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50화 (350/558)

제350화

“점심 먹고 어제 하던 거 마저 해보자.”

-오렌지 라인 조사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걸요. 그게 연결망과 연관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설령 있다고 한들 이해하고 파헤치는 건 힘들 거예요.

“포기는 선택지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거잖아. 난 이거 말고 할 게 없는걸?”

-……기계를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뭐라도 매달려야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나. 아니, 어쩌면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사후세계. 그것도 아니면 뇌가 만들어낸 허상?”

-안타깝게도 가하란은 살아 있어요. 그래요, 안타깝게도 살아있죠.

“그러게. 안타깝게 살아 있으니 뭐든 해봐야지.”

카트시 전용 배낭에 카트시를 담고 등에 멨다. 처음에는 들고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 했는데, 이제는 뛰어다닐 수도 있게 됐다.

-회색 하늘은 볼 때마다 어색하네요.

“나도 그래.”

왕성 바로 옆에 만들어둔 공방으로 향했다. C가 공방 앞에 대기 중이었다.

작은 기계인형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작동을 멈췄다던 118 같았다.

-회수해왔습니다.

C가 기계인형을 내려놓았다.

“고생했어.”

기계인형을 든 채 공방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카트시, 앞에는 기계인형. 무게가 실린 탓인지 의족 연결부에서 마찰음이 났다. 아까 뛸 때 망가진 걸까?

카트시를 중앙커넥터에 연결했다. 공방 전역으로 뻗어나간 커넥터에서 미세한 마나 파장이 흘러나왔다.

-자, 받아요.

시야 안쪽으로 의족이 비집고 들어왔다. 기계 팔로 의족을 건넨 카트시는 별다른 말 없이 118를 작업대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고마워.”

-충격량 계산을 다시 해봐요. 한 번 쓰고 교체해야 하는 의족은 쓸모가 없어요.

“배터리 출력을 높이려고 했는데 보류해야겠네. 일단은 내구성부터 다시 살펴봐야겠어.”

-금속 배합을 바꿔봐요. 무게는 좀 늘어나도 강도는 좋아지니까.

“무게 차이가 심하면 걸을 때 이질감이 생기니까 일단은 기존 배합금으로 다시 설계해볼래.”

-그것도 나쁘진 않죠.

왼손에 감각기를 끼고 의족의 신경망을 살폈다. 회로를 잠그고 절단부를 감싼 소켓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의족을 벗겨내니 붉게 물든 살갗이 보였다. 유사 신체술보다는 체력단련을 해야 하나.

연고를 바르고 수건으로 감싼 다음 살며시 주물렀다.

-이 친구, 마나 회로에 물리적인 손상이 생겼네요. 예상한 대로 높은 곳에서 떨어졌나 봐요.

카트시의 말을 들으며 의족을 갈아 끼웠다. 신경망을 연결할 필요 없는 단순한 의족이었다.

“마나 씰이 작동하지 않았네.”

-욕심이 과했어요. 마나포집으로 마나 씰까지 운용하려면 효율 개선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회로집약률을 더 높여야 하고요.

“이것보다 작게 만들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는 건 가하란의 몫이죠.

마나 회로가 새겨진 엘리멘트 패널을 떼어냈다. 접합부에 흠집이 생겨 회로가 뭉개진 상태였다.

툴을 사용해 복원한 후 장착했다.

갈고리처럼 생긴 긴 팔을 늘어트리고 있던 118이 움찔하며 일어섰다.

주변 환경을 파악 중인지 한동안 시각 장치를 움직이다가, 스멀스멀 기어서 공방 밖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건물 벽을 찾아 다시 기어 올라갈 것이다.

“쟤들한테도 오토마타를 넣어줄 수 있을까?”

-오토마타의 크기를 줄이려면 유사정령의 크기부터 줄여야 하는데, 가능하겠어요? 118에 넣을 오토마타를 제작하려면 제 본체의 반의반만 한 크기를 만들어야 해요.

반의반만 한 크기.

