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별이 보고 싶네요.
카트시가 말했다.
별.
밤하늘을 잊고 산 지 오래라 별이란 게 있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가하란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1시. 태양은 여전히 회색빛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지만,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지금은 밤이었다.
“별자리 아는 거 있어?”
-지금 아는 게 있냐고 물으신 거예요? 저한테?
카트시가 웃으면서 온갖 별자리에 관한 설화를 말해줬다. 애틋한 남녀에 관한 별자리, 용맹했던 전사에 관한 별자리, 사악한 용에 관한 별자리.
“카트시는 용을 본 적 있어?”
말이 나온 김에 물어봤다. 기억을 봉인 당했다고 해도 아슴푸레하게 남은 조각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용, 드래곤, 신, 자애로운 자, 시기 많은 자, 기적의 출처. 네, 본 적이 있죠.
“역사 속에만 존재하니까…… 뭐? 진짜로 본 적이 있다고?”
침대에서 일어나 선반 위에 있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네.
“정말로? 용을 만난 적이 있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만난 기억이 남아 있어요. 재미난 분이었죠.
잠이 확 달아났다. 의자를 가져와 카트시 옆에 앉았다.
“어디서?”
-들판이었어요.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어요. 위치 정보가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용은, 드래곤은 어떻게 생겼어? 정말 거대한 지렁이처럼 생겼어?”
-거대한 지렁이가 될 수도 있고, 작은 벌이 될 수도 있죠. 인간종이 될 수도 있고 나무로 변할 수도 있어요. 형태라는 건 용에게 큰 의미가 없거든요.
“그걸 직접 봤어? 막 변하는 걸.”
-보진 않았지만 제가 한 말은 사실이에요. 의태 같은 건 용에게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역사서에서나 가끔 등장하는 신비로운 생명체. 비를 내리거나,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기적 생성자.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맛에 관한 얘기를 했어요.
“맛? 맛이라면…….”
-생명체들이 느끼는 맛이요. 저도 궁금했거든요. 미각이란 게 뭔지. 용도 마찬가지였어요. 용은 미각이 있지만 그게 보편적인지 궁금해하고 있었죠.
“그거 말고 다른 건?”
카트시의 안구가 좌우로 살짝 움직였다.
-다른 거요? 그거 외에도 고양이가 왜 귀여운지, 감자알을 더 크게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그런 얘기를 나눴네요.
고양이? 감자?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되물었다.
“다른 건? 그런 거 있잖아…… 신화에 관한 거라든지, 아니면 마나의 기원이라든지.”
-그런 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잖아요.
“고양이나 감자보다는 흥미롭지 않아?”
-글쎄요.
“엄청난 비밀 같은 건 없었어?”
-아름보리 꽃잎을 빻아서 빵에 발라먹으면 꽤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건 나도 알아.”
-용하고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지녔네요. 축하해요.
기운이 쭉 빠졌다. 가하란은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였으면 다른 걸 물어봤을 거야.”
-어떤 거요?
“하늘석의 비밀, 정말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이런 것들.”
-그런 걸 물어봐도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어요.
“어째서?”
-가하란은 파리가 날아와 음식 주변에서 맴돌면, 친절하게 음식을 떼어주나요?
“아니. 쫓아내지.”
-네, 그런 거예요.
상황 설명은 이해되지만, 비유가 잘못됐다.
“인간은 파리가 아니야. 말할 수도 있고, 용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어.”
-그거 아나요? 붉은 날개 파리와 입 긴 파리, 하가스 파리는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요. 먹이 취향도 다르죠. 하지만 결국 파리죠. 그렇다면 모기는 어떨까요? 파리와 다르니 가하란은 반갑게 맞아줄 건가요?
“해충하고 인간은 다르잖아.”
-맞아요, 분명 다르죠. 훨씬 지적이고 몸집도 크며 사회성도 갖췄으니까요. 파리보다 인간이 월등한 존재인 건 부정하지 않아요. 그러니, 인간과 용의 관계 역시 부정하지 마세요.
눈을 씰룩였다. 이해하면서도 납득하기 싫은 미묘한 지점이었다.
“역사서에 보면 용이 인간을 도와줬다고 쓰여 있던데.”
-개울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마귀가 가여워서 구해줄 수도 있죠. 가끔은.
“꼭 곤충에 비유해야 해?”
-원숭이로 대체하면 마음이 좀 편해져요?
“그건 그거대로…….”
입맛을 다시며 옆으로 누웠다.
고등한 존재의 눈에는 인간조차 파리로 보이는 걸까? 상냥한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물론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얘기고, 용은 관심 있는 인간한테는 꽤 호의적이에요.
슬쩍 고개를 돌려 카트시를 바라봤다.
“용과 친했던 사람이 있었어?”
-짧게 얘기는 들었어요. 자기가 기르고 있는 애가 한 명 있다고. 날뛰는 게 제법 귀여워서 데리고 있는데, 언제쯤 헤어져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용과 생활해온 인간.
누군지 알고 있냐고 물었지만, 카트시는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며 말을 끝냈다.
-용을 만나게 돼도 가하란은 알아보지 못해요. 용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요.
“카트시도 알아볼 수 없어?”
-전 볼 수 있어요. 물론 이 상태로는 안 되죠. 제 기능은 몸을 되찾았을 때 온전해지니까요.
