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들어가지 말라고 쓰여 있어도 기어이 열고만 마는 게 본능 아닐까.
가하란은 출입 금지 문구를 눈으로 훑으며 문을 열었다. 두 마리의 고양이가 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터라도 되는 양 뛰어다닌다.
블루베리는 바닥에서 놀았는데, 크랜베리는 선반을 발판 삼아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알겠네.”
풀풀 날리는 검은색 털을 손으로 휘휘 치워내며 주변을 살폈다.
벽에는 사용감 있는 캐비닛이 줄지어 서 있었다. 중앙에는 철제 선반이 놓여 있는데, 텅 비어 있었다.
다발로 묶인 커넥터와 선반의 크기로 봤을 때 다수의 유사정령이 이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카트시의 동료들이겠지.
다 어디로 간 걸까?
캐비닛을 열어봤다.
문서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는데 텅 비어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종이 박스도 열어봤다. 파일 몇 개가 반겨주었다.
주저앉은 채로 파일철을 들췄다.
“커피콩 볶는 방법…….”
다른 파일철도 거병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 해석하기, 별자리 탐구, 지독하게 단 설탕 제조법 등등.
다른 캐비닛도 열어봤다.
대부분 비어 있거나 자료가 있다고 한들 쓸모 있는 건 없었다.
“정리한 뒤인가.”
가하란은 오래전 브라인의 심상세계에서 본 줄리어스의 기록을 떠올렸다.
-서른두 개의 유사 정령을 유폐한 죄목으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형 집행일 닷새 전에 실종. 최초의 오토마타도 이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
연구실을 정리한 건 줄리어스일까, 아니면 사건 이후 조사관들이 자료를 쓸어간 걸까.
“도움이 될 만한 건 없는 건가.”
그러다 문득 휴게실에 있는 유사정령이 떠올랐다.
다른 유사정령은 제작자인 줄리어스 손에 의해 폐기됐다. 연구실 안에 있는 자료들 역시 줄리어스 혹은 조사관에 의해 옮겨졌다.
밖에 있는 유사정령은 왜 건들지 않은 거지?
의문을 기억해둔 채 방안 곳곳을 살폈다. 혹시라도 숨겨둔 자료가 있지 않을까,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왕성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주황색 선.
곧바로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정보의 선으로 변하는 주변 사물을 훑을 때였다.
주황색 선이 보였다.
“저긴.”
휴게실로 돌아와 선반에 놓인 유사정령을 바라봤다. 주황색 선이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끝나고 있는 건가?
뜨거워지는 눈을 달래며 유사정령 앞으로 걸어갔다.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얼음물에 손을 담근 것 같았다. 아니, 끓는 물에 넣은 것 같기도 했다.
손을 에워싸는 고통에 가하란은 주저앉고 말았다.
정보의 세계가 풀렸다. 손바닥 상태를 확인했다. 피부가 헐어 있었다. 자그마한 수포도 일어났다.
눈을 찡그리며 손을 감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보.
매만진다고 해서 물리적인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비정상적인 접근 확인. 거부합니다.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유사정령이었다. 가하란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름이라도 알려주면 안 돼?”
-거부합니다.
완강한 친구였다. 외형은 카트시와 똑같은데 알맹이는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가하란은 물에 적신 천을 손바닥에 댔다.
“자료마저 줄리어스가 다 치운 거라면…….”
한 달 동안 왕성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지만, 줄리어스가 남긴 자료 같은 건 없었다.
유사정령을 유폐할 때 같이 묻어버린 걸까.
냐아, 폴짝 뛰어오른 블루베리가 허벅지에 앉았다. 손길이 그리웠는지 계속 다가온다.
“혹시 줄리어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동그란 눈에 대고 물어봤으나 돌아온 건 발길질이었다.
* * *
가하란이 사라지고 넉 달이 지났다. 실종 두 달째 접어들었을 때 엔엔은 마음을 정리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영원한 것은 없다.
“후.”
반으로 가른 마수를 바라보다가 지도를 꺼냈다. 눈대중으로 만들어낸 지도지만 제법 쓸 만했다.
“이 근방에는 없는 건가.”
서쪽의 불청객을 쫓는 것도 마무리 지어야 하나, 엔엔은 나무 위로 올라가 주변 일대를 살폈다.
300년 동안 살아오며 쌓아온 직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서쪽의 불청객은 살아 있다고.
하지만 단서가 없었다. 둔의 랍파들도 최선을 다해 조사하다가 사건 종료를 선언하고 해산했다고 들었다.
지금 서쪽의 불청객을 쫓는 건 나 혼자이리라.
엔엔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까마득한 지평선 너머에 둔이 있을 것이다.
밀레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카트시는 여전히 잠들어 있을까? 브라인은 기억을 되찾았을까?
수통을 열어 목을 축였다.
허무함이 밀려든다. 가하란의 죽음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인 순간, 서쪽의 불청객을 쫓는 건 의미 없는 일이 됐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도 미성숙하구나.”
만남과 이별.
200년을 넘게 살아오며 익숙하다 못해 무감각해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가슴에 남아 있는 그 아이의 웃음이, 열망을 담고 있던 눈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자식을 잃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헛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머리 위로 하늘석이 지나갔다. 세상이 변해도 저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휴식을 끝내고 출발하려 할 때였다. 맞은편에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초가을 바람을 타고 냄새가 전해졌다.
인간의 땀 냄새였다.
야생동물의 누린내였다면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인간의 생활권이 아니었다.
미개척지.
