 재빨리 크랜베리를 던졌다. 바깥으로 튕겨 나간 고양이는 본래 모습을 되찾고 야옹, 작게 울었다.

-……관측했기에 존재한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곳에 고정된 것 같네요. 가하란과 달리 여길 벗어날 수 없나 봐요.

“아니야, 카트시.”

치고 오르는 통증을 참아내며 겨우 말했다. 카트시의 기계 팔이 다가왔다.

경계를 넘는 순간, 차가운 쇠가 가는 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목격한 걸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네요. 저는 여길 벗어날 수 없어요.

“아니야, 카트시! 방법이 있을 거야.”

-미련하게 굴지 마요. 시들지 않는 꽃, 성장이 멈춘 고양이, 그리고 저. 이 회색빛 세상은 애초에 정상적이지 않았어요.

공간의 경계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닫히려는 징조 같았다.

가하란은 되돌아가기 위해 왼팔을 당겼다.

몸이 서서히 위로 솟구칠 때였다.

붙잡고 있는 주황색 선이 희미해졌다.

카트시 몸에서 뿜어져 나온 주황색 선 역시 사방으로 뻗쳤던 가지를 거둬들이고 하나의 선으로 변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위로 오르던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경계면 바깥에 있는 기계 팔이 보였다.

카트시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작게 들려왔다.

-이별은 언제나 급작스럽죠.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우린 애초에 멈춰 있었으니까. 그러니 가하란은 해야 할 일을 하세요.

“아니야. 나 혼자 갈 수는 없어.”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네요. 혹시 슬픈가요?

“그걸 말이라고 해?”

-슬퍼할 필요도 없어요. 전 계속 존재할 테니까요. 말썽꾸러기 고양이들이야 순리에 따라 죽어 있겠지만, 그건 항거할 수 없는 일이죠. 영원불변한 게 오히려 괴로운 거예요.

경계면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붙잡고 있는 줄도 이젠 형태를 앓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몸은 계속 추락하고 카트시의 목소리를 점점 더 멀어졌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경계면을 보며 말했다.

-미래의 저한테 안부나 전해주세요. 가하란, 잠깐이지만 즐거웠어요.

구멍이 거의 다 닫혔다. 희미한 빛만이 스며들고 있었다.

휴게실이 점점 멀어지고 건물 지붕은 가까워졌다.

어둠뿐인 공간을 빠져나오기 직전, 카트시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켈트의 머리. 미래의 저한테 이 말을 전해줘요. 줄의 명령이 없기에 잠금이 완전히 풀리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해내겠죠. 잘 가요! 가하란!

쿵.

등이 지붕에 닿았다.

가하란은 몸을 웅크린 채 이를 꽉 물었다. 2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를 또다시 떠나보냈다.

카트시가 없었다면 진즉에 미쳤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수백, 수천 번 해도 부족한데…….

이별은 급작스럽다.

카트시가 한 말을 떠올리며 완전히 닫힌 틈새를 바라봤다.

“언젠가 다시 만나.”

호흡을 가다듬고 왼손을 보았다.

푸른 불길에 휩싸였던 손은 거죽이 벗겨져 붉은 속살을 드러낸 상태였다.

살며시 불어온 바람조차 쓰라렸다. 상의를 찢어 손에 감았다.

“루루, 이쪽으로 와.”

옥상 끝자락에서 기웃거리는 루루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2층 건물 밑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하란은 주변을 둘러봤다.

둔이다. 태어나고 자란 도시가 맞았다.

“둔은 맞아. 맞지만…… 아니야.”

도심의 형태가 조금 달랐다. 귀족 거주지와 가구거리를 잇는 도로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중앙 군부 건물도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달리 이제 막 지은 것처럼 말끔했다.

무엇보다.

균열이 없다.

과거인가, 아니면 머나먼 미래인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혼자서 끙끙 앓을 필요 없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저기.”

마주 오는 여자에게 말을 걸 때였다. 딴생각 중인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게다가 멈추지도 않고 가하란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부딪칠 것 같아 얼른 옆으로 피했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갔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좌판에 장식품을 늘어놓은 상인이었다.

“제가 외지에서 와서 그런데 여기가 둔이 맞나요?”

상인과 눈이 마주쳤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상인이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뭐라도 하나 사야 하나.

자그마한 브로치를 들어 올릴 때였다.

꼬마 하나가 까르르 웃으며 뛰다가 가하란 코앞에서 쓰러졌다. 다칠 것 같아 얼른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으아앙!”

가하란은 넘어져 우는 아이를 바라봤다. 상인은 우는 애를 보며 껄껄 웃었고, 어디선가 나타난 보호자가 아이를 들어 올리며 야단쳤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멀거니 지켜봤다.

그리고 다시 손을 바라봤다.

분명 아이를 붙잡았다.

붙잡았을 터였다.

하지만 아이는 손을 통과해 쓰러졌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가하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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