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틈.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했다.
앞으로 나아가도 나아가도 변함이 없는 숲.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자리를 끝없이 맴돌았다.
혼자였다면 모든 걸 포기했을 것이다.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요.”
“뭔데?”
“표리영역과 틈. 이 두 개는 같은 건가요?”
“아니. 전혀 달라. 표리영역은 층에 해당하지. 고정된 곳이며 이곳 현실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어. 하지만 틈은 아니야. 물론, 표리영역 내에도 틈이라 부를 수 있는 기괴한 곳이 존재하지만.”
그렇군요, 민은 대답 후 생각을 정리했다.
“제가 겪었던 일에 대해 말해드리죠.”
민은 버벅거림 없이 단번에 설명을 끝냈다.
“빠져나오니 5년이 지나 있었다. 안에서 보낸 시간은 대략 2달 정도고.”
마도사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그나마 다행이네. 반대였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5년을 그 안에서 보냈으면 아마 미쳤겠죠.”
“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민은 데옹을 바라봤다.
“설계 오류가 만들어낸 이해 불가한 영역. 제가 들은 설명이에요.”
“들어야 할 건 다 들었네.”
민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보가 더 필요해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왜 갇히게 된 것이며, 어떻게 빠져나온 건지. 무엇 하나 해명된 게 없어요. 데옹 씨에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자신은 권한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죠.”
눈치를 받은 데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명. 그래, 뭐 설명해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협회의 규칙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고.”
마도사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기가 날아왔다. 찻잔이 깔리고 티스푼과 설탕, 한입 크기의 과자도 앞에 놓였다.
“근데 왜 집착하는 거지?”
마도사의 눈짓을 따라 펄펄 끓는 주전자가 움직였다. 향긋한 차향이 찻잔 안을 휘감고 올라왔다.
민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다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집착이요?”
“그래, 집착. 왜 이 일에 매달리는 걸까? 이미 끝난 거잖아. 민 교수는 그 기괴한 곳을 벗어나서 현실에 안착했어. 도리어 상대적으로 젊어진 거니까 좋은 거 아닌가? 아득바득 자기 시간 버려가며 괴현상을 파헤치려 하는 진의, 그게 좀 궁금한데.”
마도사가 손짓했다. 식기 전에 들어, 라는 말과 함께.
민은 찻잔을 쥐었다.
“마도사 님 말씀대로…….”
“협회장. 아니, 그냥 퀼이라고 불러.”
“……퀼 님의 말씀대로 끝난 일이죠. 잊고 살면 그만인 일이 됐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왜? 틈에서 뭘 잃어버린 거야? 돌아가야 할 이유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왜 관심을 보이는 거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걸 보면서 단번에 납득하는 사람이 있죠. 반대로 지겹게 관찰한 후에 하나의 규칙으로 정립해야 속이 편한 인간도 있고요.”
퀼비언이 옅게 웃었다.
“민 교수는 후자다?”
“예.”
“앎의 욕구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는 건 너무 안타깝지 않아? 세상에는 즐길 거리가 무척이나 많다고. 남자도 많고, 여자도 많지.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더더욱 많고. 고작 지식 따위에 목숨 걸 필요 있나?”
민은 심드렁하게 말하는 퀼비언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퀼 님은 왜 틈에 집착하시죠? 말씀을 들어보니 오래전부터 그곳을 조사하고 계신 것 같은데.”
“나? 내가 거길 뒤적거리는 이유는 아주 단순해. 중요한 게 그곳에 있거든. 난 그걸 되찾기 위해 발악할 뿐이야. 지식이니 규칙이니, 내게 하등 중요하지 않아. 모든 건 되찾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틈에서 뭘 잃어버리신 거죠?”
퀼비언의 말을 역으로 인용해 되물었다.
“뭐일 거 같아?”
“……물질적인 건 아니겠죠. 그런 건 이곳에서도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 지극히 물질적인 건데.”
“예?”
