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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49화 (322/558)

제349화

비산한 돌무더기 속에 허우적거리는 마수들이 보였다. 족히 서른 마리는 되어 보였다.

일시에 달려들면 도시가 세운 방책을 단숨에 무너트릴 숫자.

도시를 위협하고도 남을 위험한 생명체들조차 마도사가 일궈낸 마법 앞에서는 날파리나 다름없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밀려든 바람이 저 먼 곳에 떠 있는 지표면을 향해 모여들었다.

부러진 나무와 이름 모를 잡초, 흙더미와 마수가 한데 뒤엉켰다.

상식을 넘어선 파괴적인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주변은 지독한 정도로 고요했다.

공중에서 뒤채이던 부유물들이 한순간 지면으로 추락했다.

쿠우우웅!

뒤늦게 아찔한 충격음과 몸을 흔드는 충격이 전해졌다. 빽빽한 수풀을 비집고 뽀얀 먼지바람이 불어왔다.

민은 손을 들어 눈앞을 어지럽히는 흙먼지를 치워냈다. 잠시 후 사부작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른해 보이는 마도사가 숲을 빠져나왔다. 마수 수십 마리를 단숨에 처리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태평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 날뛰지 않겠지. 쟤들도 생각이란 게 있을 테니까.”

퀼비언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나쁘지도, 좋지도 않으니까 일단은 괜찮은 건가? 밖에서 힘 쓰는 건 역시 피곤해.”

마도사가 길게 하품했다.

“가는 동안 눈 좀 붙일 테니까 말 걸지 마.”

마도사가 로브를 몸에 두르고 신발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마도사의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모양새가 이상했다.

허리가 뒤로 꺾인 채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이 많은 애야.”

민은 움찔하며 옆을 보았다. 하얀 쥐가 어깨에 있었다. 언제 다가온 걸까. 기척이 전혀 없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음에도 존재감이 없어졌다. 보이는 데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희한한 일이었다.

“인간족 아이야, 내 이름은 아까 들었겠지?”

“예. 산테였죠.”

“통성명했으니 좀 더 가까워진 사이가 됐네. 그래서 생각해 봤어?”

“청소꾼에 관한 거라면…….”

“잠깐만! 혹시 거절할 생각이야? 그렇다면 답변은 다음에 해줘. 고민하다 보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눈을 감고 움직이는 마도사와 유창하게 떠드는 새하얀 쥐. 신비로우면서도 뭔가 엉성한 분위기였다.

“근데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요?”

민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일직선으로 걸어가던 마도사가 나무와 부딪쳤다. 두 발이 방향을 잃은 것처럼 움찔움찔하다가 다시 왼쪽으로 틀어 나아갔다.

“위험하면 눈을 뜰 거야.”

“저렇게 몇 번 더 박으면 몸이 남아나질 않겠는데요.”

“튼튼해서 괜찮아. 그리고 지금 저 애는 다치는 것보다 잠자는 게 더 중요해.”

잠자는 게 더 중요하다?

대지를 들어 올리는 전대미문의 마법을 쓴 직후, 마도사는 꽤 피곤해 보였다. 하품도 연이어 계속했고.

“일정 수준의 마법을 쓰고 나면 반발 작용으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건가요?”

“퀼의 약점을 대놓고 물어본다는 건, 청소꾼이 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알려줄까?”

“……아닙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퀼의 비밀인데.”

“가치 있는 비밀이라면 쉽게 언급하지 않았겠죠. 전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말자는 주의거든요.”

하얀 쥐가 짧은 앞발로 팔짱을 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그냥 말해줄게. 퀼은 표리영역 바깥에서는 금방 지쳐.”

“힘을 낭비하면 위험해지겠군요.”

“아니, 그냥 지친다고.”

파아아아!

앞쪽에서 거친 소음이 일어났다.

민은 입을 살짝 벌리며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마도사의 이동 경로에 있던 수풀이 좌우로 밀려나며 길이 생겨났다.

