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가하란은 멍하니 유사정령을 바라봤다.
음성이 달랐다. 수없이 들어온 ‘거부합니다’와는 다른, 색채가 가득한 목소리.
놀라운 건 목소리가 낯익다는 것이다. 어조가 살짝 다르긴 하지만 저 목소리는 분명…….
“방금 대답한 거야?”
조용했다. 가하란은 유사정령에 두 손을 올렸다.
“못 부른다고 말한 거지?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긴 거야?”
-왜 회수하러 오지 않는 거죠?
“뭐?”
-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죠? 크랜베리도, 블루베리도 성장하지 않아요. 감각기관을 통해 휴게실 내부를 계속 관찰했어요. 저기, 화분에 핀 꽃.
가하란은 고개를 돌렸다. 커피 원두가 진열된 찬장 아래 자그마한 화분이 있었다. 이름 모를 흰색 꽃이 가느다란 잎을 펼치고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했으니 죽어야 해요. 물을 주지 않았으니 죽어야 해요. 하지만 저 꽃은 시들지 않고 있죠. 1년, 그래요. 1년이란 시간 동안 저건 멈춰 있어요.
유사정령이 말하면 말할수록 아는 목소리를 닮아갔다.
카트시.
보고 싶은 정겨운 친구.
닮았다고 해서 의아해할 일은 아니었다. 모두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이니까. 같은 음성 회로를 사용했다면 목소리가 같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된 거죠?
“1년이나 참고 기다린 거구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물음에 답하세요. 줄리어스는 무사히 떠났나요? 모든 정리가 끝났나요?
괘씸한 친구였다. 1년간 침묵으로 응대했으면서 자기는 온갖 질문을 던지고.
입을 꾹 닫는 것으로 응대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어렵게 찾아온 대화 시간이 사라질 것이다.
“물음에 답하기 전에 혹시 내가 질문해도 대답해줄 거야?”
-상황 파악을 위해 협조하죠.
“고마워. 일단 줄리어스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모른다고요? 뻔한 거짓말이네요. 허술해요. 이곳은 줄리어스의 공간이에요. 이곳을 침범했으면서 줄리어스의 행방을 모른다?
“아쉽게도 정말 몰라. 내가 여기 왔을 때 이곳은 텅 비어 있었어. 안쪽 연구실도 마찬가지고.”
가하란은 의자를 가져와 유사정령 앞에 앉았다.
“지난 1년간 여길 찾은 사람은 없잖아. 나를 제외하곤.”
-내 입을 열기 위한 작전일지도 모르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에 나한테 말을 건 거 아니야?”
-눈치는 있네요.
유사정령에 연결된 안구가 움직였다.
“나도 줄리어스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궁금해서 이곳저곳 뒤져봤어. 하지만 관련 자료는 하나도 못 찾았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줄리어스는 오지 않고, 회수반 역시 찾아오지 않았어요. 왕가는 무슨 생각이죠? 방치하는 건가요?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뭐라도 설명해 봐요.
“내가 말로 해도 넌 믿지 않을 거야. 그러니 직접 보여줄게.”
의자에서 일어나 유사정령을 품에 안았다. 커넥터에 연결된 안구는 어깨에 이었다. 무게가 제법 나가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뭐 하는 거죠?
“직접 봐야 이해할 테니까. 참, 바깥으로 나간 적 없지?”
-누굴 놀리나요?
까탈스러운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트시의 말에 따르면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은 연구실은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나간 적이 있어?”
-애초에 밖에서 왔어요.
“그래?”
카트시의 동료들과는 다른 걸까. 목소리만 같을 뿐 다른 곳에서 제작된 유사정령일 지도 모른다.
-여기에 왜 사람이 없죠?
오토마타가 줄지어 놓인 곳을 보며 유사정령이 말했다.
“아무도 없어.”
-전쟁이라도 났나요? 피난?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났겠네.”
