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6화
강렬한 마나 파장.
이전에도 경험해본 적이 있다.
거병에 탑재된 마나응축봉이 사고로 폭발했을 때 비슷한 충격이 몸을 휘감았다.
민은 잔뜩 경계하며 허공을 응시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다들 충격에 대비해요!”
말을 들은 데옹이 앵무새처럼 다시 크게 외쳤다. 충격에 대비하라고.
민도 도끼를 앞세운 후 뒤로 훌쩍 물러섰다.
날뛰며 다가오는 거대한 마수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정체불명의 현상이 더 위험했다.
균일하게 뿜어져 나오던 마나 파장이 한순간 사라졌다.
온다.
민은 마나를 최대치까지 끌어당기며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격렬한 마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파장이 뿜어져 나오던 공간에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누구지?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듬성듬성 검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얼굴은 젊었다.
아니, 늙은 건가?
미묘했다. 외관만 놓고 보면 이십 대 중반 같았으나, 전체적인 느낌은 일흔이 넘은 노인 같았다.
“그쪽은…….”
돌연 나타난 남자에게 말을 걸 때였다. 방책 위로 올라선 데옹이 외쳤다.
“조합장님!”
조합장?
데옹의 목소리에 반응한 남자가 고개를 틀었다.
“데옹, 안 죽고 잘 살아 있네.”
“만나자마자 악담을 하세요. 그보다 왜 이렇게 늦으신 거예요?”
“말했잖아. 나도 예상할 수 없다고. ‘틈’은 원래 그런 곳이야.”
틈, 데옹의 존대, 그리고 조합장.
남자의 정체를 유추하고도 남을 단서였다.
“마도사 퀼비언.”
멍하니 이름을 내뱉었다.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추모길을 걷는 위대한 마법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어야 했다.
반백 년 전부터 추모길을 걷던 사람이니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니, 마도사 역시 늙어야 정상 아닌가?
“날 찾아온 거야?”
자연스러운 평대가 이상하리만치 어울렸다.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원은 아닌 거 같고. 근데 협회 배지를 들고 있네? 허스가 보낸 거야? 아니면 다른 쪽? 아르드헨이 보낸 거라면 말 걸지 말아줄래? 그 어린놈하고는 취향이 안 맞거든.”
어린놈.
아르드헨이 졸지에 어린놈이 돼 버렸다.
마도사의 출현에 넋을 놓고 있다가 아직 남은 위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쿠그그그, 지축을 흔들며 달려온 마수가 코앞까지 왔다. 몸통으로 들이받으며 힘겹게 세운 방책 따위는 단숨에 무너지리라.
저지할 수 없으니 일단 피한 후…….
머릿속으로 전술을 구상할 때였다.
마도사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달려오는 두 마리의 마수를 힐긋 보더니, 왼손을 살짝 까닥거렸다.
펑퍼짐한 조끼 안쪽에서 종이 다발이 튀어나왔다.
엘리가 들고 다니는 부적과 닮아 있었다.
“안 보였으면 모를까, 봐버린 이상 치우는 게 도리겠지? 얘기는 이따가 하자고.”
부적이 층을 이루며 공중에 깔렸다. 마도사는 산책하듯 천천히 부적을 밟고 올라섰다.
높이 5m 정도까지 올라선 마도사가 맨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
스크롤도 없다.
신식 마법의 기초인 매개체나 루틴도 없었다.
그저 손짓했을 뿐이었다.
섬광이 일었다.
신체술로 강화된 눈도 겨우 잡아낸 빛이었다.
푸른 번개가 쳤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꽂힌 게 아니라, 좌에서 우로 지면과 평행을 이루며 그어진 번개였다.
기괴한 자연현상이 왜 눈앞에 펼쳐졌는지, 그게 왜 마수를 꿰뚫고 사라졌는지.
민은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콰르르르릉!
뒤늦은 소음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전방을 보았다.
