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48화 (321/558)

제348화

똑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대화가 한순간 중단됐다. 데옹이 현관을 보며 걸음을 떼기 직전, 다시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연기자가 오셨네.”

퀼비언의 손가락질에 문이 활짝 열렸다. 바깥에 서 있는 건 빈센달이었다.

“퀼비언 님!”

쾌활한 인사와 함께 빈센달이 안으로 한 걸음 들어올 때였다.

그의 몸이 굳었다. 어어, 난처한 신음한 흘리다가 이내 픽 기절해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장을 보며 퀼비언이 말했다.

“데옹, 저것 좀 치워줘.”

“그래봤자 또 찾아올 텐데요.”

“그러게. 저놈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겁이 많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대담해.”

데옹이 빈센달을 어깨에 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해꾼이 또 오기 전에 자리를 옮길까?”

거절할 수 없는 권유였다.

마도사가 두툼한 로브로 온몸을 가렸다. 이 날씨에 저런 옷이라니.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지만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추위를 타서.”

한여름이라는 걸 인지시키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퀼비언과 함께 동부 방책으로 향했다.

방책으로 접근하자 경계를 서던 군인이 달려왔다. 민은 손을 들어 괜찮다고 말한 후 퀼비언과 함께 방책을 넘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죠?”

“텃밭 좀 보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동쪽으로 걷는 퀼비언이었다.

“여기에 내가 가꾸던 텃밭이 있었는데 말이야.”

퀼비언이 눈앞에 쌓인 마수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잔뜩 꼬인 파리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이젠 파리 농장이 됐군.”

“이 근방에서 마수들끼리 영역 다툼을 벌이는지, 끝없이 싸우고 있어요. 그러다가 도시 쪽으로 밀려들기도 하고요.”

“손으로 직접 일군 거라 나름대로 애착이 갔는데.”

마도사가 발로 마수의 시체를 툭툭 찼다. 썩은 살점이 뚝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조사를 위해 나오신 거라면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시는 게…….”

“민 교수.”

퀼비언이 로브를 벗어던졌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어디선가 꺼낸 면장갑을 손에 꼈다. 언제 가져온 거지?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예?”

“와서 도와. 늙은이 혼자 옮기기에는 너무 크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뭐 하시려고요?”

“엉망이 된 텃밭을 재건해야지. 여기가 토양이 좋아. 향채를 심으면 향이 기가 막히게 올라올 거야.”

민은 허리를 숙이며 사체를 옮기는 퀼비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으스러진 나무, 파헤쳐진 대지, 메뚜기 떼처럼 집단을 이뤄 날아다니는 파리와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마수들.

단언할 수 있다.

여긴 밭을 꾸릴 만한 장소가 아니다.

“뭐하냐니까? 안 도울 거야?”

“꼭 여기에 하셔야겠어요?”

“땅이 좋다니까 그러네. 비옥하다는 단어는 여길 위해 탄생한 말이야.”

마수들이 흘린 체액으로 썩은 내가 풀풀 나는 땅. 질긴 잡초도 여기에 심으면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았다.

눈앞으로 장갑이 날아왔다. 민은 옅게 한숨을 내쉬며 장갑을 꼈다.

“마법으로 하면 편하지 않나요?”

“민 교수는 왜 걸어 다녀? 누워 있으면 편한데.”

“비약이 심하시네요.”

“그거나 그거나.”

민은 마수 사체 밑에 손을 집어넣고 신체술을 사용했다. 소 두 배만 한 사체를 번쩍 들어 올려 저 멀리 던져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먼지를 일으킨 사체 위로 파리 떼가 날아들었다.

“틈에서 반년 동안 계신 거죠?”

“즐거운 노동시간에 그런 재미없는 얘기를 하고 싶어?”

“전 그 얘기를 하려고 따라온 거니까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열정이 넘치네.”

이십 대의 얼굴로 ‘젊은 친구’ 운운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몇백 년을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마도사인데.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지. 내가 이번에 찾아낸 틈은 시간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곳이었어.”

“꽤 정상적인 곳이네요.”