살짝 내려온 안경을 추켜올리며 퀼비언을 바라봤다. 손짓 한 번에 청뢰(靑雷)를 불러오는 인간. 그런 괴물이 탐내는 물질이란 대체 무엇일까.
“사람.”
대답을 마친 퀼비언이 싱긋 웃었다.
“나는 사람을 찾고 있어. 인간도 엄밀히 말하면 물질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잖아? 시시한 이야기라 재미없나.”
과자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던 퀼비언이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아무튼 관심 끄는 걸 추천할게. 틈은 여전히 비밀 덩어리야. 180년 정도 뒤적거리고 있는데, 매번 새로운 사실만 밝혀질 뿐 규칙 같은 게 보이질 않아.”
민은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을 멈춘 채 마도사를 바라봤다. 지금 몇 년이라고 했지?
“왜?”
“180년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귀가 먹을 나이는 아닌 거 같은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다른가?”
마흔을 넘긴 나이가 젊은지 아닌지는 나중에 따지고, 대체 마도사의 나이는 몇인 거지?
불로불사라도 되는 건가?
“다치면 아프고 나이도 먹어. 치명상을 입으면 죽기도 하겠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무엇, 그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야. 괴물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니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과자를 입에 쏙 집어넣고 천천히 씹는 마도사였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허황된 소리라 여겼겠지만, 말한 주체가 마도사라면 진실이라 믿는 수밖에.
“180년 넘게 사람을 찾고 계신 건가요?”
“그래.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고 있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틈 안에서 사람을 만난 적 있어?”
“아니요. 먹을 수 있는 작은 동물들만 수없이 마주쳤을 뿐, 사람은 보지 못 했어요.”
“그러면 거기도 아닌가 보네.”
“틈이란 게 대체 몇 개나 있는 거죠?”
마도사가 검지를 치켜세우더니 옆으로 누운 ‘8’를 그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무한히 많다.”
“무한히 많다는 건…….”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도사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을, 셀 수조차 없이 많은 공간 안에서 찾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미친 짓이야. 헛된 짓이고. 진즉에 포기했어야 할 미련한 짓. 그러니 민 교수는 틈에 관한 호기심을 접어. 나처럼 매몰돼 헛되이 시간 쓰지 말고.”
퀼비언이 허리를 튕기며 그물침대에서 일어섰다.
“나야 시간이 넘치다 못해 지긋지긋하게 많아서 이 짓거리를 하는 거지만, 민 교수는 아니잖아.”
마도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청춘을 담은 외모에, 노년이 녹아있는 눈, 세월을 읽어내기 힘든 머리카락.
얼굴에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담고 있는 마도사가 나직이 말했다.
“그 시간에 사랑을 해. 아니면 누굴 열렬히 미워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도박에 빠져보는 것도 좋아. 마약에 손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살인에 취해보는 것도 해볼 만해. 그 무엇을 해도 틈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일 테니까.”
“……퀼 님께서 그렇게 말할수록 틈이란 게 뭔지 더욱 궁금해지네요. 틈이 제게 준 5년. 딱 그 시간만큼만 조사해 보려고요.”
“집착이 심한 꼬마네. 나중에 그때 왜 말리지 않았냐고 탓하지 마. 난 경고할 만큼 했으니까.”
“남 탓할 정도로 모자라진 않아요.”
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 참과 거짓, 어느 쪽일 거 같아?”
“틈과 관련된 질문인가요?”
“되묻지 말고 답해봐.”
민은 아기자기한 과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만 해도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다 보니 지적 능력을 갖춘 생명체가 나타났고, 어쩌다 보니 사회성을 얻고, 어쩌다 보니 인간을 비롯한 유사 인종이 되어 이런 모양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담론을 나눴어요. 왜 모든 종의 언어가 같은 것일까. 나아가 언어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진리가 아닌 배움으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인가.”