허리가 뒤로 꺾인 마도사가 앞으로 나아갔다. 방해물이 사라진 길을 거침없이.

“……자면서도 저런 게 가능합니까?”

“뇌는 수면을 취하고 있지만 분리해낸 정신체는 일하고 있을 테니까.”

설명을 듣고 난 후 민은 생각했다. 이해하는 걸 포기하기로.

“퀼 님께서 과거 제국이나 연합왕국의 손을 들어줬다면, 대륙은 통일됐겠네요.”

“저 아이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애초에 그런 아이였다면 내가 제안하지도 않았을 거고.”

민은 걸음을 멈추고 하얀 쥐를 바라봤다.

“당신은 대체 무엇이죠?”

“무엇이라. 글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난 무엇이었을까? 왜 존재하게 된 것이며, 왜 존재해야 하는 걸까.”

농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되묻고 있었다. 존재의의를.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뭔데?”

“당신은 인간을 좋아한다는 걸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나는 분명 너희를 사랑해. 아끼지. 안쓰러워서 구해주고 싶고, 얘기를 들어주고 싶고, 같이 어울려 놀고 싶기도 해.”

산테의 붉은 눈이 한순간 빛을 냈다.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밝아서, 민은 고개를 돌려야 했다.

“동시에 밉기도 해.”

산뜻한 목소리에 담긴 은은한 분노. 민은 짧게나마 상상했다. 마도사 곁에 있는 이 작은 쥐의 분노가 인간에게 향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작은 쥐의 힘을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인간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재앙이 펼쳐질 것이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산테를 슬며시 밀어내고 모른 척 떠나고 싶지만, 이미 어깨를 점령당했다.

민은 긴장한 채 말했다.

“미움받지 않도록 힘내야겠군요.”

“꼬마야,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내가 미워하는 건 극소수니까. 네가 그 안에 들어있지만 않으면 돼.”

“제가 미움 살 일을 꽤 벌여놨거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선하게 살 걸 그랬어요.”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착하다는 방증이야. 그러니까…….”

새하얀 뒤가 뒷말을 작게 꺼냈다.

“청소꾼 하지 않을래? 요즘 사람이 너무 없어.”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왜. 넌 재능이 충분해. 표리역영도 이미 가봤고, 틈에서도 생존했어. 이만한 재목을 찾는 건 어려워.”

“저는 세상의 이면이나 도깨비 같은 것보다 현실 문제를 마주하고 싶거든요.”

“어? 뭐라고 했니?”

“못 들으셨나 보네요. 그러니까 청소꾼은…….”

다시 한번 거절 의사를 밝히려 할 때였다. 산테가 휙 날아올라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마도사에게 향했다.

“다음에 또 얘기해. 인간족 꼬마야.”

마도사나 하얀 쥐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 똑같았다.

잠든 채 휘적휘적 걸어가는 마도사를 지켜보다가 서북쪽을 바라봤다.

생고생해서 도착한 웨켄을 떠나 다시 둔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하란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민은 먼지 묻은 안경을 벗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반듯한 돌을 주워 돌탑 위에 쌓았다. 균형이 제대로 잡혀서 흔들리지 않았다.

가하란은 분수대 옆에 일렬로 늘어선 열아홉 개의 돌탑을 바라봤다.

-그거 언제까지 만들 거예요?

“돌아가기 전까지.”

-시간을 시각화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인데.

“뭐라도 하는 게 낫잖아. 안 그래?”

가하란은 곁으로 다가온 크랜베리를 쓰다듬은 후 일어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가 시작됐다.

이제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거리를 일정한 속도로 뛰었다. 회색으로 물든 벤치를 지나 배수로를 따라 움직였다.

맞은편에 주차해놓은 마차가 보였다. 양팔을 힘차게 흔들었다. 속도가 점점 붙었다.

마차가 가까워진다.

충돌하기 직전, 디딤발이 된 오른발에 힘을 한 번 더 주었다.