“하늘이 바닥에 있고 땅이 머리 위에 있다는 것만 빼면 나름 괜찮은 곳이었지.”

“……제가 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네요.”

사체를 치우면서 퀼비언의 말을 들었다. 상하가 반전된 세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세계, 하루가 반복되는 세계, ‘내’가 무수히 늘어나는 세계.

“틈을 관통하는 딱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격리돼 있다는 거겠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곳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 끼쳐.”

“그나마 다행이네요.”

“물론 이마저도 언제 뒤바뀔지 몰라.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게 불변의 진리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 관측하게 될지도 모르지. 서쪽에서 뜨는 해를.”

두리번거리던 퀼비언이 팔뚝만 한 마수 뼈를 부러트린 후 손에 쥐었다. 마수 뼈로 만든 엉성한 호미로 흙을 뒤집기 시작했다.

“설마 그걸로 흙을 고르시게요? 여길 전부?”

“남는 게 시간이야. 정성을 들여야지.”

흐뭇하게 웃는 퀼비언이었다.

민은 장갑을 벗고 방책 쪽을 바라봤다.

“잠시 다녀올게요.”

“어디 가게?”

“저는 시간이 모자라서요.”

지면을 박찼다. 신체술을 휘감은 몸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방책을 뛰어넘은 후 오가는 군인을 붙잡았다.

“쟁기가 어디 있지?”

어리둥절하게 보던 군인이었으나 이내 창고를 가리켰다. 쟁기를 챙겨 퀼비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수 뼈로 땅을 고르던 퀼비언이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기어이 가져왔네.”

“땅은 제가 갈 테니 말씀이나 해주시죠.”

쟁기를 땅에 박아놓고 연결된 줄을 어깨에 이었다. 이 나이 먹고 소처럼 일하게 될 줄이야.

걸음을 떼며 말했다.

“퀼 님은 틈으로 진입하는 방법, 그리고 돌아오는 방법을 알고 계실 테죠?”

“방법. 그건 방법보다는 요령에 가깝지. 미리 말해두겠는데 민 교수는 불가능하니까 궁금해하지도 마.”

“요즘 들어 생각해요. 불가능이란 게 존재할까?”

마도사가 로브를 바닥에 깔더니 그대로 누워버렸다.

“인간은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지. 나는 마법이란 걸 남들보다 잘 다루고, 민 교수는 밭을 잘 갈고. 주어진 재능에 만족하며 사는 게 좋아.”

“그거참 격려가 되는 말이네요.”

“거기, 거기! 돌멩이들 많으니까 잘 솎아내봐.”

손가락만 까닥거리며 일을 시키는 마도사였다.

민은 쥐고 있던 줄을 내려놓으며 퀼비언을 바라봤다.

“왜?”

“부탁받은 게 떠올랐어요. 웨켄에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잊고 있었네요.”

“나하고 관련된 일이야?”

“네. 브라인 님을 아시나요? 둔에 계시는 바라라의 딸.”

마도사가 눈을 씰룩였다.

“알지. 만사 귀찮아하는 아줌마. 그분은 왜?”

“기억을 잃으셨어요.”

날뛰는 마수 앞에서도 표정 변화가 없던 마도사가 눈을 크게 뜨며 상체를 세웠다.

“기억을 잃어? 그 아줌마가?”

“예.”

“다친 거야? 머리에 큰 충격이라도 받았어? 마법적인 힘은 그 아줌마한테 별 소용이 없을 테니, 외상인 게 분명한데.”

“아니요. 그분은 기억을 대가로 사람을 구했어요.”

“……그거야말로 불가능한 일일 텐데. 바라라의 딸이 기록의 의무를 저버리고 생명을 구하다니.”

민은 가하란과 나누었던 대화를 퀼비언에게 전했다.

마도사가 팔짱을 끼며 턱을 끌어올렸다.

“분명 브라인의 심상세계 안에는 내 정신체가 남아 있긴 해. 도깨비 관리용으로 남겨뒀으니까. 그 가하란이란 꼬마가 내 정신체를 만났다고? 그리고 내가 도왔고?”

