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2화
“열다섯, 아니 열여섯인가. 잘 모르겠네.”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 크기는 여전한 거 같은데 키가 부쩍 큰 느낌이었다. 오른쪽 의족을 매만졌다. 반년 전에 의족을 미세 조정 했는데 다시 손 봐야 하나.
-아픕니까?
C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 아픈 건 아닌데 조금 불편하네. 먹는 것도 없는데 몸은 잘 크고 있어. 좋아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기괴한 곳에 도착하고 1년.
음식 조달에 문제는 없었다. 도심 곳곳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이상한 점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일 떠 있는 회색빛 태양처럼 음식도 시간관념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크랜베리도 블루베리도 모습의 변화가 없었다. 털갈이하지도 않고, 발톱이 자라지도 않았다.
변하는 건 나뿐이었다.
이방인에게만 시간이 허락된 걸까?
밥 먹는 고양이들 곁으로 루루가 뛰어들었다. 근 1년을 마주하고 살았는데 여전히 앙숙이었다. 보기만 하면 루루는 장난을 치고, 고양이들은 앞발질했다.
하악질을 안 하는 걸 보면 나름 친해진 걸까.
“싸우지 말고 놀아.”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북쪽으로 향했다. C가 성큼성큼 뒤를 따라왔다.
-어디로 가십니까?
“거병 관리국하고 제철소. 남은 응축봉도 확인하고 용로로 연습해야지.”
마나응축봉 창고로 들어섰다. 가득 쌓였던 응축봉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과거의 기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거병을 계속 기동시키니 연료가 남아나질 않았다.
“전환을 서둘러야겠어. C가 잠들면 너무 외로우니까.”
-정지 상태로 대기할까요?
“아니. 그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아. 앞으로 두 달이면 될 테니까, 응축봉 여유분은 충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세요. 그때의 가하란처럼 정지한 채로 기다리면 되니까.
“이제 농담도 할 줄 아네.”
-아니요.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그때의 가하란처럼 정지한 상태로 있으면 에너지 보존율이 상승하니까요.
“그때 일은 잊어줘. 나도 그때를 떠올리면 몸의 힘이 쭉 빠지니까.”
외톨이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였다.
정신을 놓은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심장도 텅 비었고,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조차 고갈돼 버렸다.
동기가 메마르는 순간 육체는 운동을 거부했다.
한 일주일쯤을 눈 뜬 채로 하늘만 올려다봤다. 잠도 잊었다. 피곤조차 잊었다. 이대로 도심을 이루는 작은 부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몸이 바싹바싹 말라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을 때였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루루가 품을 뒤적거렸다. 놀아달라는 걸까, 먹이를 달라는 걸까. 한참을 뒤적거리던 루루가 손을 빼냈다.
손에 들려 나온 건 은색 반지였다.
표면이 거친 반지.
첼 증조부가 남겨준 유산.
반지에 적혀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반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루루가 저 멀리 뛰어갔다.
선함.
그 단어에 어째서인지 사진으로밖에 본 적 없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아버지 옆에서 그저 오도카니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
아버지는 말했다.
“네 엄마는 잘 웃지 않았지만, 웃을 땐 정말 예뻤단다. 물론 안 웃을 때도 예쁘지만.”
가하란은 삐거덕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왜일까. 뇌리에 남은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제치고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를까.
그리고 옅은 웃음기조차 없이 그저 앞만 보고 있을 뿐인 어머니의 모습에서 왜 힘을 얻게 되는 걸까.
“루루. 그 반지 가져와. 소중한 거야.”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지를 손에 쥐고 일어서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다시 반년을 버틸 힘을 얻었다.
동기도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움직였다.
-가하란?
C의 목소리가 상념 속에 남아 있던 가하란을 현실로 끄집어 올렸다.
가하란은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은색 반지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C는 기계에게 본성이 있다고 믿어?”
-본성과 믿음. 둘 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전적 정의를 요구하면 대답해드릴 수는 있으나, 그게 이해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정해줄게. C는 착해.”
-저는 착합니까?
“내가 보기엔.”
-그렇군요. 전 착한 기계입니다.
마나응축봉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도열한 거병들이 눈에 밟혔다.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채 그저 서 있는 거병. 언젠가 돌아올 기사들을 기다리는 충실한 군사들.
“언젠가 한 명씩 얘기해보면 되겠네.”
기괴한 세계. 무엇하나 알 수 없는 세상. 그렇기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기이한 방침이 생겨난다.
폭발이 일어난다고 한들 누구 하나 다치지 않는다.
나만 빼고.
가시화된 마나가 도심을 휩쓴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만 빼고.
“아니지. 걔들도 있구나.”
루루, 크랜베리, 블루베리.
고독한 세계에 같이 던져진 동물들.
만약을 대비해 사료는 잔뜩 준비해두는 편이 좋으려나?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제철소 앞이었다. 엄중한 보안을 자랑해야 할 곳이지만, 개미 한 마리 없는 세상에서 누가 보안을 신경 쓸까.
활짝 열어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 외의 행동에는 탑승이 필요합니다.
가하란은 거병에 올라탔다. 체임버를 열어둔 채로 허공용로 앞으로 걸어갔다.
반으로 자른 구체가 양옆으로 누워있었다. 오목하게 파인 안쪽은 빛마저 빨아들일 것처럼 새까맸다.
“부탁할게.”
-명령이면 됩니다.
“명령보다는 부탁이 좋아.”
몇 번이고 반복한 대화지만 C는 꾸준하게 명령할 것을 요구해왔다.
허공용로의 쌍반구를 들어올렸다.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하나씩.
본래는 내부시설로 용로를 들어올려야 하지만, 다루는 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거병을 이용해 허공용로를 고정했다.
