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어때요? 변한 게 있어요?
카트시가 말했다.
가하란은 열감이 차오른 눈을 질끈 감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니. 어제랑 똑같아. 달라진 건 없어.”
카트시 본체에서 일직선으로 뽑혀 나온 주황색 선. 새벽에 벌어졌던 일을 되새김질하며 손을 움켜쥐었다. 쓰라린 감각이 날카롭게 치고 올라왔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홀로 존재하는 여자, 공간을 잇던 주황색 선.
카트시의 안구가 공방 벽면을 살폈다.
-가하란이 본 오렌지 라인이 제 본체에서 나오는 선과 같은 것이라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열쇠가 될지도 몰라요.
“단서인 건 확실해. 하지만 뭘 의미하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어.”
-잠깐이긴 하지만 가하란은 분명 이쪽 세계에서 사라졌어요. 완벽한 소실이었죠.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에 발을 디뎠다.
순백의 세계. 현실과 아무런 접점이 없고, 안원과도 다른 기이한 곳.
“변인을 통제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계속 실험해 봐야겠지?”
-맞아요. 같은 위치, 같은 시간, 같은 자세로 있어 보죠. 다른 세계와 연결될 수도 있으니.
“잘 될까?”
-모르죠. 해보기 전까지는.
주어진 단서는 하나. 주황색 선이 공간과 공간 사이를 잇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으니 부딪쳐볼 뿐이다.
밤이 찾아왔다. 카트시의 기억을 토대로 같은 자세로, 같은 시간에 침대에 누웠다.
-용에 관해서 얘기해보죠. 오늘은 자유롭게 말해보고, 수확이 없으면 어제 말했던 걸 똑같이 반복해 보죠.
기억을 더듬으며 얘기를 나눴다.
-이제 자면 돼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의식해서 자려고 하니 정신이 되레 또렷해졌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암전.
흐리멍덩한 상태로 다시 눈을 떴다.
“……실패했네.”
잠만 늘어지게 잤다.
-이상 징후는 없었어요. 코를 약간 골았을 뿐.
“오늘 밤에 다시 해보자. 이틀 전에 나눴던 대화, 전부 다 말해줘. 적어놓고 외우게.”
어느 유명한 마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의미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 예상치 못한 기적, 그리고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카트시와 나눴던 대화가 세계와 세계를 잇는 주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야 하는데, 되겠어요?
“어렵지 않아. 가능하다면 대화 사이사이 공백이 몇 초였는지도 알려줘. 최대한 비슷하게 재연해야 하니까.”
-좋아요.
카트시가 하는 말을 받아 적었다.
적으면서도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틀 전에 이런 말을 했었나?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열연해보죠.
다시 밤이 찾아왔다.
달달 외운 대사를 막힘없이 쏟아냈다. 이틀 전 밤처럼.
이윽고 잠이 찾아왔고 어둠을 동반한 단절, 다시 빛이 찾아들었다.
“안 되네.”
변한 건 없었다.
사흘째.
이번엔 사흘 전에 했던 일들을 반복했다. 걸음 수까지 맞춰 보려고 노력했다.
잠이 들었고 변함없는 다음날을 맞이했다.
-이게 한계에요. 통제된 실험실이 아니라 더 손쓸 것도 없어요. 무엇보다 변인이 너무 많아요. 그날 가하란이 호흡했던 방식, 내뱉었던 숨이 열쇠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까지 구현할 수는 없어요.
“어쩌다 찾아온 우연이라는 건가.”
가하란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수 내부에 있던 밀레나를 구해낸 직후 이곳에 도착했다. 직접적인 행위가 공간 이동이란 결과를 끌어낸 것이다.
과정이야 알 수는 없지만, 인과는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여자와 만난 건 인과가 없었다. 잠들었을 뿐인데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
안원으로 끌려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손을 들어 왼쪽 눈을 매만졌다.
모든 사건의 원인인 기괴한 눈을 몸에 지니고 있지만, 정작 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더 해볼 건가요?
“아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일단은 선을 계속 조사하고…….”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은 저 멀리서 고개만 살짝 내민 채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붙잡으려 하면 놀리듯 도망쳤다.
차라리 포기할 수 있도록 선고를 내려주면 좋을 텐데. 이곳에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발악하지 마라.
-가하란.
“응?”
-나가죠. 우중충한 하늘을 보러.
“피곤한데.”
-그래도 나가요. 쟤들과 같이.
가하란은 두 고양이와 씨름 중인 루루를 바라봤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쟤들은 뛰어놀 공간만 있으면 걱정 같은 건 안 하겠지?
의식의 흐름이 지하를 뚫고 내려갔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감정을 지배하려 들었다.
다스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고독한 세계에 홀로 남겨진 여자.
어쩌면 그 여자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였다.
변함이 없는 세계.
이 안에서 늙어가는 건 나와 루루 뿐이었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는 시간이 고정된 채 멈춰 있으니까. 털도, 발톱도 자라지 않는, 마치 기계 같은 고양이.
이대로 쓸모없는 노력을 하다가 회색 하늘을 보며 죽게 되는 걸까?
루루는 나보다 오래 살까? 아니면 먼저 떠나갈까.
기운이 빠진다.
근 2년간 꾹꾹 눌러 담아왔던 무기력이 한순간에 찾아온 것 같았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밀레나의 미소를 그려봤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눈을 감고 느릿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가하란!
쨍한 목소리와 함께 뺨에 차가운 쇠가 맞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요. 나가서 바람을 쐬고 뛰어요.