유사정령은 평면이 아닌 반구체 전면에 회로를 새긴다. 반의반이라는 건…….

가하란은 고개를 내저었다. 회로 겹침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짜맞춤으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

“줄리어스는 점 하나에 방대한 정보를 담아냈어. 하지만 저장만 가능하고 그걸 활용은 못 했지. 압축률을 높인 것까지는 좋지만, 역으로 풀어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으니까.”

-그래도 자료 정리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어요.

“실시간 연산 처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효율을 높이면, 유사정령의 크기도 대폭 줄일 수 있겠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죠.

“이론. 마법의 단어네.”

가하란은 내열장갑을 양손에 꼈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기어이 하게요? 이게 연결망과 관련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확실치 않아요. 장갑을 낀다고 해도 다치는 건 여전하고.

“내 눈에 들어온 유일한 단서야. 카트시도 인지하지 못한 연결점. 연결망이 아닐 수도 있지만, 무언가 있는 건 확실해.”

-오래 붙들고 있지는 마요. 가하란이 죽게 되면 유지보수 할 인간이 사라지는 거니까. 그건 곤란해요.

가하란은 싱긋 웃은 후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넘실대는 선들 사이에 유달리 빛들 발하는 주황색 선.

카트시에서 시작돼 하늘로 뻗어나간 정체불명의 선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치이이익, 불판에서 고기 익는 소리가 났다.

“내부 변화 있어?”

-확인하고 있어요. 아직까진 없어요.

“사소한 것도 놓치면 안 돼.”

-19번에 걸친 실험 중 그 말을 들은 건 무려 4번이나 돼요. 지겹지 않나요?

“사람은 원래 지겨운 말을 자주 해.”

열기가 내열장갑을 뚫고 전해졌다. 열기뿐만 아니라 한기도 파고들었다.

양손에 힘을 꽉 주고 오른쪽으로 끌어당겼다. 주황색 선이 살짝 기울어졌다.

-E 레이어 98 단자에서 신호 하나가 잡히네요.

“저번하고 다른 곳이네.”

-시각회로와 맞닿아 있어요.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감각 정보에 반응한 건지, 아니면 오렌지 라인에 의한 반응인지 알 수 없어요.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한층 더 심해졌다. 주황 선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얼얼한 손을 툭툭 턴 후 장갑을 살폈다. 선과 맞닿은 부분은 검게 탔고, 주변에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달궈진 응축봉도 견뎌내는 장갑인데, 가하란은 쓴웃음을 흘리며 장갑을 벗었다.

-볼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물리적 실체도 없고, 마나로도 감지할 수 없고, 무엇보다 제가 인지할 수 없는데 저랑 연결된 선이 있다니.

“나도 너한테 보여주고 의견을 듣고 싶어. 그런데 할 수가 없네.”

시야를 공유할 수 없으니 말로 설명을 해야 한다. 문득 산페르가 떠올랐다. 그 아저씨라면 시야를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살펴볼 거죠?

“봐야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양손에 감각기를 끼고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삼각뿔 형태의 마나 회로가 떠올랐다.

“여전히 잠겨 있어. 간섭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회로에서 느껴져.”

-제 의지로 풀 수 있는 모든 잠금장치는 풀어뒀어요. 나머진 가하란이 해결해야 해요.

겹겹이 쌓인 회로를 들췄다.

쉽게 응답하는 단자들 사이에 침묵하는 단자가 박혀 있었다. 신호를 몇 번으로 보내봤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여긴 거 같은데.”

-맞아요. E 레이어.

얼기설기 엮인 선을 망막에 각인했다. 선명하게 남은 머릿속 그림을 재빨리 벽면에 옮겨 그렸다.

공방의 왼쪽 벽면이 회로 도면으로 가득 찼지만, 이조차 카트시의 일부분이었다.

완벽한 청사진을 만들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인간의 시점으로 본다면, 이건 인체 해부도와 비슷하겠죠?

카트시가 벽면에 그려진 도면을 보며 말했다.

