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화
가하란.
타인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이름. 가슴을 건드리고 진한 울림을 남긴 채 이내 허무하게 흩어지는 이름.
“살아있으면 해요. 하지만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죠.”
엔엔은 두서없이 말했다. 논리정연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총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과연 옛 중앙 군부의 수장다운 모습이었다. 그가 봐온 죽음은 수없이 많을 터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엔엔은 숨을 들이마셨다. 우거진 숲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설명해 줄게요.”
“마수를 찾는 중이라고…….”
“이제 됐어요.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니까요. 그걸 살려두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지만, 찾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면하는 건 이제 그만 둬야죠.”
머리로는 한참 전에 이해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마음마저 머리가 하는 말에 동조했다. 가하란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가죠, 둔으로.”
엔엔은 지도를 움켜쥐며 말했다.
* * *
“고마워요, 언니.”
밀레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프레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매번 말하고 싶었어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전 무너졌을 거예요.”
“나 때문이 아니야. 네가 잘 이겨낸 거지.”
프레나가 곁에 앉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유단 오빠는 여전히 연락이 없어요. 몇 달째 연구소에 박혀 있죠. 제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에요.”
“사정이 있겠지.”
“사정이야 다들 있겠죠.”
작게 한숨을 내쉬는 프레나였다.
밀레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석 달 전 프레나를 만난 건 계획된 일이었다. 유단을 감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카트시의 동료를 찾아낼 수단으로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프레나와 대화하고, 그녀가 겪은 일을 들으며 공감대가 형성됐다.
소중한 사람과 멀어졌다는 공통점. 같은 상처를 지닌 프레나와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제법 아끼는 동생이 됐다.
그렇기에 망설여졌다.
준비해둔 말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언니?”
프레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동자에 궁금증이 한가득하였다.
“전에 말했지? 너희 오빠가 갑자기 변했다고.”
“네. 그랬죠.”
“네가 곤란해할까 봐 그동안 제대로 묻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간 일부로 회피해왔던 질문을 던졌다. 프레나의 표정이 금방 애처로워졌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불편해하는 걸 알고 여태껏 묻지 않은 거잖아요.”
“그렇긴 해. 하지만 이대로 계속 내버려 두면 상황이 악화될 거 같아서. 문제점을 알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점. 네, 그야말로 문제네요.”
프레나가 두 손을 포개 무릎에 올려두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문제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오빠는 갑자기 변했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죠. 이유를 물어도 사람은 변한다는 말만 되풀이했고요.”
진실을 알면 프레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학회장을 죽인 사람이 유단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면…….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석 달. 한 사람의 모든 걸 파악하기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프레나가 모질지 못하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정이 많고 여리다. 가해자가 유단이라는 진실을 프레나는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이유 없이 변하지 않아. 학회장님께서 사고를 당하셨을 때 유단 씨 주변에 낯선 인물이 있었어? 아니면 못 보던 물건이라든지.”
프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아빠를 닮아 정해진 일과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어요.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었죠. 취미 같은 것도 없었어요. 오로지 연구뿐이었죠.”
“그래?”
“오빠 방에도 몰래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반듯했어요. 어긋난 게 하나도 없었죠. 오빠답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펠트신의 제조법을 건넨 유사정령. 그것의 위치를 알아내야 했다.
자택에 둔 게 아니라면 개인연구실에 보관해뒀을까? 둔 밖에 뒀을 리는 없다. 성벽 출입이 잦으면 이목을 끌 테니까.
“저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대놓고 조사해보라고 할 수도 없다. 망설이고 있을 때 프레나가 입을 열었다.
“몰래 연구실을 뒤져볼까요?”
“뭐?”
“저도 오빠가 변한 원인을 알고 싶어요. 언니는 연구실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 중이죠?”
“아마도.”
“한 번 해볼게요. 연구소 사람들하고 알고 지내서 오빠 연구실까지 가는 건 문제 없어요. 몰래 들어가는 게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볼게요.”
“괜찮겠어? 오빠와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미 엉망인걸요. 오빠가 어긋난 길을 걷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되돌리고 싶어요.”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무리하지는 마.”
“알겠어요.”
프레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얘기는 그만하고! 언니, 요리해본 적 있어요?”
“요리? 야전에서 간단히 먹을 건 해본 적 있어.”
“제과는요?”
“해본 적 없어.”
“그러면 같이 해요. 최근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꽤 까다롭기도 하고. 집중하면 시간도 잘 가요.”
손을 잡아 이끄는 프레나였다.
어울려주자, 밀레나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 * *
조용한 집.
밀레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카트시, 나 왔어.”
대답 없는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빵이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엉성하게 생긴 쿠키를 하나 물고 카트시 옆에 앉았다.
“이것 봐. 내가 만든 쿠키야. 모양은 이래도 맛은 제법 좋아.”
뚝, 반으로 잘린 쿠키가 입안에서 뒹굴었다. 단 게 싫어서 아몬드 비중을 높였는데 구우면서 탔는지 좀 쓰다.