용로가 발산하는 열기 때문에 보강판을 몇 겹이나 덧대야 했지만.
-됐습니다.
가하란은 밖으로 나와 체임버를 닫았다. 거병이 들고 있는 두 개의 반구를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이동했다.
지름 50cm의 원통형 청철을 발로 밀어 굴렸다. 번쩍 들어올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허리가 뚝 부러질 것이다.
허공용로 바로 아래까지 청철을 굴린 다음 멀찍이 떨어져 ‘멜덴 툴’을 손에 꼈다.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수석장인 멜덴 밑에 견습으로 있던 사람이 그랑겔이었다. 멜덴에서 그랑겔로 이어지는 툴 제작법이 몇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시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 토지로 돌아가도 장인이 남긴 기술은 영구히 존속된다.
기술공들이 말하는 낭만이란 게 이런 걸까.
툴이 휘감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거병 손 위에 있던 용로가 살짝 떠올랐다.
두 개의 반구가 서로를 마주 본 상태로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진동하던 반구가 서서히 동조를 시작했다. 진폭이 같아지며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왼손을 까닥거렸다.
바닥에 놓여 있던 청철이 부상했다. 진동하는 용로 사이에 놓인 철을 유심히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성형은 이제 시작이다. 손가락 끝으로 감각이 전해졌다. 눈보다는 손끝 촉감이 중요했다.
반구 사이로 빨려 들어간 청철이 붉게, 이내 새하얗게 변하더니 한순간 액체처럼 풀어졌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용융철을 재빨리 그러모았다. 양손으로 움켜쥐자 퍼져나가던 용융철이 허공용로 안쪽으로 모였다.
-손실률이 줄었습니다.
“처음 할 때보단 많이 좋아졌지.”
용로를 다루면서 말할 수 있기까지 석 달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 허공용로에 철을 넣었을 때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서로 마주 보던 반구가 뒤집히더니 안쪽에 모여 있던 녹은 철이 사방으로 뿌려진 것이다.
쇳물을 뒤집어서 쓸 뻔한 아찔한 기억을 딛고 수없이 연습한 끝에 용로를 다루게 됐다.
“슬러지를 덜어내고.”
찌꺼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후 청철 성형을 이어 나갔다. 귀를 다듬고 코를 만들 후 몸체를 다잡았다.
붉게 변한 청철을 흑사토 속에 집어넣었다.
쉬이이익, 모래 끓는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툴을 벗으며 이마를 훔쳤다.
땀이 흥건했다. 쇠를 다루는 건 역시나 힘들다. 힘든 만큼 즐겁지만.
흑사토 안에 철이 식을 동안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오늘은 남부 식당에 있던 생선으로 만든 요리였다. 1년이 넘어도 부패가 되지 않는 생선. 현실로 가져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닮았군요.
흑사토 안에서 청철을 꺼내자마자 C가 한 말이었다.
블루베리를 닮은 조형물.
털의 질감까지 표현해 보고 싶었으나 실력이 모자라 어설프게 처리했다.
그래도 얼굴은 만족할 만큼 닮아있었다.
“원하는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이제 마나포집을 위한 모듈을 제작해 봐야지.”
현실 세계에서는 위험도 때문에 소규모로만 제작했던 마나포집 모듈을 이곳에는 마음껏 만들 수 있었다.
첫걸음은 거병에 부착할 마나포집 모듈이었다. 마나응축봉에서 배터리로 이어진 에너지원을 마나포집으로 대체한다.
위치변환에 따른 특수대역 안정화는 이미 실현해 놓았으니 모듈만 제작하면 실적용이 가능하리라.
“네 친구들도 눈을 뜨게 해줄게.”
-동일 매뉴얼로 제작됐기에 저들 역시 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친구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습니다.
“다들 개성이 다르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C의 언어능력도 1년 전보다 확실히 좋아졌으나, 카트시와 비교하면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새삼 카트시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지 깨닫게 된다.
용로를 정리하고 성 정원으로 향했다. 깊게 파고들어 간 굴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들을 전부 제철소로 옮길 거야.”
껍질뿐인 오토마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토마타는 마나 친밀성이 높은 금속으로 제작된다. 금적철을 비롯해 희귀한 광물이 쓰였을 것이다.
용로로 녹인다면 다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휴게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유사정령은 오늘도 침묵하고 있었다.
정보의 세계로 들어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주황색 선이 여전히 천장을 뚫고 올라가 있었다.
주황색 선에 대해 최근에 알아낸 것이 있는데, 선의 시작점이 왕의 집무실이 아니라 더 위쪽이라는 것이다.
성을 뚫고 나간 선은 방사형으로 찢어지며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옅어서 최근에 겨우 발견했다.
“안녕.”
1년간 꾸준히 던져온 인사.
-거부합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대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거 알아? 여기 온 지 이제 1년이 됐어. 나도 내가 안 미치는 게 이젠 신기해. 왜일까?”
-거부합니다.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까 말이야, 용로를 만지다가 어머니 생각이 났어.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 어머니는 사진 속에서 고독해 보였어. 아버지와 달리 굉장히 침착하고 웃음도 없었지. 근데 아버지가 그러더라고. 잘 보면 웃고 있다고.”
이제는 대꾸조차 안 하는 유사정령이었다.
“너도 줄리어스가 그립겠지?”
범인은 이해할 수 없는 공학자.
기계들의 사랑을 받는 어머니.
가하란은 어머니와 카트시, 두 단어가 끌어낸 노래를 흥얼거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어머니도 날 품에 안은 채 이렇게 자장가를 불러줬을까?
흥얼거리던 노래를 끝내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정말 못 부르네요.
유사정령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