카트시의 안구가 본체 옆에 내려앉았다.
-이제 수다는 끝. 자야 할 시간이에요. 인간에게 수면은 중요하니 얼른 자요.
‘용’이란 단어가 흐릿한 형태로 눈앞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말이야…….”
-자요.
카트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 떠들 수도 없으니 오늘은 포기해야겠네.
“그래, 자야지. 카트시도 잘 자. 좋은 꿈 꾸고.”
-가하란도 좋은 꿈 꿔요.
이불을 덮고 눈을 살짝 감았다.
* * *
“꿈꾸라고 했더니 정말 꿈을 꾸네.”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가하란은 곧게 뻗은 길을 바라봤다. 양옆으로 아무것도 없이 포장된 도로만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뺨을 툭툭 때려봤다.
잠이 깨지는 않았다.
안원은 일단 아닌 것 같으니 정말 꿈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일단 걷기로 했다. 새하얗기만 한 배경을 멀거니 바라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이거 언제 깨는 거지?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낭떠러지가 있으면 몸이라도 던져볼 텐데, 여긴 아무것도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꿈이 아니라 또 이상한 곳에 도착한 거라면?
루루, C, 크랜베리, 블루베리, 카트시. 처음에는 가볍게, 이내 목이 따끔거릴 정도로 세게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는 건가?
혼자 떨어져 나온 건가?
고독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숨 쉬는 게 어려워졌다. 통증은 없지만 갑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기요, 저기요!
나타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른쪽 다리가 자연스럽다는 걸 눈치챘다.
의족이 아니었다. 살점이 제대로 붙어있는 다리였다.
혼란스러웠다. 꿈인지, 다른 세계인지, 그것도 아니면…….
“워!”
몸이 살짝 밀렸다. 가하란은 으악,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뭘 그렇게 놀래.”
사람이었다.
허리까지 기른 검은 머리카락에는 금빛이 살짝 맴돌았다. 가늘게 뜬 눈은 얼핏 위험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순진해 보였다.
스무 살 초반의 여자.
그렇게 생각하며 여자를 다시 보았다. 스무 살이 맞나? 어쩌면 서른 살이 아닐까? 아니, 마흔 살이 됐을지도.
희한한 감각이었다. 외모로 연령을 추정하는 게 어려웠다. 주름도 없고 허리도 꼿꼿하고, 피부도 맑았으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돼.”
“네?”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왔다면 갈 수도 있지.”
“그게 무슨…….”
가하란은 입을 다물고 발밑을 보았다. 땅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때처럼 몸을 가눌 수 없는 지진이 들이닥쳤다.
“위험해요!”
놀라 소리치며 앞에 선 여자를 보았다.
이상했다. 여자의 발밑은 멀쩡했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 지금이 아니면 또 이상한데 빠진다?”
발밑이 쑥 꺼졌다. 가하란은 몸을 날려 낭떠러지 끝자락을 붙잡았다.
여자가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 위험하지 않으니까.”
힐긋 아래쪽을 바라봤다. 낙하하는 돌무더기 사이로 침대가 보였다. 휴게실에 놓인,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였다.
손을 놓으면 안전해진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꿈이든, 아니면 다른 세계든 손을 놓는 순간 카트시가 있는 휴게실로 돌아갈 수 있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봤다.
“같이 가요.”
이곳은 아무것도 없다. 혼자 남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여자가 뚱한 표정을 짓는다.
“친절한 건 좋은데, 너 걱정이나 해. 생판 처음 본 사람 걱정하지 말고.”
여자가 턱을 들어 올렸다.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나도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지. 근데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건 죄이자, 선택이니까.”
낭떠러지에 걸쳐 있는 손가락을 여자가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 다시는 오지 마. 여긴 있을 곳이 못 돼.”
“그러니까 같이 가요!”
왼손을 뻗어 여자의 팔을 붙들 때였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순백의 세계가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 여자를 데려가게 둘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몸이 밑으로 끌려갔다.
아니,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중력이 뒤집혔다.
낙하가 아닌 비상이었다.
한순간 눈이 뜨거워졌다. 눈이 제멋대로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아, 가하란은 탄식을 흘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 한 톨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정보로 치환돼 선으로 보였을 텐데, 순백의 세상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독의 세계.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마지막 손가락이 떨어졌다. 몸이 떠올랐다. 시야에서 여자가 점점 멀어졌다.
저 밑에 있는 여자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이름 모를 꼬마야.”
땅이 무너지며 생겼던 구멍이 한순간에 닫혔다. 여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남은 건 침대로 이어진 길뿐이었다.
가하란은 허우적거렸다. 중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침대에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몸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어쩌지?
침대로 이어진 구멍마저 닫히게 된다면 어둠뿐인 이곳에 남겨지게 되는 걸까?
그때였다.
왼쪽에 가느다란 주황색 선이 보였다.
선을 붙잡았다. 손이 타들어 갔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선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침대와 연결된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 * *
-가하란!
귀를 아릿하게 만드는 외침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가하란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루루와 두 고양이가 머리맡에 있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그냥 꿈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손아귀가 따끔거렸다. 시선을 내리니 살갗이 벗겨진 손바닥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된 거냐니?
멍한 눈으로 카트시를 바라봤다.
-가하란의 모든 정보가 일시에 소실됐다가, 다시 생성됐다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