“제가 듣기론 그랬어요. 자세한 건 본인에게 직접 듣는 편이 나을 테죠.”

“그 아줌마, 노년에 아주 제대로 사고를 쳤네. 재미난 일이야.”

마도사가 로브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낼 때였다. 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도사 어깨에 흰색 쥐가 앉아 있었다. 눈이 잘 익은 체리처럼 붉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걸까?

“저기 어깨에…….”

“이 친구는 신경 쓰지 마. 알게 되면 민 교수도 인생이 피곤해지니까.”

마도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쥐가 날아올랐다.

날아? 쥐가? 어떻게?

민은 손을 내밀어 눈앞으로 날아오는 쥐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땅이 늪처럼 변했다. 재빨리 뒤로 뛰어올랐지만, 등 뒤에 토벽이 세워져 있었다.

“인간족 아이야. 난 공격할 의도가 없으니 진정해. 네 적개심에 대응해서 내 아이들이 반응하는 것뿐이야.”

쥐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퀼 님, 이건 대체 뭐죠?”

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쥐가 아니었다. 퍼밀리어 계약을 했다고 해도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다.

마도사가 만들어낸 마법 생명체인가?

“너, 백형을 만났구나. 도깨비도 몇 마리 잡았고. 엘리, 그 아이의 냄새도 나. 재능이 있네.”

코앞까지 다가온 쥐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청소꾼 하지 않을래? 오물을 치우는 건 아주 뿌듯한 일이야. 정의감도 듬뿍 얻을 수 있고. 남은 인생을 공의(公義)에 바치는 것도…….”

가까워지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눈을 찌푸릴 때였다. 마도사가 말했다.

“산테, 적당히 하고 돌아와. 브라인을 만나러 가야 해.”

“바라라하고는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 아이는 나를 감시하려 들거든. 평생 따라다니며 하나하나 다 적을 기세야. 솔직히 무서워.”

마도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날아온 로브가 쥐를 둘둘 감싸 끌어당겼다.

흐물거리던 대지가 다시 단단해졌고, 등 뒤를 막아 세우던 토벽도 무너져 내렸다.

대체 뭐였지?

청소꾼을 언급한 걸 보면 조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민은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 몸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였다.

새빨간 눈을 지닌 쥐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일까.

크르릉,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곰의 형태를 띤 마수였다. 어깨 쪽에 팔이 하나씩 더 달려 있었는데, 돌덩이를 움켜쥐고 던질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쥐 쪽에 신경이 쏠린 탓에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다. 쟁기에 손을 뻗었다. 무기로 쓸 만한 게 그것뿐이었다.

쟁기 몸통을 붙잡고 날을 앞세워 돌진하려는 순간, 예리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파아아아.

강풍이 얼굴 옆을 때렸다. 앞서간 바람을 따라 흙먼지가 일어났다.

민은 먼지 사이로 으깨져 가는 마수를 보았다. 이윽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쟁기를 손에서 놓았다. 형태를 잃은 마수를 보고 있자니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국가 간 전쟁 같은 것도 마도사 눈에는 애들 장난처럼 보이지 않을까?

“민 교수. 일단 둔으로 가자고.”

“지금 바로요?”

“시간 없다며?”

마도사가 방책 쪽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칭칭 싸맨 로브 안쪽에서 쥐가 튀어나왔다.

쥐의 짧은 꼬리가 한순간 길어지더니 마도사의 팔을 휘감았다.

“온 김에 청소하고 가.”

쥐가 말했다.

“표리영역 바깥일이야.”

“그래도 아이들이 불쌍하잖아. 조금만 도와주자.”

“너는 정말…….”

마도사는 쥐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뽑았다.

“민 교수. 잠깐만 기다려. 앞마당만 쓸고 올게.”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도사가 날아올랐다. 부적을 밟지 않아도 날 수 있는 건가?

하늘로 솟구친 마도사를 쫓아 시선을 움직일 때였다. 허공에 멈춰선 마도사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숲에 가려져 마도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군대 같은 건 예산 낭비 아닐까.”

민은 잘게 부서진 땅덩어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걸 보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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