가하란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언어에 의문을 품는 순간 동시에 범용적으로 쓰이는 단위도 신경 쓰였어요. 시, 분, 초는 누가 구분 지었을까. 길이의 단위인 cm, m, km는 누가 제창했을까? 만들어낸 사람이 없는데 만국 공통으로 쓰였죠. 재미난 건 누구도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저 사용했다는 점이에요.”
말을 마친 후 퀼비언의 표정을 살폈다. 마도사는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깨달았다면 내가 던질 질문의 답을 알겠네.”
“퀼 님도 이 기현상을 알고 계셨군요.”
“아는 게 대단한 건 아니야. 옆에서 살짝 찔러주면 어지간한 사람은 깨닫게 돼 있어. 잠금장치가 약하거든. 물론, 그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통제된 자아에만 머무는 사람도 있지만.”
퀼비언이 손뼉을 가볍게 쳤다.
“아무튼 내 질문에 답해봐. 세상은 우연의 산물이다, 아니면 설계된 것이다. 어느 쪽이지?”
“철저하게 만들어졌다. 신에 의해서.”
“신. 지적설계자. 우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대에 오른 배우였어. 세밀한 연기는 자율에 맡기지만, 이야기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배우가 무슨 짓을 해도 결말은 바뀌지 않아. 그런 세상이었지.”
괜스레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얼마 전’까지라는 건 지금은 다르다는 건가요?”
“감독이 은퇴해 버렸거든. 무대 위 배우들에게 각자의 대본을 던져주고는 너희끼리 알아서 다 해라, 이렇게 말한 거야.”
“좋아해야 할 일인가요? 종교들이 그토록 논쟁거리로 삼던 자유의지를 우리가 얻어낸 거니까요.”
퀼비언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막연한 자유가 좋은 건지, 아니면 쓸데없는 건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니까. 아무튼 감독은 퇴장했고 이제 남은 사람들끼리 무대를 꾸며야 하는데, 어? 무대장치 중에 못 보던 것이 있는 거야. 아무도 그게 뭔지 몰라. 감독한테 묻고 싶어도 이제 물을 수 없게 됐고.”
“그게 틈인가요?”
“아니. 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온갖 문제가 생겨나고 있어. 완벽한 조율자가 떠났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무책임한 신이네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 양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우린 신이라 부르지만 그 양반 역시 불완전한 존재였으니까. 그거 알아? 오롯하게 완전하다면 존재할 이유조차 없다는 걸. 그자는 불완전했기에 오랜 기간 동안 우리를 돌봐왔던 거야.”
“우린 모두 신의 자식인가요?”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지.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된 자식들은 부모 품을 떠나 새집을 찾은 거야. 바닥이 제멋대로 꺼지고, 지붕은 삐걱거리고, 울타리 밖에서는 괴생명체가 기웃거리는 집이지만.”
괴생명체.
듣자마자 떠오른 건 마수였다.
퀼비언이 코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마수 또한 신의 자식이야. 범주 안에 들어와 있어.”
“그러면 괴생명체는 대체 뭐죠?”
“범주 바깥에 있는 것들. 우리의 신이 창조하지 않은 것들. 친절한 이웃일지, 칼 든 괴한일지 모르는 것들.”
“상당히 위험한 상태네요.”
“아닐 수도 있어. 그냥 헛발질 하는 걸지도 몰라. 전전긍긍하며 대비했는데 괴한은커녕 개미 한 마리 나타나지 않고 끝날 수도 있지. 울타리 너머에는 온순한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지상낙원. 그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라면요?”
퀼비언은 대답 대신 현상으로 답을 보여줬다.
위로 붕 떠 오른 비스킷이 잘게 부서지더니, 이내 먼지가 돼 마도사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꼬마야.”
툭 튀어나온 꼬마라는 호칭이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민은 예, 라고 대답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그렇다고 멍청히 살기에는 너무 거대한 걸 알아버렸어요.”
“잊어. 그러면 돼. 다 잊으면 돼. 틈도, 내가 한 말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