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였다.
밀레나는 벌거벗은 느낌이 들었다. 허스의 눈을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이겨내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
“필렌의 눈을 닮았네요. 근데 이건 몰라도 되는 이야기인데, 들을 건가요?”
몰라도 되는 이야기.
듣고 나면 후회할 이야기.
밀레나는 긴장감을 삼키며 말했다.
“가하란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들을게요. 끔찍한 진실이라도 상관없어요. 가능성, 저한테는 그게 필요해요.”
허스가 입을 살며시 벌렸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은 망설일 줄 알았는데.”
“전 그런 성격 아니에요. 물론 머뭇거릴 때도 많지만.”
“가하란이 그만큼 소중한가요?”
“……네.”
엔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엔엔을 바라보았다. 허스에게 모든 걸 들었는지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가하란은 아르드헨에게 검증받았죠. 밀레나 양은 그런 가하란과 많은 걸 공유했고요. 혹시 협회에 관해서 들은 게 있나요?”
“아니요. 들은 적 없어요.”
“그러면 이 배지는요?”
허스가 자그마한 배지를 꺼냈다. 본 적이 있었다. 옛 황제한테 받았다는 배지.
“알아요. 마도사를 찾을 수 있는 배지라고 했어요.”
“배지 사용법은 알려줘도 협회에 관해서는 함구했군요. 올바른 대처예요.”
“……그 협회라는 곳에 옛 황제와 마도사도 같이 있는 건가요?”
대륙의 권력 구도가 단숨에 바뀔 수도 있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총수에 마도사, 거기에 옛 황제까지 포진해 있다면 숨긴다고 해도 두각을 드러냈을 텐데.
“퀼비언 씨는 협회 사람은 아니지만 협조해주고 있어요.”
“협회란 곳은 대체 뭘 하는 곳이죠?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모임인가요?”
정치 싸움에 연루되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한 건 가하란에 대한 정보뿐이다.
“혹시 모를 일을 벌어졌을 때 대처하기 위한 모임이에요. 물론 아르드헨은 통합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지만, 뭐 그건 그 친구가 알아서 할 일이니.”
“대통령. 맞아요, 시장님은 그렇게 말했어요. 대통령이 되겠다고.”
“이미 밀레나 양한테 선포한 모양이네요. 아르드헨 역시 협회에 일원이지만,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고 있어요. 다른 협회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구속력이 강한 모임은 아닌가 보네요.”
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으로 마차가 뛰어오고 있다면, 밀레나 양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옆으로 피해야죠.”
“옆으로 피할 수 없다면요?”
“뒤로 도망치거나, 그것도 안 된다면 뛰어넘어야겠죠.”
“혹은 말을 베어서 멈추게 할 수도 있죠. 협회는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차’를 대비하고 있어요.”
“그게 정확히 뭐죠?”
“외계.”
들었지만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자세한 설명은 차후에 하죠.”
“아, 네.”
허스가 목을 축인 후 말했다.
“요약해서 설명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겪은 일은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없어요. 어떤 사건이 있었고 해결되는 과정 중에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났다, 이 정도로 설명해두죠.”
“재앙이 일어난 원인을 알고 계신 건가요?”
아니, 아는 것뿐만 아니라 혹시 해결한 사람이…….
“시간이 되면 얘기해주죠. 아니, 이런 건 칼리고 씨에게 맡기는 게 낫겠네요. 기껍게 말해줄 테니까요.”
“단장님도 협회에 계신 건가요?”
“네. 실질적인 대표죠. 전 명함에 이름만 새겨 놓은 허수아비고요.”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허수아비라. 웃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나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다른 세계들, 안원이나 영혼세계 말고도 기이한 곳들이 생겨났죠.”
“그게 틈인가요?”
“맞아요. 틈은 모든 게 어긋나버린 곳이에요. 원칙이 파괴되는 공간이기도 하죠.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곳.”
“가하란은 그런 곳에 있는 건가요?”