“프레나한테 결국 짐을 지웠어. 아니지. 원래대로라면 만나자마자 부탁하려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몹쓸 짓이라고 생각했다.
프레나를 부채질하면 결국 진실에 근접할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겠지.
“이분법적인 세상은 없는 걸까? 저놈은 나쁜 놈이니까 때려죽이고, 저놈은 착한 놈이니까 칭송하고. 애매한 선악이 사람을 난처하게 해.”
밀레나는 검지로 카트시를 툭툭 건드렸다.
이 집에 혼자 산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엄마한테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해 주었다.
“내 딸이라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속사정은 말하고 싶을 때 말해. 그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엄마와 삼촌들은 둔을 떠났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양질의 마수 뼈를 구해 한바탕 마시고 있을까, 아니면 허탕을 쳤다고 우울해하며 마시고 있을까.
“어쨌든 마시고 있겠지.”
창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사이로 숨었던 그믐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엔엔도 저 달을 보고 있으려나?
마수를 뒤쫓아 둔을 떠난 엔엔은 언제쯤 돌아올까. 수확은 있을까, 아니면 빈손일까.
모두가 분주히 움직였다.
루드 팩토리 사람들도 가하란을 찾기 위해 모든 걸 내던졌다. 공장이 멈추고 물량이 말랐다.
그런데도 성과가 없었다.
일주일 전, 가하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공동묘지에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밀레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가하란의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걸 놓아버릴 것 같았다.
유단의 뒤를 캐면 뭐 하지?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텐데.
위험한 유사정령이 난리 치는 게 뭐 어때?
어차피 사람 죽는 건 똑같을 텐데.
“사람이 참 못났다, 그렇지?”
카트시에 대고 말했다.
넉 달.
반년에 가까운 시간.
희망을 붙잡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게 몰염치해지는 시간.
사실 한참 전에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폭발과 함께 실종. 아니, 실종이란 단어를 쓰기에도 우스운 상황에서 다들 미련하게 희망을 붙들었던 것이다.
“놓아야 하는데 난 놓을 수가 없네. 왜일까?”
싸구려 술을 가져왔다. 좋아하지도 않지만 입에 털어 넣었다. 달큰하게 취하고 싶지만 역한 냄새가 올라오며 정신만 또렷해질 뿐이었다.
가하란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언젠가 둔을 떠날 때 같이 가줄 수 있겠냐는 말.
“당연히 같이 가야지.”
검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카트시, 오늘은 일찍 잘게.”
본체를 쓰다듬고 침실 문을 열 때였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났다.
엔엔이 돌아온 걸까?
잠시 숨을 고르고 표정을 다잡았다.
“왔…….”
첫 마디를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엔엔 뒤에 사람이 있었다.
남자 둘. 둘 다 아는 사람이었다.
왜 여기에?
“밀레나 엔첸세, 오랜만이네요.”
6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총수가 말을 걸어왔다.
* * *
“난 샬롯을 보고 올게. 들어보니까 율만 돌아가고 샬롯은 여기 남아 있다네. 고집을 부린 모양이야.”
구치가 소시지 하나를 들면서 일어섰다.
“밀레나, 만나서 반가웠어.”
“네, 아저씨.”
루드 팩토리가 루드 여관이었던 시절, 그곳에서 구치를 만났었다. 테리와 제니가 따르던 사람이라 얘기도 제법 나눴었다.
사냥꾼과 총수.
기묘한 조합이었다.
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끝내지 못할 수많은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 있겠지.
허스가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아냈다.
“맛있는 식사였어요. 고맙습니다.”
“뭘요.”
엔엔이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저기, 총수님.”
“저는 이제 총수가 아닙니다. 허스, 혹은 랜더. 둘 중 하나로 불러주시면 돼요.”
“랜더요?”
“여행할 때 만든 이름입니다. 절 랜더라 부르는 사람도 이제는 꽤 많아져서 좀 곤란하긴 해요.”
부드럽게 웃는 허스였다.
성도에서 만났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홀가분한 표정.
“총…… 아니, 허스 님.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저는 이게 편해요.”
“그러시다면 뭐…….”
예전 같았으면 들떠서 질문을 퍼부었을 것이다. 선물 받은 만년필 얘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잡다한 말을 꺼냈을 테지.
밀레나는 침묵을 입에 물었다.
그토록 존경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지만,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한 사람의 부재가 이토록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가하란 얘기를 들었어요.”
밀레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허스 입에서 그 애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실종. 흔한 일은 절대 아니죠. 일반적으로는 벌어지지 않는 일이에요.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다면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죠.”
“그게 무슨 말씀이죠?”
“희망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가하란, 그 아이는 틈에 갇혀 있을지도 몰라요.”
“네? 틈이요?”
허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틈이라니요? 균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현실의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현실이란 개념조차 우리의 주관에 따른 해석이긴 하지만.”
허스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세상에는 알아봤자 좋을 게 없는 얘기가 많죠. 지금부터 할 얘기도 마찬가지고요. 모르는 편이 좋은 이야기, 듣고 나면 후회할 이야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