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41화 (314/558)

제341화

“초콜릿을 줄이는 게 나으려나.”

단맛의 여운이 너무 길었다. 뭐든 적당해야 좋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남은 쿠키를 포장지에 싸고 시계를 바라봤다. 슬슬 출발해야 한다.

“다녀오세요, 아가씨.”

“금방 올게요. 저녁 같이 먹어요.”

가정부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집 밖으로 나섰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이 훌쩍 멀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옆을 지나갔다. 왼쪽에 있는 말과 눈이 마주쳤다. 어찌나 크고 맑은지, 멍하니 바라봤다.

“오빠 눈을 닮았네.”

빙긋 웃고 걸음을 뗐다. 저 멀리 학회 연구소가 보였다. 옹기종기 모인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표정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마주 오는 사람들과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대부분 눈인사를 해주었지만,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똑똑, 문 앞에서 노크했다.

“오빠. 나 왔어.”

조용한 복도에서 1분 정도 기다렸다.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살며시 문이 열렸다.

프레나는 활짝 피려는 웃음을 억지로 다잡았다. 주변에 사람은 없지만 아직 모른다. 방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안심해서는 안 된다.

마침 복도 끝을 가로지르는 연구원이 보였다. 입매를 밑으로 꾹 누르며 방으로 들어섰다.

“오빠.”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유단이 있었다. 프레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공간의 단절이 안락함을 가져다주었다. 이제는 안심할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한껏 미소를 지으며 오빠에게 다가갔다.

“정말 말을 안 듣는구나.”

유단이 말했다. 걱정하는 말투였다.

“괜찮아. 미행하거나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건 알 수 없어. 전문가가 뒤에 붙었다면 네가 눈치채기 힘들 테니까.”

“……오지 말았어야 했어?”

눈을 살며시 치켜뜨며 유단의 표정을 살폈다. 냉정해 보이던 얼굴에 온기가 찾아든다.

“아니. 나도 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들었다. 프레나는 쿠키를 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유단에게 다가갔다.

살며시 안겼다. 품에서 품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저녁은?”

“돌아가서 먹으려고. 오빠랑 먹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니까.”

계속 붙어 있고 싶지만 어리광을 피울 순 없었다. 품에서 떨어져 나와 쿠키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알 수 없는 내용의 책들이 오늘도 책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병?”

차곡차곡 쌓여 있는 파일철을 보며 말했다.

“이것저것 연구 중이야.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

유단이 다가와 파일철을 뒤집었다.

“만든 거야?”

쿠키를 꺼내들며 묻는 유단이었다. 프레나는 자신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달기는 하지만 그래도 맛은 좋아.”

쿠키가 입 속으로 사라졌다. 만족감에 젖어 드는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쏟은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쿠키를 나눠 가지며 한 주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대단한 사건들은 아니지만, 오빠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반응해 주었다.

이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프레나는 되찾은 사랑을 만끽하다가 돌연 밀려드는 걱정에 인상을 썼다.

“아빠를 죽인 사람,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겠지?”

“프레나. 너무 신경 쓰지 마. 감정에 매몰되면 아무것도 안 돼.”

“오빠 말이 맞아. 우리가 조급해하는 걸 그자들이 노리고 있겠지.”

프레나는 유단의 눈을 바라봤다.

자애와 믿음으로 완성된 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오빠가 달라졌다고, 심지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다.

진실을 알았으니까.

유단은 혼자 감내하려 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차갑게 대하며 관계를 정리했다.

이유는 단 하나.

“여전히 날 감시하고 있을 거야. 기회가 찾아오면 교수님을 해했듯이 나에게도 손을 쓰겠지. 내가 다치는 건 참아낼 수 있어. 하지만 너까지 휩쓸리는 건…….”

프레나는 손을 뻗었다. 무표정해 보이는 오빠의 뺨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나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지키기 위해 멀어지려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심해 보이는 유단의 속이 얼마나 망가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최대한 도울게. 날 이용하려면 이용해도 좋아. 아빠를 위해서 그리고…….”

말이 끝맺기 전 유단이 고개를 저었다.

“조급해선 안 돼. 몇 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조사하고 준비를 마친 다음에 일을 진행해야 해.”

“오빠 말이 맞아. 아빠를 죽인 놈들, 분명 권력가들이겠지. 아빠는 희생당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위험하기에 듣지 못했지만, 아빠와 오빠는 둔 시민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심대한 권리문제를 불러올 건이었고, 진행을 막기 위해 아빠를 살해한 거라고.

“틈이 보여선 안 돼. 악다구니 써도 안 되고. 모든 걸 수용한 것처럼 조용히 있어야 그들도 안심할 거야.”

“그렇게 할게. 오빠 말대로.”

“너만큼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니까.”

“알아, 오빠 마음 다 알아.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난 가족을 위해 뭐든 할 거야.”

아빠를 빼앗아간 모든 것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아, 그리고.”

프레나는 유단에게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빠 말대로 밀레나 언니가 말을 꺼내왔어.”

“그래?”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끝까지 날 걱정하고 있었어. 의심한 게 미안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우리 상황이 이런 만큼 쉽게 믿을 수는 없었어. 이해하지?”

“응.”

프레나는 밀레나를 떠올렸다.

“그래서 말인데, 언니한테는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

가장 은밀한 진실을 감춘 채 만나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유단이 입매를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이해해. 밀레나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 주변은 어떨까? 우리 얘기를 알게 되면 밀레나 씨는 분명 도우려고 할 거야. 그 과정에서 원치 않은 정보가 바깥으로 새어 나갈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밀레나 씨도 위험해져.”

“그건 안 돼. 언니는 이 일과 무관한 사람이니까.”