“확신할 수는 없어요. 몇몇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는 있는데, 가하란도 비슷한 경우라 생각해요.”
밀레나는 민 교수가 겪은 일을 말했다. 몇 달 정도 숲에서 헤맨 거 같았는데 빠져나와 보니 5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고.
“민 크알데. 안면이 있어요.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죠? 틈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듣고 싶은데.”
“둔을 떠났어요. 마도사가 있는 웨켄이란 곳으로요.”
“엇갈렸군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 누구보다 틈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 사람이 퀼비언 씨니까.”
가하란이 틈에 갇혔다면 살아 있을 확률이 있다. 어쩌면 민 교수처럼 어느 날 ‘짠’하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미리 말했지만 가능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싹이 튼 희망을 살며시 짓눌렀다. 밀레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민 교수님도 돌아왔어요. 그러니…….”
“틈에서 돌아온 사람은 몇 없어요. 그리고 민 교수가 겪은 것처럼 기이한 현상에 노출되죠. 민 교수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입니다.”
엇갈린 시간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왔다. 그게 운이 좋은 거라고?
“수십 명의 실종자를 보고 받았고, 그중 귀환한 사람은 민 교수를 포함 셋뿐입니다.”
“그렇다면 가하란도…….”
“민 교수를 제외한 둘은 사망했어요.”
“사망이요? 어째서죠? 돌아온 거 아닌가요?”
“한 명은 무한한 어둠 속에서 몇 년을 있었다고 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눈만 뜬 채.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없다고 했죠. 그리고 돌아온 다음 날 자살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게 버거워졌다.
“다른 한 명은 10여 분간 사라졌다가 수백 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는데, 그분 역시 귀환 직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사망했습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손목을 타고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밀레나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들으면 후회할 이야기.
허스는 지금 가하란에게 실질적인 사망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구할 방법은 없나요? 제가 찾아가서 데려오면 되지 않나요?”
“틈으로 가는 방법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통제자를 잃은 마나의 장난이니까요. 신이 우리에게 이 세계를 맡긴 그 순간부터 수많은 오류가 생겨났어요. 아니, 그전부터 문제는 많았죠.”
신이 우리에게 세계를 맡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허스는 부가적인 설명 대신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도와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요. 퀼비언 씨가 백여 년 넘게 틈에 대해 조사 중이지만, 밝혀진 건 거의 없죠. 시간이 제멋대로 작용하는 틈이 많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구할 방법을 알려주세요.”
“밀레나 양.”
“제발요. 뭐든 할게요. 부탁드려요.”
“우리도 알아보는 중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매달리고 있어요.”
밀레나는 허스를 바라봤다.
성도에 나타난 괴이한 생명체를 단칼에 잘라버린 사람. 한계를 뛰어넘는 무력을 지닌 인간.
“허스 님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나요?”
“미안해요. 나에게 그런 재주는 없어요. 누군가를 해하는 건 참으로 쉽지만, 구하는 건 못 하는 무능한 힘이죠.”
허스가 자신의 검을 매만지며 말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감정의 변화는 길지 않았다. 허스는 바람이 일지 않는 호수의 표면처럼 차분해졌다.
“왜…… 이런 얘기를 해주신 거죠? 전 방법을 알려주실 줄 알았어요. 가능성이라고 하셨지만, 희망도 함께 건네주실 줄 알았어요.”
밀레나는 턱을 들어 올렸다. 허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제 단념하라는 건가요? 포기하라는 건가요?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 현실을 직시하라는 건가요?”
“밀레나 양이 그걸 바란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게 싫다면…….”
허스가 눈웃음 지으면서 일어섰다.
“밀고 나가세요. 그게 무엇이 됐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최선은 최고의 결과는 보장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헛된 노력으로 끝날 경우가 많아요. 밀레나 양은 시간을 헛되이 쓰는 걸 싫어하나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을 테죠.”