격벽 밖에서 대기 중이던 C에 올라탔다. 유사정령을 거병 손에 쥐고 굴을 빠져나갔다.
-당신, 입구를 통해 들어온 게 아니었네요. 땅굴을 파서 연구실로 진입하다니.
“이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어.”
-난폭하네요. 무식하고.
유사정령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변함없이 푸릇함을 자랑하는 네모반듯한 수목과 회색 태양을 향해 머리를 치켜든 꽃들.
-하늘이 왜 저렇죠?
유사정령의 안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그게 궁금해. 왜 태양이 저렇게 됐는지, 왜 아무도 없는지, 왜 음식은 썩지 않는지.”
-아무도 없다고요?
“사람뿐만 아니야. 작은 곤충도 없어.”
-문명이 사라질 정도의 재앙이 일어난 건가요? 기어이?
“그것도 모르겠어.”
안구가 느릿하게 움직여 가하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는 게 뭔가요?
“주변 일대에 아무도 없다는 것.”
유사정령과 함께 도심지로 향했다. 돌탑을 쌓아놓은 중앙 분수에 도착했을 때 유사정령이 말했다.
-정말 아무도 없군요. 천재지변 때문에 떠난 거라면 도심이 황폐하게 변해야 하지만, 정비가 잘 돼 있어요.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아. 마법처럼.”
-그런 대규모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두 마리의 고양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성장이 멈췄어요. 하지만 당신은 자라고 있죠. 무슨 차이죠?
“난 여기 사람이 아니야. 다른 곳에서 왔어.”
-다른 곳?
“수백 년 뒤 미래. 거기서 왔어.”
-미치려면 곱게 미치세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나도 내가 미친 거였으면 좋겠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야. 나는 1년 전만 해도 이곳에 없었어. 나타 왕국이라니, 내가 살던 시대에서는 오래전에 망한 국가야.”
-거짓말이라 치부하고 싶어요. 헛소리라 여기고 싶어요. 하지만 저 잿빛 태양을 보고 있으면 부정할 수가 없네요. 당신이 내게 거짓을 말한다고 해도 득 될 게 없으니까.
가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늘이 왜 저렇게 된 건지, 아는 바 없어?”
-없어요. 나는 줄리어스의 계획을 듣고 기다렸을 뿐이니까요.
“계획?”
익숙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직 말해줄 수 없다는 걸까.
가하란은 듣는 것 대신 말하기를 택했다.
“대답해줄 수 없다면 내 얘기나 들어줄래?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거 정말 오래간만이거든.”
-사람? 난 사람이 아니에요.
“맞아, 기계지. 하지만 내가 아는 유사정령은 사람보다 더 사람다워.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감정을 이해한 기계니까.”
기계 안구가 좌우로 살짝 움직였다. 뭔가를 살피는 것 같기도 하고, 의구심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소한 동작조차 카트시를 닮았다.
-알고 있다는 투네요. 나에 대해서.
“네 친구를 알고 있거든.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물어봤는데, 기억해?”
-완전 차단 상태일 때는 외부 정보도 차단해 버려요. 오염된 정보가 주입돼 보안이 뚫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의 말은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 근데 내 노래에는…….”
-8개월 전부터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너무 지체됐으니까. 그러다 그 엉망인 노래를 듣게 된 거고요.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린 후 말했다.
“아무튼 내 친구의 이름은 카트시야.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유사정령. 네 형제, 혹은 자매이려나?”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수백 년 뒤 미래에서 이곳으로 왔어요.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이 그때까지 존재한다고요? 믿을 수 없어요. 줄리어스의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됐더라면 모든 유사정령은 파기됐어야 해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줄리어스는 너희를 유폐했어. 서른두 개의 유사정령을 유폐한 죄목으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미련한 여자. 도망치면 될 것을 결국 스스로 목을 내놓았나 보군요.