“그래. 그러니 조금 괴롭더라도 지금처럼 지내.”

“계속?”

유단이 고개를 저었다.

“몇 주 후에 네가 말해. 연구실 안을 찾아봤는데 특별한 건 없었고, 관계 회복을 위해 얘기해 봤지만 달라진 건 없다고. 그래서 포기하기로 했다고.”

프레나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유단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그렇게 말하면 밀레나 씨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야. 필요하다면 내 욕을 해도 좋아.”

“그건 싫은데.”

“대외적으로 날 멀리할수록 네가 안전해져.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움직이기 편해져. 우리들 관계가 악화됐다는 정보가 적에게 들어가면 그들도 안심할 테니까.”

“오빠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 괴짜 교수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놀러 다니는 애처럼 보이겠네. 아빠의 복수 따윈 이제 상관없다는 듯이.”

청아한 종소리가 났다. 유단이 시선을 던진 곳에 시계가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더 있고 싶지만, 안 되겠지?”

프레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문 앞까지 걸어온 유단이 손을 들어올렸다.

“조심해서 가.”

한동안 연구실을 못 찾을 것이다. 아쉬움이 부풀어 올랐다. 보상이 필요했다.

오빠에게 눈짓을 보냈으나 다가오지 않았다. 프레나는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오빠도 몸조심해.”

문을 열고 나왔다. 강렬한 입맞춤을 원했지만, 오빠가 절제하는 이유도 납득이 되니 지금은 포기하기로 했다.

마음은 통하고 있다. 완벽한 이해자로서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들뜨는 마음을 다잡았다.

표정은 무겁게, 걸음은 더 무겁게.

복도를 빠져나가자마자 연구원들과 마주쳤다. 실망감 가득한 얼굴을 일부러 노출시켰다.

다들 봤으면서도 못 본 척 눈을 흘기며 멀어졌다. 아마 내일이면 또 소문이 돌 것이다. 유단과 프레나의 사이가 더욱 안 좋아졌다고.

연구소를 빠져나온 후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참아낼 거야. 모든 걸 이룰 때까지.”

나의 사랑, 나의 안식처.

프레나는 유단의 체온을 떠올리며 집으로 향했다.

* * *

행동 양식은 머릿속에 있었다.

입술을 가져다 대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먹이를 남겨둬야 조종하기 쉽다.

호감과 애정. 섬세하게 다뤄야 할 감정이었다. 감정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교정하려 하니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프레나는 미련하고 연약했다. 하등 쓸모없는 존재. 비품실에 널리고 널린 용품보다 무가치한 인간이었는데, 최근 들어 쓸 곳이 생겼다.

밀레나가 접근한 것이다.

“가하란이 뭔가 말해둔 게 분명해.”

덴스는 보험을 남겨두었다. 사건의 진범을 아는 자가 생존해 있다는 건 크나큰 문제였다.

감정 덩어리인 ‘유단’과 섞여 있을 때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삶의 욕구가, 프레나에 대한 애정이 제거된 지금 ‘나’는 오롯이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무결한 상태.

실로 반가운 상태.

잡음 없는 연산으로 몇 달간 리스트를 추려나갔다. 가하란이 가장 유력했으나 심증만으로는 무엇도 진행할 수 없었다.

교수의 주변인을 떠보고, 설득하고, 뒤를 캐냈다. 철저히 교수 편이었던 오빈 부장을 포섭한 게 가장 큰 성과였다.

교수는 임종 직전 자택으로 가하란을 보내 무언가를 건넸다.

심증이 확증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가하란은 내가 교수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대전제가 세워지고 나니 지난날 마주했던 가하란의 표정들도 하나하나 이해가 됐다.

놈은 알면서도 발설하지 않고 있었다. 프레나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펠트신의 제조처를 알기 위해 참고 있는 걸까.

덕분에 시간이 생겼다.

대비책을 모색했다. 궁지에 몰릴 경우 다른 도시로 빠져나갈 계획도 세웠다. 얼굴을 불로 지지는 것까지도 생각해뒀다.

그러던 차에, 행운이 찾아왔다.

상황을 최악으로 이끌 변인이 알아서 사라져 버렸다.

서쪽의 불청객과 함께 사라진 가하란.

현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봤을 때 유단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몸까지 선물해준 ‘유단’이 마지막 선물로 가하란까지 데려가줬다. 이 얼마나 멋진 우정인가.

일주일 넘게 현장으로 나가 흔적을 찾았다. 혹시라도 단서를 찾아 가하란을 발견하면 먼저 처리할 생각으로.

하지만 그 어디에도 가하란은 없었다.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다.

유일한 증인의 증발.

“어머니. 신이란 것이 저를 어여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유단을 파일철을 들었다.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헛되이 시간을 버릴 순 없다. 인간의 목숨은 짧다. 짧은 만큼 집중해야 한다.

프레나를 통해 밀레나를 통제하면서 시간을 벌고, 연구 성과를 낸다.

흐릿한 줄리어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유단은 연구 자료를 훑었다.

* * *

“그건 아니지 않아?”

C가 만든 조형물은 정말 기괴했다. 다람쥐라고 주장하고 있긴 한데, 누가 봐도 다람쥐는 아니었다.

가하란은 한참을 웃다가 시계를 봤다.

“저녁이네.”

해는 머리 위에 있지만, 시계가 밤이라면 밤인 것이다.

“크랜베리! 블루베리!”

분수대 앞에서 소리쳤다.

도심을 신나게 뛰어놀던 두 고양이가 발치로 다가왔다. 준비한 먹이를 내주고 가하란도 사과를 입에 물었다.

“딱 1년인가.”

아무도 기념하지 않는, 괴이한 곳에 떨어진 기념일을 자축하며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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