마수가 날뛰는 위험한 곳에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높은 하늘에는 구름만 떠 있었다. 매가 없는 걸 봐서는 랍파도 아니었다.
경계하면 지면을 바라볼 때였다.
젖은 가지를 툭 쳐내며 인간 한 명이 나타났다.
어깨에 건 장궁과 허리 왼편에 달아둔 곡도.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부츠.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하지만 오지까지 홀로 들어와 사냥을 하는 건가?
헛웃음을 흘리며 경계심을 누그러트릴 때였다.
수풀이 크게 출렁거리더니 안쪽에서 노루가 튀어나왔다. 아니, 노루와 닮은 무엇이었다.
덩치는 군마보다 컸다. 등을 뚫고 비죽 솟은 뼈에서는 번들거리는 기름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수.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다. 특유의 냄새도 없었다.
저 등에 분비되는 체액이 냄새를 통제한 건가?
인간이 반응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내버려 두면 죽는다.
신체술을 급히 끌어올려 마수를 향해 몸을 날릴 때였다.
예리한 소리가 났다. 손가락 끝을 얇은 종이에 대고 그으면 날법한 소리가.
온몸이 경직됐다. 접근하면 안 된다고 본능이 날뛰었다. 공중에서 몸을 튼 엔엔은 그대로 바닥에 내려왔다.
몸을 바짝 낮춘 채 인간을, 그리고 마수를 바라봤다.
흉포한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던 마수가 비스듬히 갈리더니, 양쪽으로 쪼개져 쓰러졌다.
미약한 소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털이 곤두섰다.
참격의 순간을 보지 못했다. 무엇으로 공격한 건지, 그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
엔엔은 사냥꾼의 곡도를 바라봤다. 저걸로 마수를 베고 다시 허리에 매달아 놓은 건가?
만약 사실이라면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칼랑의 눈으로도 잡아낼 수 없다니.
“말을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만 깜짝깜짝 놀란다고.”
사냥꾼이 뒤를 보며 외쳤다.
깜짝 놀랐다는 걸 보면 마수를 쓰러트린 건 사냥꾼이 아닌 걸까?
아니, 그보다.
엔엔은 사냥꾼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한 명이 더 있다고?
“천천히 가자니까요.”
“천천히 가는 중이야.”
남자였다. 여행용 망토를 두른 남자. 손에 날렵한 장검이 들려 있었다.
마수를 벤 건 저 인간인가?
하지만 거리가 멀었을 텐데.
사냥꾼이 쓰러진 마수를 힐끔 보고 정면을 바라봤다. 그제야 엔엔과 눈이 마주쳤다.
“늑대……는 아닌 것 같고. 칼랑족입니까?”
엔엔은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당신들은 누구죠?”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건 썩 좋아하지 않는데.”
“……칼랑의 후손 맞아요. 엔엔이라고 해요. 그쪽은요?”
“이야, 칼랑의 후손은 보기 힘들다고 하던데. 아! 구치입니다. 이런 곳에서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워낙 위험한 곳이잖아요.”
“그렇죠. 위험한 곳이죠.”
엔엔은 구치를 바라보다가 왼편에 선 남자에게 시선을 줬다.
“마수를 쓰러트린 건 당신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사냥감이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나무에서 계신 걸 보고 혹시나 했거든요.”
엔엔은 눈을 찌푸렸다. 나는 상대를 인식조차 못 했는데, 상대는 내 위치까지 알고 있었다. 탐색 능력은 자신 있었는데.
망토를 두른 남자가 눈을 얇게 뜨며 엔엔을 바라봤다.
“왜 그러죠?”
엔엔이 물었다.
“혹시 둔 연구단지에 계셨습니까?”
“절 아시나요?”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거병 개발 현장에서 한 번 봤습니다. 엔엔 공방주님, 맞으시죠?”
공방주라 부르는 걸 보면 안면이 있다는 뜻이다. 엔엔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서글서글한 눈. 잔수염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정리한 턱. 단정한 인상의 인간.
“미안해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이해합니다. 공식 석상에 나갈 때는 이런 몰골이 아니었거든요. 몇 번 나간 적도 없고.”
남자가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랜더…… 아니, 허스입니다.”
“허스?”
낯익으면서도 낯선 이름. 허스, 허스. 거병 개발 현장에 얼굴을 비칠 정도면 주요직에 있었다는 건데…….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아는 인간 중 허스라는 이름을 가진 건 한 명뿐이에요.”
남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을 겁니다.”
“내 기억 속 총수와는 너무나도 다르네요. 그땐 뭐라고 해야 할지…….”
제국 기사의 총수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은 텅 빈 눈과 깡마른 얼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던 우울한 냄새.
“시체 같았어요. 올바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것보다 적당한 표현을 찾기 힘드네요.”
“적절한 비유입니다.”
엔엔은 허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라운드 제로 직전에 복귀했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 뒤로 다시 자취를 감췄죠. 지금까지 어디에 있던 건가요?”
“어디에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한곳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어요. 곳곳을 돌아다녔죠.”
엔엔은 손을 놓으며 허스를 바라봤다.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강인한 냄새도, 예리한 기도도 없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지만, 눈앞에 있는 인간의 무력이 예상 못할 경지에 있다는 건 확실했다.
“공방주님께선 이곳에 어쩐 일로…….”
“마수를 쫓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저희는 둔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데려가야 할 친구가 그곳에 있거든요. 아, 만나야 할 아이도 있고.”
친구와 아이.
허스가 웃으며 말했다.
“둔에 계셨으니 잘 알고 계시겠네요. 가하란, 그 아이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나요?”
(다음 편에서 계속)