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44화 (317/558)

제344화

소리가 들린다.

유단은 신체 일부를 땅 밖으로 내보내 주변을 살폈다.

짙게 깔린 어둠 사이로 두 개의 불빛이 떠다녔다.

들개였다. 무리에서 벗어난 건지, 아니면 버려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인 건 확실했다.

식욕이 돋아났다.

유단은 길게 뽑아낸 촉수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경계심을 뿜어내며 몸을 낮추던 들개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래, 우린 친구잖아.”

들개가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쉬이익!

유단은 촉수를 휘둘러 들개의 목을 도려냈다.

이 짓거리도 1년째 하고 있으니 익숙해졌다.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면 팔다리를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귀한 피가 대지로 스며들기 전에 얼른 움직였다. 균열 밖으로 나와 아직 꿈틀대는 들개 사체를 끌어당겼다.

들개를 으적으적 씹었다. 처음에는 입이 없어서 씹지도 못하고 몸으로 덮은 채 고깃덩이가 녹아내리길 기다려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발전한 것이다.

뼈까지 흡수한 다음 다시 균열 안으로 숨어들었다. 영양분을 섭취한 육체가 콰득콰득 소리를 내며 형태를 바꿔나갔다.

송아지만 한 크기가 되기까지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악을 쓰며 버틴 결과였다.

“빌어먹을.”

벌레처럼 땅속에 숨어 불안하게 주변을 살펴야 하는 삶. 언제까지 이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균열 틈으로 쥐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촉수를 내밀었다.

꿰뚫린 쥐가 파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오늘은 수확이 좋다. 쥐를 몸통에 달린 입에 집어넣고 씹을 때였다.

“좆같은 새끼들.”

씹는 걸 멈추고 기척을 감췄다.

제멋대로 날뛰는 마나 파장이 온몸에 전해졌다.

동류다. 마수가 위쪽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사냥감을 노리는 건지, 장난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건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걸리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한참을 기다렸다. 따끔거리던 마나의 기운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유단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촉수를 바깥으로 뺐다.

시각기관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건 여러모로 편리했다. 인간의 몸이었다면 큼지막한 머리를 땅 바깥으로 내빼야 했을 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떠난 모양이다. 경계를 풀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1년.

회복을 기다리며 벌레처럼 기어 다니며 몸을 수복했다.

자폭 직후 마수의 육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아이 머리보다 작은 크기. 날짐승이 부리로 콕 쪼면 죽게 될 운명이었다.

몸의 주인인 마수를 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뒈진 건지 대답이 없었다.

기계한테 몸을 빼앗기더니, 이제는 마물의 몸을 입어버렸다. 최악이었으나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낮에는 균열 아래 숨어 지렁이를 잡아먹었다. 종종 토룡이라 불러도 될 만한 큼지막한 놈들이 나타나면, 먹던 걸 내다 던지고 도망쳤다.

치욕의 나날이었다.

그때의 육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등껍질이 짓뭉개진 새끼 달팽이였다.

도망치고 숨고 몰래 먹어서 몸집을 키우고.

짐승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몸집을 불리고 들개 정도는 사냥할 수 있게 됐지만,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면 갈 길이 멀었다.

“이래가지고 언제…….”

거병과도 대적하던 막강한 육신. 과거의 강함을 되찾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먹어야 하는 걸까?

아니.

되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마수의 생리를 알지 못한다. 허기를 느끼기에 짐승을 잡아먹고 있지만, 성장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인간이니까.

이딴 괴물이 아니라.

균열 밖으로 나와 이동했다. 촉수 전역에 펼쳐져 있는 시신경이 예민하게 주변 사물을 잡아냈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났다.

유단은 반사적으로 균열을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둔중한 소리, 이건 죽음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쪽으로 간 거 같은데?”

인간의 목소리였다.

아슬아슬하게 균열 사이로 숨었다. 살며시 내민 촉수로 밖을 확인했다.

거병 두 기와 열 명이 넘는 인간들이 숲을 헤집고 있었다.

빌어먹을.

조금 전 만났던 마수는 이놈들한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구나.

거병의 탐지 능력이라면 불안정한 마나를 잡아낼 것이다. 마수가 발산하는 마나를 집요하게 잡아내는 강철 기계들.

균열 밑이라고 안심할 수 없었다.

걸리면 끝이다.

나약한 육체로는 거병을 상대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으니까.

쿵, 쿵, 쿵.

거병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땅을 짓누르는 쇳소리가 금방이라도 육체를 짓뭉갤 것 같았다.

-잠깐만.

거병 쪽에서 난 소리였다.

일순 침묵이 찾아왔다. 촉수로 바깥 상황도 확인할 수 없었다.

느껴진다.

수색이 시작된 것이다.

베테랑 용병들은 수신호로 작전 반경을 정하고 구역을 좁혀올 터였다.

도망칠 수 있을까?

자폭하기 전 육체였다면 균열 사이에 구멍을 내 땅 밑으로 이동이 가능하지만, 지금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한 시간 정도 파면 10m는 움직일 수 있을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오지 마라.

개 같은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릴 때였다.

슈우우우, 액상근육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위였다.

끝났다. 1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건가?

그때였다.

-아직 허술해.

몸의 통제권이 사라졌다. 외부를 훑던 시점이 한순간 흔들리더니 검은 세계가 보였다.

마수의 세상.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새하얀 안구가 보였다.

“너!”

끔찍한 눈깔이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재빨리 다가갔다.

-발산하는 모든 신호를 다잡았다. 이제 기다릴 뿐이야.