구름처럼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시커멓게 타버린 마수가 보였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마수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누린내가 바람을 타고 코를 찌를 때까지, 민은 멍청하게 서 있어야 했다.
일인군단.
처음 들었을 때 유치한 별칭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은 군단을 이길 수 없다. 무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어차피 개인은 개인일 뿐.
하지만 마도사가 일으킨 현상을 직접 목격하고 보니 일인군단이란 별칭조차 초라하게 느껴졌다.
같은 사람이라 부를 수 있나?
소문으로 전해 들은 수많은 일화는 정말로 사실이었던 건가?
부적이 흩어졌다. 마도사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천상의 신이 지상에 강림한 모습 같았다.
민은 어떤 표정으로 마도사를 바라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얘야,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얘’란 지칭이 누굴 가리키는 건지 한참 동안 이해 못 했다. 두리번거리다가 마도사의 시선이 얼굴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민은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저 말씀인가요?”
“그래, 너.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어디 아픈 거야? 아파서 고쳐 달라고 찾아온 거면 헛수고야. 난 개인적인 부탁은 잘 들어주지 않아.”
허리를 툭툭 치면서 몸을 돌리는 마도사였다. 방책을 넘어온 데옹이 마도사 옆에 섰다.
“또 매정하게 말씀하신다. 이쪽은 민 교수에요. 틈에서 생환한 귀중한 분이라고요.”
“그래? 그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얘야, 어디가 아픈 거니? 고칠 수 있는 병이면 고쳐줄 테니까 대신 틈에 대해 아는 대로 털어놔 봐.”
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얘가 아니라 민입니다. 교수라 부르셔도 상관없고요.”
“아직 아기구먼 뭘. 그래, 그래. 민 교수. 일단 들어가자고. 돌아다녔더니 피곤해. 일단 쉬면서 얘기를 들어야겠어.”
데옹이 기다렸다는 듯이 큼지막한 로브를 펼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맨 마도사가 방책을 뛰어넘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따라가야 했다.
“퀼! 퀴이일!”
울타리를 넘자마자 본 건 마도사에게 두 팔을 벌리며 뛰어가는 엘리였다.
마도사는 슬쩍 왼쪽으로 비켜서며 엘리를 피했으나, 엘리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마도사를 붙들었다.
“보고 싶었어!”
“데옹. 이 울보 좀 떼어내.”
데옹이 엘리의 어깨를 붙들었다. 발버둥 치는 엘리를 흘깃 바라보던 마도사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여러분! 퀼비언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우리 도시는 안전합니다! 웨켄의 시장, 여러분들의 일꾼인 저 빈센달은 마도사님과 협력해 끝까지 이곳을 사수할 겁니다!”
언제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걸까.
박스를 포개 만든 단상 위에서 시장이 소리치고 있었다. 뻔뻔한 연기에 시민들이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민은 고개를 내저으며 데옹 옆으로 갔다.
“따라오세요. 조합장님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한결 밝아진 얼굴로 데옹이 말했다. 마도사의 등장에 모든 걱정을 털어낸 모양이다.
“데옹 씨는 칼리고보다 마도사를 더 따르는 거 같네요.”
민이 말했다.
“교수님. 죽어라 일만 시키는 상사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 양반 얼굴만 생각해도 치가 떨려요. 악당들은 죽지도 않고 오래 살아요, 그렇죠?”
“그 인간이 선한 놈은 아니죠.”
“그러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넌지시 물었다.
“칼리고는 지금 어디에 있죠?”
“단장님이야 어딘가에서 또 말도 안 되는 촉을 따라 이동 중이겠죠. 아주 가끔 알베르트를 통해 소식을 전해오는데, 최근에는 조용해요.”
“끔찍한 상사네요.”
칼리고 욕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담벼락 없는 단층집의 문을 데옹이 두드렸다.
“조합장님, 들어갑니다.”