꿍, 의족에 삽입해둔 배터리가 마나를 토해냈다. 방출된 파장을 발밑으로 유도되며 반발력이 생성됐다.

단숨에 몸이 떠오른다. 팔을 살며시 움직여 솟구친 몸의 중심을 잡았다.

발아래 마차 지붕이 놓였다. 다시 한번 도약. 3층 건물 높이까지 올라간 몸을 제어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두 번의 방출을 마친 의족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가하란은 발목을 내려다봤다.

“출력을 조금 더 높여도 되려나.”

신경망 점검을 간단히 끝내고 다시 뛰었다.

나타 왕국에 온 지도 1년 7개월이 지났다. 거병에 장착할 마나포집 모듈은 완성 단계에 이르렀고, 그와 병행해서 시작한 유사 신체술도 제법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을 때까지 도시를 뛰다가 다시 분수대로 돌아왔다.

-다 했어요?

“어.”

-어때요? 쓸 만해요?

“출력을 조금 더 높이려고.”

-비행을 꿈꾸는 건 좋지만 맨몸으로 바닥에 떨어지면 골절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죠?

카트시가 의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중에서 자세를 제어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마나파장으로 반발력을 생성해내는 건 성공했으니, 이걸 좀 더 연구하면 착지 안전성도 높아질 거야. 배터리 출력만 해결하면 브라인 님처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도 가능할 테고.”

-그러다 삐끗하면 죽어요. 바라라의 딸이야 마나로 몸을 감싸는 거지만, 가하란은 배터리에 의지하는 거니까요.

“어쩔 수 없잖아. 난 마나를 여전히 감각할 수 없는걸. 신체술을 써보고 싶어도 마나를 모르는 이상 불가능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회로를 그렇게 다루고, 짜맞춤을 이해할 정도로 마나와 친숙한데 몸이 마나를 감각 못 하다니.

“마나를 사용하지 못해도 감각기나 다른 도구들은 쓸 수 있으니까.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지.”

카트시와 대화하는 사이 기계인형이 앞을 지나갔다.

보도블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어긋난 곳을 뾰족한 팔로 드러내 방향을 맞췄다.

-232의 기능 문제는 완전히 해결한 것 같네요. 마나포집도 유지되고 있고.

“다른 애들도 작동 중이지?”

-163은 정지했어요. 포집 회로에 문제가 생긴 거 같아요. 118은 지붕을 넘다가 떨어졌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고요.

“소형 기계에 균형 유지장치까지 넣는 건 무리였나. 118은 지금 어디 있어?”

-C가 회수해서 공방에 가져다 놨어요. 나중에 살펴봐요.

“그래야겠네.”

가하란은 뿜어져 나오는 분수 물에 몸을 씻으며 거리를 바라봤다.

각기 다른 기능을 탑재해 제작한 수많은 기계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데이터들이었다.

쌓인 자료를 취합한다면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카트시.”

-왜요?

“생각난 거 뭐 없어?”

-같은 질문을 매일 하면 질리지 않나요?

“혹시 모르니까.”

카트시의 안구가 하늘을 향했다.

-켈트에 관한 건 여전히 제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어요. 이건 제 의사가 아니라 누군가 잠가둔 거라, 풀기 전까지는 떠오르지 않을 거예요.

“나타 어딘가에 있을까?”

-모르죠. 줄리어스를 비롯해 왕국의 개발진들이 켈트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을 거예요.

가하란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계절감이 전혀 없는 이 세상의 유일한 장점은 적당히 따뜻하다는 것이다.

“카트시는 찾고 싶지 않아? 그래도 자기 몸인데.”

-글쎄요. 어차피 모든 감각은 허상이에요. 내면의 정보만 조작하면 어떤 것이든 만들어낼 수 있죠. 몸이 뭐 중요한 가요, 머리만 제대로 작동하면 그만이지.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은 몸에서 머리를 떼어내면 끝이지만, 전 아니니까요.

가하란은 작게 웃으며 옷을 입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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