얼마나 지났을까.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신호 오류인 거 같아. 균열 근처라 그런 거 같은데? 그쪽은?”

-여기도 없어. 아까 도망친 놈이 우리 시선 끌려고 뭔가 해놓은 모양이야.

“짐승 새끼들이 대가리도 좋아.”

쿵, 쿵, 쿵…….

위험이 멀어져 간다.

유단은 심상세계 안에서 대자로 누웠다. 기운이 쭉 빠졌다.

“죽어서 이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있네?”

-회복 중이었다. 의식을 관장하는 기관이 망가졌는지 한동안 멍하니 있었고.

“미친 새끼야. 굴릴 대가리는 남겨두고 터졌어야지. 전부 내던지는 건 도박 아니야?”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고, 결국 살아남았지.

“1년간 내가 아득바득 땅을 기면서 비굴하게 버틴 대가야. 속 편하게 ‘결국’이란 말로 퉁 칠 게 아니라고. 알아?”

-좋든 싫든 이젠 공생관계다. 날 위한 게 아니고 널 위한 것이었으니 잔소리 그만해.

“성격 봐라. 누가 마수 아니랄까 봐 지랄 같네.”

-인간보다는 낫겠지.

속이 후련했다. 혼잣말로 버틴 1년은 지옥과도 같았으니까.

유일한 이웃이 괴물이라는 게 헛웃음 나오지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보다시피 몸은 엉망이야.”

-양분을 보충해야 한다. 마나와 연결된 것들을 삼켜야 해.

“마나와 연결된 거? 동족을 뜻하는 거야?”

제일 먼저 마수가 떠올랐다.

-동족이란 개념은 적당하지 않아. 생김새도 성질도 성향도 모두 다를 테니까. 너희들이 편의주의적으로 마수라 부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각기 독립된 개체다. 종으로 묶을 수 없지.

“카테고리는 알아서 나누라고 하고,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이 몸뚱이로는 마수는커녕 덩치 큰 짐승도 상대 못 해.”

보잘것없는 육체로 마수 사냥에 나선다? 발길질 한 번에 아등바등 재건한 몸뚱이가 박살 날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러니 조금 느리지만 안전한 길을 택해야지.

“안전한 길?”

마수의 몸이 움직였다. 균열 밖으로 빠져나와 뱀처럼 땅을 기었다.

매끄러운 이동이었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육체 사용법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본래 주인이 다루는 걸 보니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저걸 섭취한다.

마수와 시선을 공유했다.

저거.

유단은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대변을 보는 인간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동료와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힘을 주는지 입을 다물었다.

-거부감이 드나?

“역겹지. 쥐나 지렁이를 씹어 먹는 것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니까.”

-결정은 네가 해. 네 의식은 이제 나와 엮여 있다. 네가 반대한다면 내 행동에도 제약이 걸리겠지.

유단은 서른 초반의 남자를 바라봤다. 인간. 같은 종.

“야, 네가 보기엔 나는 인간이라 할 수 있냐?”

-그걸 정의하는 건 너다.

“그렇지? 그렇다면…….”

유단은 밀려드는 감정을 비틀리는 입술에 담으며 말했다.

“먹자. 네 말대로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까.”

-훌륭한 판단이다. 나 역시 너를 통해 배웠다. 공생은 너무나도 어렵다고. 같이 살 수 없다면, 저들이 날 거부한다면, 일단은 예절을 가르쳐야겠지.

촉수가 뻗어나갔다. 남자 목덜미에 톡 닿는 순간, 남자가 쓰러졌다.

심상세계를 분리하는 신비로운 기술. 마수가 눈을 뜨니 다시 가능해졌다.

“뭐, 뭐야!”

마수 안쪽으로 빨려 들어온 남자가 주변을 훑으며 소리쳤지만, 이내 여름날 얼음처럼 녹아버렸다.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빈껍데기가 된 인간의 몸을 촉수로 감아 살살 당겼다. 조금씩 이동하는 사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싸대는 거야. 그러게 적당히 처먹으라니까. 똥 싸다 뒤지겠어.”

잠시 후.

용병들이 있던 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불꽃이 피어오르며 주변 일대가 밝아졌다.

유단은 먼발치서 용병들을 바라봤다. 수색에 나선 용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시신은 찾을 수 없으리라.

-감각을 차단할 수도 있다.

시체 앞에서 마수가 말했다.

“아니. 이게 시작이잖아? 그러면 익숙해져야지.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동족 포식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잔말 말고 먹기나 해. 힘을 되찾으려면 이거 하나로는 모자라니까.”

-맞는 말이다. 모자라지. 턱없이 모자라.

으드득, 으드득. 대퇴골이 으깨지며 나는 소리가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맛이 전해져 온다. 쥐를 씹어 먹었을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기름진 느낌이다.

순간 속이 뒤집혔다. 육체가 없는 상태인데 구토감이 밀려들었다.

유단은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잘게 부서진 인간의 시체가 몸 안으로 밀려들었다.

-힘들면 말해라. 감각을 끊어줄 테니.

“개소리 말고 자근자근 다 씹어 먹어. 남기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말이야.”

-엄마?

“그런 게 있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프라이드마저 사라졌다. 도리어 홀가분해졌다. 이제 거리낄 게 없어졌다.

역겨운 식사가 끝났다.

유단은 마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힘을 복구하려면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

-예측할 수 없다. 양질의 먹이를 공급받는다면 단축될 거고, 아니면 길어지겠지.

“부디 그 기간이 길지 않을 바랄게.”

유단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입안에 맴도는 끈적한 맛이 가시질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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