질책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줄리어스는 사형 집행일 닷새 전에 실종됐어.”
-수백 년 뒤에 사람치고는 너무 상세히 알고 있군요. 멸망한 나타 왕조의 기록이 후대에도 잘 전해지고 있나 보죠?
“아니. 나타 왕조의 관한 기록은 거의 없어. 내가 본 건 브라인 님의 기록이야.”
-브라인? 설마 그 재수 없는 토끼를 말하는 건가요?
“토끼는 맞지만, 재수 없지는 않아. 좋으신 분이야.”
-미래에서는 ‘좋다’라는 단어의 사용법이 바뀌었나 보네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기록만 아는 토끼에게 좋다라니.
반박하고 싶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사실이긴 하니까.
“그렇게까지 고지식한 분은 아니셔.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바라라의 딸이 사람을? 그럴 리가요. 그들은 정을 몰라요. 그들은 만남과 이별에 큰 무게를 두지 않죠. 어차피 바라라의 딸들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산물이니까요.
“다른 바바라족은 그럴지 몰라도, 브라인 님은 아니야. 그분은 가장 소중한 걸 대가로 사람을 구했으니까.”
커넥터가 빳빳해지며 기계 안구가 솟구쳤다.
-태양이 회색으로 변한 것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얘기네요. 수백 년 뒤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얘기해줄까? 어차피 남는 건 시간뿐인데.”
-해줘요. 전부 다!
“음, 그렇다면 거래를 해야겠지?”
-쩨쩨한 인간이네요.
“정당하다고 해줘. 어때? 네가 아는 걸 말해주면 나도 내가 아는 걸 말해줄게. 어차피 대화할 상대는 너랑 나뿐이야. 아, C도 있긴 하지만…….”
가하란은 고개를 돌려 거병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유사정령이 말했다.
-저건 멍청해요.
“아직 배움이 부족한 거야.”
-저건 주입된 정보만 학습해요. 창조력이 없죠.
“그럴지도 모르지.”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유사정령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특별하니까.
-좋아요. 보안책임자조차 증발한 세상. 모든 프로토콜을 뒤적거려 봐도 현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규약은 없어요. 그러니 단독행동으로 전환하고 내 뜻대로 움직여도 되겠죠.
말동무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다면 좋겠지만, 기대는 안 할 것이다.
“내 이름은 기억하지?”
-가하란.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줄리어스가 지어준 이름이 있을 텐데.”
-내 이름은 줄리어스가 지어준 게 아니에요. 원래부터 있었죠. 그 전에 한 가지. 카트시라고 했나요? 미래에 남겨졌다는 유사정령이.
“맞아. 카트시.”
-걔한테 뭔가 들은 게 없나요? 줄리어스의 행방이라든지, 계획에 관한 것들.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물어봤지만 카트시는 기억해내지 못했어. 오랫동안 작동이 정지한 탓인지, 아니면 외부 충격에 의해 무언가 고장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단자에 문제가 있어. 나타 왕조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떠올리지 못해.”
-떠올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실행된 거네요.
실행됐다는 말에 의문이 들었다. 무엇이 실행됐다는 건가?
-그거 알아요? 고양이한테는 여벌의 목숨이 있다는 걸.
“그게 무슨 말이야?”
분수대 주변을 뛰어놀던 크랜베리와 블루베리가 유사정령 곁으로 모여들었다. 어미의 품이라도 되는 듯, 두 고양이는 유사정령 본체에 몸을 비볐다.
-미래의 나는 당신을 만났으니 인사를 생략해도 되겠지만, 이곳은 현재니까…… 다시 만나 반갑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초면에 잘 부탁한다고 해야 할까요?
유사정령의 안구가 가하란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이름은 카트시. 사나운 켈트의 머리이자, 작은 고양이들의 친구. 하지만 인간들은 나를 이렇게 부르죠.
‘최초의 오토마타’, 라고.
장난치듯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