“……카트시?”
-어서요.
다그치는 목소리에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카트시를 등에 멘 채 흐느적대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가하란이 말했죠?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포기할 수 있다고. 가하란은 이제 포기하고 싶나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잠깐 지쳐서 쉬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아요. 하지만 다 놓아버리고 싶은 거라면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위로해 주는 거야?”
카트시의 눈이 앞으로 다가와 이마를 툭 쳤다.
-당신은 제 파트너예요. 비즈니스 파트너. 전 이 현상을 규명하고 이해하고 해결할 거예요. 하지만 몸이 없으니 도움이 필요하죠. 가하란, 멋대로 멈추지 마요.
기계 안구가 유달리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저한테 호기심을 심어 넣었잖아요. 미래가 있다고 알려줬잖아요. 절 움직이게 한 이상 멈출 수 없어요. 포기는 용납 못 해요. 쉬는 건 죽고 난 뒤에 해요.
“잔인하네.”
-필요하다면 잔인해져야죠. 안 그런가요?
살짝 웃음이 나왔다.
“맞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 포기할 수 있지.”
카트시를 내려놓고 천천히 뛰었다. 잡화점을 낀 모퉁이를 돌고 나서부터는 온 힘을 다해 발을 굴렀다.
상가들이 시야 뒤쪽으로 밀려났다. 헐떡이는 숨과 마주 오는 바람이 뒤엉켜 등 뒤로 날아갔다.
오른쪽에 있는 벤치를 밟고 뛰어올라, 상가 처마에 왼발을 올렸다.
속력을 줄이지 않고 재도약.
1층 건물 지붕에 닿은 오른발이 저장해놓은 힘을 분출했다. 마나 파장이 지붕을 강타하며 몸이 붕 떠올랐다.
외벽이 낮아진다. 시야가 점점 높아지며 회색빛에 휘감긴 숲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점점 멀어지고 지평선을 거쳐, 이내 저 먼 하늘을 바라봤다.
작은 물체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석.
공중에 부유하던 몸이 중력에 순응했다. 길가를 꾸며놓은 화단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당탕, 착지에 실패하고 도로 위를 몇 바퀴나 굴렀다.
끽끽!
언제 따라왔는지 루루가 곁에 와 자그마한 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루루, 잠깐만. 나 멀쩡해. 그러니까…….”
난리 치는 루루를 껴안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요란하게 굴렀지만 낙법은 제대로 쳤다. 팔뚝과 정강이가 얼얼하긴 해도 어디 부러진 곳은 없다.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점처럼 보이는 하늘석.
“하늘석.”
가하란은 카트시가 있는 분수대로 돌아갔다.
-꼴이 왜 그래요?
“좀 굴렀어. 그보다 카트시. 하늘석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했지?”
-네. 기억장치에 남아 있는 데이터가 없어요. 정확히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거지만. 통제당한 기억 단자 안에 있을지도 모르죠.
가하란은 하늘석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몇 없어.”
-엄밀히 말하면 다섯이죠. 가하란, 루루, 크랜베리, 블루베리. 그리고 하늘석. 아!
“변인 중에 확인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어.”
-그렇네요. 내부 환경만 신경 쓰다 보니 배제해놓고 있었어요. 워낙 의미 없는 물체기도 하고.
가하란은 좌우로 걸음을 떼며 말했다.
“하늘석이 그날 왕성 주변을 지나갔다면?”
-이동 경로가 제멋대로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네요.
“지금도 이쪽으로 오고 있어.”
-저 좀 들어줄래요?
카트시를 들고 분수대 위로 올라갔다.
-경로를 유지한다면 오늘 밤에 지나가겠네요. 흔한 일은 아니에요. 보통 넉 달에 한 번 정도 이 위를 지나가니까요.
“주기 점검을 할 때도 자주 보지는 못했지.”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돌덩어리.
-과거 기록을 살펴봤어요. 일주일 간격으로 하늘석이 이 위를 지나간 건 67년 전에 한 번 있었네요.
“당시에 뭔가 특이한 사건이 있었어?”
-있었죠. 인간한테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끔찍한 사건이라니. 잠시 기다리니 카트시가 말을 이었다.
-정령술사 하나가 가뭄을 해결하겠다고 위험한 정령을 불러냈어요. 그간 아무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정령을 불러내겠다고 장담했죠.
어디선가 들어본 얘기였다.
가하란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혹시 몸에 불을 두른 거미를 말하는 거야?”
-알고 있네요?
“미래의 네가 말해줬어.”
-핵심 기억은 봉인 당해도 자잘한 것들은 기억하나 보네요. 미래의 제가 말한 대로 불을 두른 거미가 나타나 인명피해를 주고 사라졌어요. 날뛰었다면 수도가 사라졌겠지만, 다행히 다리 몇 번 흔들고 없어졌죠.
모든 걸 정보화하는 눈, 세계를 잇는 주황색 선, 하늘석, 그리고 현신한 정령.
조금씩이지만 하나로 엮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정령술사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을까?”
-자세한 건 성 지하 자료실로 가봐요. 분명 기록 자료가 있을 테니까.
하늘석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정령술사를 조사하면서 준비하면 될 것이다.
“내 눈은 안원하고도 연관이 있었어. 정령술사 쪽을 파보면 단서가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요. 정령술은 마법만큼이나 개별적인 것이라 문서화해서 전해지는 건 별로 없어요. 자료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 사건 정황뿐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
-맞는 말이에요.
가하란은 카트시와 함께 왕성 지하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