허스가 식탁에 올려둔 배지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당장 가하란을 구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게 될 누군가를 언젠가 도울 수 있겠죠. 배지는 두고 갈게요. 원한다면 가지세요. 싫다면 버리시고요.”
밀레나는 배지를 바라봤다.
“무능한 제가 너무 싫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남을 돕는다고 해서 이 마음이 괜찮아질까요?”
“모르죠. 미련한 도피처일지도 모릅니다. 배지 같은 건 버리고, 틈 같은 것도 잊고 사는 게 현명할 수도 있어요.”
옳은 말이다.
영웅이라 칭송받아 마땅한 인물들이 미지의 위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게 손을 보탠다고 대단한 도움이 될까?
다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용병단으로 돌아가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 빠지다 보면, 모든 걸 잊게 되리라.
한 번 잊으면 편안해지고 익숙해지고, 그렇게 적응하며 살아갈 테지.
타협.
끔찍한 단어였다.
밀레나는 손을 뻗어 배지를 움켜쥐었다.
“제가 할 수 있을 일이 뭐죠?”
허스는 외투를 옆구리에 끼며 말했다.
“가하란을 찾기 위해 뭐든 해보세요. 협회는 그런 식으로 굴러갑니다. 통치자에 의한 확고한 목표는 없어요. 각자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렇게 마련된 옵션 안에서 대비책을 강구하죠.”
“……너무 주먹구구식 아닌가요?”
“제대로 봤어요. 제멋대로죠. 혹시 통일감이 필요하다면 밀레나 양께 협회장을 양도할게요. 어때요? 해볼래요?”
“아, 아니요. 그건 싫어요.”
냅다 도리질을 쳤다. 듣기만 해도 눈이 번쩍 뜨이는 사람들 위에 선다? 위염으로 세상을 등지게 될 것이다.
“우린 미숙해요. 이제 막 세상을 양도받았으니까요.”
“아까 말씀하셨죠? 신이 우리에게 세계를 맡겼다고. 이게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로예요. 신은 은퇴했어요. 우리는 운명을 쥐게 됐죠. 그게 뜻하는 바는 간단해요. 집을 관리하던 사람이 손을 뗐으니, 이제 우리가 관리해야 해요. 문제는 우린 집의 구조조차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살펴봐야죠. 어디가 현관이고, 어디가 침실이며, 어디가 화장실인지.”
협회에 가입했으니 이 정도는 알아둬야겠죠, 허스는 그 말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밀레나도 따라서 일어서려 했으나 엔엔이 저지했다.
“허스와 할 얘기가 있어요.”
“아, 네.”
엔엔이 허스의 뒤를 따라 나갔다.
밀레나는 창가에 서서 나란히 걷는 둘을 바라봤다.
“카트시. 가하란은 살아 있을 수도 있어. 아니, 살아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을래. 믿고 움직일래.”
다짐하듯 조용히 말했다.
* * *
“단념시킬 거라 생각했어요. 위로해 주면서.”
엔엔은 쭉 뻗은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생각이었죠.”
허스가 대답했다.
“근데 왜 생각을 바꾼 거죠? 그 애한테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저 아이의 눈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피는 못 속인다고 필렌의 고집이 담겨 있었어요. 그러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죠.”
엔엔은 조용히 숨을 뽑아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하란, 그 아이가 살아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보나요?”
“알 수 없어요. 확률을 논할 만큼 표본이 많은 것도 아니니.”
“무력하네요. 이런 기분을 맛보는 건 오래간만이에요.”
“앞으로 자주 느끼게 될 겁니다. 삐걱거리는 세계와 마주해야 하니까요.”
엔엔은 허스가 내민 배지를 받았다.
“원하는 바를 이루면 탈퇴할 거예요.”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자유입니다.”
“허스. 당신은 왜 이 짐을 지고 있는 거죠? 책임감 때문인가요?”
엔엔은 자리에 멈춰 서며 말했다.
허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 사람이 느긋하게 있다가 오라고 했어요. 그뿐입니다.”
엔엔은 멀어져가는 총수의 등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