-저쪽이 인지통합을 관장하는 통합층이고, 저쪽은 언어능력을 위한 층. 기억 단자는 여전히 안 보이네요.

“켈트에 관한 것과 카트시를 만든 사람에 관한 것, 모두 기억 단자 안에 있을 텐데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네.”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찾는 수밖에 없어요. 단순 반복 작업. 해석 불가한 연결망도 이 안 어딘가에 단서가 있겠죠.

가하란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보안체계가 느슨했다면 쉬웠을 텐데.”

-줄리어스는 걱정을 많이 하는 아이였죠. 그렇기에 로키가 인간을 실험대에 올렸을 때 파기를 결정한 거고요.

카트시의 눈이 도면 가까이 다가갔다.

-제 기억 단자가 잠겨 있는 것도 그런 이유고요. 그나마 지금은 나은 편이에요. 미래의 전 대부분의 것들을 잊어버릴 테니까. 줄리어스가, 그리고 제가 바란 대로.

가하란은 카트시 본체 옆에 앉았다.

“우리가 우선 알아내야 하는 건 줄리어스가 실종되기 전까지의 기록이야.”

-저도 궁금하네요. 모호하게 남아있는 ‘줄리어스의 계획’이 뭐였는지, 다른 애들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카트시의 기억은 두 단계에 거쳐서 봉인돼 있었다.

첫 번째는 ‘최초의 오토마타’로서 기억.

두 번째는 연구실에서 쌓아온 기억.

첫 번째 기억을 누가 통제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카트시도 짐작 가는 곳이 없다고 하고.

두 번째 기억은 줄리어스, 그리고 카트시가 상호동의 하에 기억을 감춰뒀다고 했다.

소거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억 단자에 남아 있다면 잠금장치를 풀고 꺼내 올 수 있으니까.

“카트시는 왜 동의한 거야?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이 아니니 통제당하는 걸 거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파트너의 부탁이었으니까요.

“모든 걸 잃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데도?”

-가하란. 저한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요. 순간의 감정이 더 중요하지.

기계 팔이 움직였다. 손에 든 연필로 벽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구름, 산, 나무, 해.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형상화해서 그려놓았다.

-전 오랫동안 이것들을 봐왔어요. 아주, 아주 오랫동안. 자세한 기억들은 망각 저편에 있어 떠오르지는 않아도, 긴 시간을 보내왔다는 건 확실해요. 그냥 존재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건 돌덩이나 다름없죠. 물론 돌한테도 존재해야 할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돌보다는 이야기하는 인간이 더 사랑스럽잖아요?

기계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차분하게 정리한 머리카락과 고심을 담아낸 이마 주름, 생동감 넘치는 눈과 고집 있어 보이는 코.

바른 뺨, 조금 얇은 입술, 긴 목.

사진처럼 그려낸 초상화를 보는 순간, 가하란은 자신도 모르게 울적한 미소를 지었다.

“줄리어스?”

-맞아요.

“정말 닮았네.”

-닮았다고요?

“내가 살던 곳에 줄리어스와 정말 닮은 사람이 있어. 음, 조금 더 활기찬 느낌이긴 하지만 옆에 붙여놓으면 쌍둥이라 해도 믿을 거야.”

-가하란의 생체리듬이 살짝 어그러졌어요. 그리움인가요? 아니면 슬픔?

“두 개뿐이겠어?”

밀레나가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정말 똑같아지겠지. 가하란은 그림 곁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건 지우지 말자.”

-그래요. 제 첫 예술작품인 만큼 내버려 두죠.

몇 분간 멍하니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난 반드시 돌아갈 거야. 네 안쪽에서 그 단서들을 찾아낼 거고.”

-갑자기 의욕이 넘치네요. 저 여자 때문인가요?

“응, 맞아.”

-사랑인가요?

“돌아가서 확인해 보려고.”

내열장갑을 다시 꼈다.

“단순 반복 작업. 내가 자신 있는 분야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손이 다 타들어 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알겠어.”

짧게 호흡을 토해낸 후 다시 카트시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