그때였다. 얌전히 뒤따라오던 엘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말릴 새도 없이 그물침대에 누워 있는 마도사에게 뛰어들었다.
엘리와 마도사가 포개지기 직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엘리가 공중에 붙들렸다.
허우적거리던 엘리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늙은이 힘들다. 얌전히 있어.”
“알겠어요.”
고분고분해진 엘리가 그물침대 옆에 철퍼덕 앉더니 머리를 마도사 가슴팍에 댔다.
마도사는 늘 그래왔다는 듯이 손으로 엘리의 머리를 툭툭 쳤다.
“얘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 많았겠어, 민 교수.”
“어떻게 아셨죠. 제가 엘리와 여기까지 같이 왔다는 걸.”
“다 보이는 건 아니지만 뜨문뜨문 보이는 게 있어. 칼리고, 그 말 많은 아이하고도 연이 있는 것 같네.”
“악연이죠. 아주 지독한 악연.”
그 말에 마도사가 크게 웃었다.
“적의 적은 친구지. 칼리고를 귀찮아하는 인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데옹, 그간 벌어진 일을 짧게 설명해줘. 마수들이 왜 저 지랄 중인 건지, 알아야겠어.”
말을 끝낸 마도사가 민을 쳐다봤다.
“네 얘기는 그 후에 들어줄게. 괜찮지?”
“네. 그렇게 하세요.”
앉을 곳을 찾아 주변을 살필 때였다. 구석에 있던 의자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다가왔다.
“앉아.”
마도사가 마법을 쓴 것 같았다.
마나 파장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기이한 힘이라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잠들었네.”
작게 코를 고는 엘리였다. 머리를 대자마자 잠드는 것도 능력이었다.
엘리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안쪽 방으로 사라졌다.
“다시 한번 저 애를 돌봐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큰일을 치렀겠지.”
“저도 틈에서 엘리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서로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마도사가 데옹을 바라봤다.
“말해줘.”
데옹이 입을 열었다.
“반년 전부터 마수의 행동양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도시 근처로는 접근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하나둘씩 다가오더니 단체로 머리를 들이받는 경우도 생겼어요.”
“마수를 자극하는 뭔가가 도시 안에 있는 거야?”
“아니요. 달라진 건 없어요. 원인 파악에 나섰지만 저희가 알아낸 건 없습니다.”
“외부요인인가.”
마도사가 길게 하품했다.
“머무는 동안에는 뒤를 봐주긴 할 거야. 하지만 나도 곧 이동해야 할지도 몰라. 따라잡으려면 분주히 움직여야 하니까.”
따라잡다니, 뭘?
이해 안 되는 것들도 일단 기억해두었다. 마도사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귀중한 자료가 될 테니까.
“추모길이 변경될까요?”
데옹이 물었다.
“아직은 모르겠어.”
“일단 시장한테 말해두겠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마수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도시 이전을 검토해 봐야겠죠.”
도시 이전을 검토한다?
시장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마도사가 돌아왔으니 도시 방위는 문제없는 거 아닌가?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마도사가 입을 열었다.
“난 신이 아니야. 그러니 날 멋대로 신격화해서 무언갈 바란다고 해도 들어줄 생각 없어. 난 그저 내가 원하는 바를 위해 움직일 뿐이지.”
“도시를 포기하실 생각인가요?”
“스스로 지킬 수 없다면 내놓는 게 옳아. 타인 손에 맡겨진 안전 같은 건 볼썽사납다고.”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론이었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지닌 개인이 다수를 위해 약간의 희생을 감내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당장 버리겠다는 건 아니니까 너무 나쁘게 보진 마. 나도 상처받는다고.”
옅게 웃는 마도사를 보며 처음으로 인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강 사정은 알겠고, 이제 민 교수의 얘기를 들어볼까?”
마도사가 그물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가 갇힌 틈은 어떤 곳이었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